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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nd May 28. 2020

존재의 짓 (벌새)

영화 속 ‘오프닝’ 돋보기

“엄마 문 열어 줘. 엄마! 아 엄마! 나 왔다고! 문 열어줘 장난치지 말라고!”

첫 부분부터 강렬했다. 초인종을 누르고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문. 그 문을 손으로 두드리고 발로 차며 애타게 부르는 여자 아이. 절규에 가까워지는 아이의 외침. 필시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카메라는 아이의 시선을 따라 닫힌 문을 클로즈업 한다. ‘902호’


여자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심히 한 층을 더 올라 간다. 초인종을 누르자 이내 엄마가 나와 아이를 맞아준다. 문이 닫힌다. ‘1002호’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한 층을 덜 올라 간 것이었다. 카메라의 시선이 서서히 멀어지다가 화면이 암전된다. 까만 화면 한 가운데 영화 제목이 뜬다. ‘벌새’ 


프롤로그나 오프닝은 본문의 내용을 어느 정도 함축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기시감이 드는 이유. 영화의 내용이나 에피소드가 오프닝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큰 일이 일어난 것처럼, 대단한 한 것들이 일어날 것처럼 해 놓고서는, 정작 대단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영화는 중학생 소녀 ‘은희’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이성 친구를 사귀고, 동성친구와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고, 집안일을 돕는다. 오빠에게 맞기도 하고, 부모님의 불화를 목격하기도 한다. 그 때마다 ‘열심히’다.


큰 사건이 일어나거나, 그 과정에서 주인공이 딱히 해결해야할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아주 평범한 여중생인 은희에겐 그럴만한 힘도 없다. 다만 그 모든 것을 감내하고 열심히 살아갈 뿐이다. 오빠의 폭력을 참는 것에도, 참다가 학원 선생님의 말을 듣고 온 가족 앞에서 폭발할 때도 그렇다. 잘못 알고 찾아간 한 층 아래 문 앞에서 난리를 친 것처럼. 또 그러다 묵묵히 넘어가는 조금은 심심한 전개다. 


아버지가 엄마를 밀쳐 넘어뜨리고 엄마는 스탠드를 깬다. 그 잔해가 튀어 아버지의 팔을 찢어 피가 난다.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구급상자를 가져와 아버지의 팔에 거즈를 대어 처치  한다. 다음날, 부모님은 나란히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웃는다. 중학생인 은희는 어리둥절하다. 이성에게 느끼는 감정, 아리송한 친구와의 관계들 역시 그렇다. 그런 은희는 자신이 속한 일, 주변에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고 살아가기 위해 매번 온 힘을 다한다. 


단지 오프닝이 아닌, 삶 전체로부터 오는 기시감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들. 그런데도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에 대한 것이다. 5살 때인가 공 풀장에서 허우적대던 기억. 친구인 줄 알았던 애가 나와 싸우던 아이 편을 들던 때의 배신감. 부부싸움을 하던 부모님을 보며 세상이 무너지는 불안감에 휩싸였던 기억들.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닌 기억들.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지만 당시에는 분명 적어도 내 세상이 멸망하고 말고 할 정도의 일들 이었다. 


개인은 그의 삶 뿐 아니라 시대를 살아가기도 한다. 은희의 삶에 일어난 ‘성수대교 붕괴’사고 역시 시대와 사회의 아픔이다. 시대의 아픔은 개인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그 슬픔을 감내하고 그저 살아가기 위해 버티는 것 역시 벌새 같은 개인의 몫이다. 다만 그 자리에 버티고 있기 위해 개인은 온 힘을 다한다.


은희가 직접 관여하거나 해결할 일은 없었다. 은희의 삶과 그 시절을 살아내는 것 자체로 수많은 날개 짓을 하며 버텨냈다. 치기어린 친구의 행동에 마음을 다치고, 이성 친구에게 괜한 질투를 느끼는 은희를 단순히 ‘어리고 귀엽다’라고 할 수 없는 이유다. 또 그런 은희를 그저 연민할 수도 없다. 은희는 1994년 여중생인 동시에 모든 때, 모든 곳의 모든 존재이기도 하기에.    


은희가 가지고 다니던 삐삐가 스마트폰으로 바뀌고, 카세트테이프가 스트리밍 서비스로 바뀌었다. 더 이상 하루아침에 다리가 무너지진 않지만, 안타까운, 어이없는 사고들은 계속된다. 우리들은 여전히 은희가 버텨냈던 것을 그대로 버텨내고 있다. 은희가 사는 그 이전에도 그랬듯. 영화 내내 느꼈던 기시감과 익숙함은 단순히 ‘내 경험’이 아니라 모든 존재에 대한 ‘동질감’이 아니었을까. 


벌새는 5cm에서 20cm정도 되는 가장 작은 새다. 많게는 1분에 90번까지 날개 짓을 하는 벌새는 다른 새처럼 바람을 타고 유유히 날지 않는다. 벌처럼 꽃의 꿀을 먹는 벌새는 가만히 멈춰 있기 위해 수많은 날개 짓을 한다. 애틋하고 아름다운 ‘존재의 짓’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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