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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nd Jul 31. 2020

'짖는 개'와 '무는 개' (플란다스의 개)

영화 속 ‘다른 제목’ 돋보기

 상대팀 선수가 1명 늘어나거나 우리 팀 선수가 1명 줄어드는 것은 승패에 있어 치명적이다. 그보다 더 좋지 않은 경우가 있다면, 우리 편이 상대팀으로 넘어가는 거다. 이 경우, 2배는 더 불리하거니와 정신적 타격까지 더해진다. 


 더 위협적인 상황을 생각해보자. 적 팀으로 넘어간 아군이 적 팀을 위한 활동을 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스스로 배신자라는 걸 깨닫지 못하는 경우, 또 같은 팀도 그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는 것, <플란다스의 개>는 이런 최악의 상황에 대해 말한다. 


 고윤주는 교수를 꿈꾸며 시간강사를 하고 있지만 사실상 백수에 가깝다. 영화 초반 고윤주는 크게 짖어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동네 강아지를 지하실에 가둔다. 강아지를 찾는 전단지에 그 강아지는 성대 수술을 해 짖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강아지를 풀어주러 간다. 하지만, 이미 주인 없는 강아지를 발견한 경비원이 보신탕으로 끓일 준비를 마친 뒤다. 

고윤주에 의해 지하실에 갇힌 개를 손질하는 경비원      (경비원이 죽였는지 갇혀있다가 죽은 걸 발견했는지는 영화에서 확실히 나타나진 않음)


 고윤주는 소란의 진짜 원인이었던 이웃집 개를 잡아 옥상에서 던져 버린다. 애완견을 의지하던 주인 할머니는 강아지의 사체를 발견하고는 앓아눕고, 세상을 떠난다. 한편, 같은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근무하는 여직원 박현남은 은행 강도를 잡아 유명해진 사람처럼 되고 싶고, TV 출연도 하고 싶다. 그러던 차에 고윤주가 옥상에서 강아지를 던지는 걸 보게 되고, 범인을 쫒아 가지만, 눈앞에서 놓친다.  


 <플란다스의 개>의 영어 제목은 ‘barking dogs never bite’다.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라는 이 속담은 영화 내내 변주된다. 우선 영화에서 ‘짖는 개’는  희생당하는 개들을 말한다. ‘짖는 개’로 의심받아 죽은 성대 수술을 한 첫 번째 강아지는 고윤주가 오해해 가두는 바람에 죽었다. 두 번째 개는 직접적으로 고윤주가 옥상에서 던져버린 할머니의 치와와다. 고윤주는 명백히 자기에게 해를 입히지도 않고 그저 신경을 긁었다는 이유로 무고한 개들을 죽인다. 영화 속 확실한 악인을 꼽는다면 고윤주가 분명하다.  

이웃 주민의 개를 옥상에서 떨어 뜨리는 고윤주 

 

 짖는 개의 의미는 동물에서 인물로 확장된다. 아파트 주민의 개를 먹은 경비원이나 아파트 보일러실에서 무단으로 거주하며 주인 잃은 강아지를 잡아먹으려 하는 노숙자를 도덕적인 인물이라곤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둘은 죽은 개를 먹거나, 먹으려고 한 것일 뿐, 직접적으로 개의 죽음과 관련은 없다.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고 할지라도, 개 2마리를 죽인 고윤주보다 무고한 인물인 것은 틀림없다. 그럼에도 관객은 겉모습이나 형편이 좋아 보이지 않은 경비원이나 노숙자보다 위선적인 교수 지망생인 고윤주에게 감정을 이입한다.      


 영화에서는 악인인 고윤주에게 오히려 감정이 이입하게 되는 분기점을 대놓고 보여준다. 여름철 방역하며 나온 연기가 카메라를 전부 뒤덮는 장면이다. 아내가 사 온 개를 산책시키는 중, 고윤주는 방역하는 곳을 지나간다. 바닥에 떨어진 즉석복권을 주워 동전으로 긁는 사이, 개를 잃어버린다. 동네 개들을 죽였던 고윤주가 아내의 개를 잃어버리게 된다. 고윤주는 그 개는 임신한 아내가 일을 그만두면서 퇴직금으로 산 것이고 남은 1500만 원을 자신의 교수 임용에 보태기 위해 쓰려고 했다는 사실을 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 고윤주는 아내의 개를 되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한다. 개나 아내 자체에 대한 측은지심 때문이 아니라, 교수가 되고 싶은 이기심에 따른 태세 전환이다. 


 여전히 고윤주는 얄미운 인물이지만 개를 찾아 나서며 고생을 하는 이 지점부터 고윤주가 조금은 측은하게 보이기 시작하고, 관객은 스스로를 고윤주와 동일시한다. 관객은 이미 두 차례 개로 탕을 끓인 경비원이 야채를 사서 지하실로 향하는 것을 보고 고윤주네 개를 먹으려 하는 걸로 의심하고, 옥상에서 고윤주네 개를 잡아먹으려 하는 노숙자에게 불편한 눈길을 보낸다. 카메라 너머의 방역 연기는 고윤주가 개를 잊어버리게끔 하는 원인이자 스크린 너머 관객의 인식을 전환시키는 전도의 역할을 한다. 관객은 경비원, 노숙자, 관리소 여직원, 문구점 여자와 같이 무고한 사람이 아니라, 악인인 고윤주에게 이입하게 된다.  

방역 연기에 휩싸인 고윤주

 

고윤주네 개를 찾는 전단지를 붙이는 고윤주와 박현남


 고윤주는 사이코패스나 악랄한 범죄자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영화에 극 중 다른 인물과 비교했을 때, 분명한 악인이 맞다. 동시에 영화 결말부에 나오는 악인과 선인의 보상의 극명한 대비는 불합리한 사회 보상체계를 은유한다. 노숙자로부터 고윤주네 개를 구한 현남이 그 공로로 받은 것은 애완견을 잃고 충격에 죽은 할머니의 무말랭이와 실체 없는 뿌듯함이 전부다. 현남이 무말랭이를 받게 되는 장면은 언뜻 현남을 우롱하는 듯 보이지만 동시에 관객을 우롱하는 것이기도 하다. 경비실에 찾아온 고급스러운 노부인은 현남에게 할머니의 유언장을 건넨다. 이 장면은 마치 동화나 아침 드라마에서 선하게 살아온 주인공이 인생을 역전하는 순간과 닮았다. 하지만 정작 그 유언장에는 옥상 위에 말려놓은 무말랭이를 양도한다는 것이 전부다. 우연히 하게 된 선행이 막대한 부를 가져와 주는 동화 같은 이야기 대신 현실을 보여준다. 현남에게 주어진 보상은 현남이 원했던 텔레비전에 나오지도 못하고, 동네 개들을 찾기 위해 선의로 자리를 비운 죄로 관리소에서 잘린다. 


 고윤주는 교수 임용을 위해 윗사람에게 뒷돈을 건네고 오는 중에 현남을 마주친다. 어느 정도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윤주는 현남에게 뒷모습을 보이며 뛰면서 자신이 범인이었음을 유추하게끔 한다. 고윤주는 끝까지 정정당당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속죄하지 않은 채 자신의 죄책감만 덜려하고, 현남은 알아채지 못한다. 이 장면의 객관적 사실은 윤주의 비겁함이다. 하지만 관객은 윤주가 어느 정도 양심이 있는 인물, 현남은 답답한 인물이라는 감정을 느낀다.   


 한편 현남의 친구는 노숙자와 닮았다. 강도를 잡은 은행원을 보며 부러워하는 현남에게 현남의 친구는 “자기 돈도 아닌데, 죽으려고 환장했다.”라고 한다. 이 말은 개를 보호하려는 현남에게 “아가씨 개 아니면 같이 구워 먹자.”라고 하는 노숙자의 말과 겹친다. 실체 없는 명예나 뿌듯함 따위의 꺼풀을 벗기고 보다 객관적으로 상황을 보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노숙자와 현남의 친구는 비슷하다. 그런 점에서 현남의 친구가 노숙자를 제압하고 경찰서로 보내는 장면은 동족상잔의 비극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야 한다. 그러나 ‘개’라는 생명을 담보로 한 장면에서 어느새 고윤주와 스스로를 동일시하게 된 관객에게는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는 장면으로 바뀐다. 

노숙자 최 씨를 제압하는 문구점 주인


 아파트 개들의 연이은 실종사건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노숙자가 죄를 뒤집어쓰고 경찰에 잡혀가면서 일단락된다. 잡혀가면서 노숙자의 한쪽 신발이 벗겨진다. 고윤주의 한쪽 신발 역시 벗겨지는 때가 있다. 현남과 달리기를 하며 자신이 범인임을 은연중에 전달할 때다. 현남은 고윤주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는 표정을 짓는데, 고윤주가 범인인 것을 알아차려서가 아니라, 고윤주가 신발이 벗겨진 채 달리기를 하고 있었던데 놀라기 때문이다. 현남은 술에 취한 고윤주 대신, 신발을 찾아와 준다. 죄를 물어야 할 인물에게 호의를 베풀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끌려가다가 신발이 벗겨진 노숙자 최 씨
고윤주의 구두를 찾아 건네는 박현남


 겉보기에 의심스럽고, 위협적이고, 뭔가 부족해 보이는 인물들이 ‘짖는 개’라면 겉보기엔 고상하고 단정해 보이는 고윤주는 ‘짖지 않는 개’다. 극 중 의심을 받고, 죄를 뒤집어쓰는 이들은 단지 무서워 보이고 유해해 보이는 인물이며 실제로는 무해하다. 한편 가장 정상적으로 보이는 고윤주가 실질적으로는 가장 위험한 인물이다. 


 가장 큰 벌을 받아야 할 고윤주와 가장 큰 보상을 받아야 할 현남은 정반대의 결말을 맞는다. 개를 살해한 고윤주는 그 혐의에도 오르지 않고, 결국 아내의 퇴직금으로 부정하게 교수 자리에 오른다. 한편 현남은 그토록 원하던 텔레비전에 나오지도 못하고, 일자리를 잃는다. 또한 그녀가 잡은 노숙자 역시 진범이 아니다. 그러고서 그녀가 받은 가장 확실한 보상이라고는 무말랭이가 전부다. 그리고 모든 사건 후에 친구와 가는 ‘좋은 데’는 동네 야산이다. 


 앤딩 장면에서 교수가 된 고윤주는 강의실 밖 야산을 멍하니 바라본다. 그러다 시각자료가 준비되었다고 말하자 커튼을 치라고 지시하고, 카메라는 커튼이 쳐지는 장면을 꽤 자세히 보여준다. 고윤주의 얼굴엔 그늘이 생기고 강의실은 어두워진다. 그리고 그가 바라보던 야산과 비슷한 배경으로 화면이 전환된다. 현남과 친구가 방문한 야산이다. 


 고윤주가 커튼을 치는 것은 그가 앞으로 역시, 지금처럼 비겁하고 의뭉스럽게 살아갈 것임을 암시한다. 그는 계속해서 나쁜 짓을 하면서도, 의뭉스럽게 행동하며 들키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진실을 외면할 것이다. 영화는 잘못한 사람이 벌을 받지 않는 것만을 다루지는 않는다. 진짜 잘못한 사람을 분간하지 못하고 오히려 지지해주게 되는 것을 풍자한다. 그러면서 영화는 영리하게 보는 이를 조롱하고 영화를 넘어 실제 세상의 이야기로 저변을 확장한다. 

강의실 커튼을 치라고 지시하는 고윤주


 경비원이 언급한 보일러 김 씨는 문제를 해결하고 아파트 시공사의 내부 비리를 말하는 과정에서 돈을 받아먹은 사람들과 실랑이를 하다 억울하게 죽은 인물이다. 그 죽음은 알려지지 못하고 시체는 아파트 지하실 벽 속에 묻혀있다. 도시괴담으로 떠도는 이야기는 밝혀내야 할 진실이 아니라 가십거리로 전락한다. 이 가운데 피해자인 보일러 김 씨는 귀신, 원혼, 무서운 존재로 남는다. 진짜 문제를 추궁해야 할 사람들은 무서운 이야기만 소비하며 시시덕 거린다.  


 이처럼 영화는 주제의식이 분명하면서도 여러 에피소드와 장면을 통해 관객을 시험한다. 크레디트로 이어지는 장면도 예외는 아니다. 현남과 친구가 야산을 오르며 흐르는 억지스러운 재즈풍의 즐거운 음악을 통해 ‘그럭저럭 괜찮은 결말 인가?’ 라며 관객을 헷갈리게 한다. 크레디트가 거의 다 올라간 지점에서 관객을 도발하는 장면이 나온다. 등산을 하던 두 사람이 돌아서 카메라를 응시한다. 관객을 바라보며 현남은 전리품으로 가지고 다니는 자동차 사이드미러로 햇빛을 반사시켜 카메라를 비춘다. 카메라 시선은 곧 관객의 눈이다. 현남과 문구점 여자를 일방적으로 지켜만 보다가 이들의 시선을 마주친 관객은 당황한다. 게다가 이들은 거울에 빛을 반사해 눈까지 부시게 한다. 명백한 도발이다. 

<플란다스의 개> 앤딩 크레디트 장면 중


 극 중 인물인 현남이 관객에게 말을 거는 순간 관객은 속았다는 기분이 든다. 관객이 볼 때 현남은 가장 큰 공을 세웠음에도 많은 피해를 본 동정하게 되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극 안에 머물지 않고, 관객을 마주할 때 관객은 당황하고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크레디트 마지막 장면은 가장 속고 있었던 인물은 극 중에 있던 것이 아니라 객석에 있는 관객이라는 메시지다. 


 미디어와 정치권의 말에 이끌려 구성원들이 사안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비웃음이다. 분노해야 하는지 웃어야 되는지 모를 상황을 영화 내내 촘촘히 병치한 것은 비단 영화적 재미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어지러이 널려있는 사건들과 무수한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사안을 제대로 볼 수 있느냐에 대한 시험이다. 너무 쉽지만 틀리게 되는 문제. 무해한 ‘짖는 개’와 이빨을 숨긴 ‘조용한 개’를 구분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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