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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nd Jul 31. 2020

관음과 관심 사이 (이창)

영화 속 '생각' 돋보기

 모든 사람은 관음증 환자 아니면 노출증 환자다. 히치콕 감독의 이 말에서 ‘환자’라는 말이 주는 느낌이 불쾌하면서도, 완전히 부정하기는 힘들다. 그가 단지 왜곡된 성적 욕구 해소 방식으로서 관음증을 말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사람의 행동과 인지에 관한 거대한 은유와 성찰로서의 관음증에 가깝다. 


 1953년 개봉한 히치콕 감독의 <이창>은 ‘관음증’을 소재로 한다. 건너편 아파트를 엿보는 제프의 시선은 스크린을 통해 영화를 보는 관객의 시선과 닮아있다. 한 집 한 집을 엿보는 제프의 시선은 확실히 제한적인데, 이는 모든 상황은 완벽히 객관적인 시점이 아닌, 각자의 일인칭 시점에 갇힐 수밖에 없다는 본질적 한계를 말한다. 각자 제한된 시점에서 불완전하게 상황을 인지하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인식의 한계를 다룬다. 영화는 관객에게 강요하지 않고, 영화 자체의 형식을 통해 뿌리 깊이 박혀 있는 관음증적 본질 ‘발견’하게 한다.

쌍안경을 이용해 엿보는 제프


 2시간에 달하는 상영시간 내내 영화는 한 공간에 머물러 있다. 다리를 다쳐 거동이 불편한 제프의 방이다. 이곳에서 제프는 건너편 아파트 사람들을 엿보며 무료함을 달랜다. 카메라는 제프의 표정과 제프가 바라보는 건너편 아파트를 보여줄 뿐 어떤 다른 단서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다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아니, 살인사건으로 의심될만한 ‘정황’이 포착된다. 구체적인 근거는 없다. 쌍안경과 망원렌즈를 동원해 며칠간 이어진 엿보기와 끊임없이 그 사건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 만들어낸 조악한 추리가 전부다. 


 관객은 영화에 갇혀 철저하게 카메라가 보여주는 시선, 즉 제프의 시선을 공유한다. 제프의 방은 관객의 공간이며 제프의 시선은 곧 관객의 시선이다. 제프의 관음증 욕망은 곧 관객의 욕망을 대변한다. 때문에 관객은 제프의 시선이 지극히 제한적인 것을 알면서도, 흥미롭게 영화를 따라가고, 제프의 추측에 동조하게 된다. 그러다 제프의 시선을 빌려 관음 하던 관객에게 시선이 더해지는데, 이때부터 히치콕 영화 특유의 호흡이 긴 서스펜스가 영화의 결말부까지 이어진다.   

리사와 함께 추측하는 제프


 관객은 대부분 건너편 아파트를 관음 하는 제프의 시선에 갇혀 있다. 동시에 관객은 엿본다. 제프가 건너편 아파트에 사는 외판원이 아내를 살해했다고 단정하는 것도 보지만, 살인사건을 제보한 형사인 친구에게 ‘근거 없는 판단’이라고 면박당하는 모습도 본다. 다른 정황이 발견됨에 따라 제프가 동요하는 모습도 보게 된다. 여자 친구와 키스를 나누며 가십거리에 대해 말하듯 살인사건에 대해 추리를 더하는 제프를 본다. 그럴듯하면서도 진지한 제프를 보는 시선과 불명확하고 가벼운 제프에 대한 관객의 시선은 서로 모순되며 충돌한다. 상충하는 시선을 모두 지닌 관객은 살인 사건이 제프의 망상인지 실제인지 헷갈리기 시작하며 영화의 결말까지 긴박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형사인 도일과 리사와 대화하는 제프


 영화는 겉으론 ‘살인사건의 진실’이라는 실체를 다루고 있지만 그 이면에 인간의 관음증적 욕망과 그 속성에 대해 말한다. 


 타인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가진 인간은 타인과 세상을 관찰한다. 처음에 그 시선의 방향은 횡적, 그리고 표면적이다. 그러한 시선은 영화에서 제프의 시선을 따라 건너편 아파트를 옆으로 혹은 위아래로 훑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시선은 일종의 ‘탐색’에 불과하며 무심하게 풍경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다가 관심이 가는 대상에 시선이 멈춘다. 그 방향은 겉을 훑는 것에서 벗어나 종적이며, 대상의 내면을 향하기 시작한다. 제프가 ‘미스 고독’을 안쓰럽게 여기는 시선이나, 죽은 강아지를 측은하게 여기는 시선, 신혼부부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눈길이 그렇다. 또한 영화의 주요 사건인 외판원이 부인을 살해한 것을 잡아내는 시선 역시 대상에 대한 무의미한 겉핡기가 아닌, 대상을 깊이 바라본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서도 과연 엿보기가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한 의문과 도덕적 성찰이 나타난다. 동시에 관음증을 대하는 감독의 생각도 알 수 있다.  


“사람을 훔쳐보는 게 윤리적인지 모르겠어.”


 형사 친구인 톰이 살인 사건이 아니라고 선언하자, 제프는 낙담하며 애인인 리사에게 말한다. 그 말에 리사는 블라인드를 내리고 제프를 위로하려 한다. ‘관음증적 욕망과 행위가 옳은 것일까?’하는 윤리적 질문이 제프에게 처음으로 나타난다. 자신을 돌보는 간호사가 타이르듯 말했을 때에도 농담을 건네며 넘기던 제프에게 뒤늦게 의문이 든 까닭은 본질적 잘못이 아니라, 바로 관음에서 비롯한 자신의 추측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서다.   


 그때, 아파트에 비명이 울려 퍼진다. 동네에 개가 죽어 그 주인이 소리를 지른 것이다. 


“잠깐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톰의 말에 설득당할 뻔했어.”


제프는 개의 주인인 여자의 비명에 유일하게 밖을 살피지 않은 외판원의 불 꺼진 집을 살피고서는 리사에게 말한다.

이웃 여자의 비명에 반응하는 이웃집들과 불 꺼진 외판원의 집


 개가 죽은 소동에 모든 주민이 밖을 내다보는 와중에, 외판원의 집은 불이 꺼져있고 어둠 속에서 담뱃불이 깜빡인다. 이에 제프는 외판원이 개를 죽였다고 확신하고, 외판원이 아내를 살해한 것과 관련 있다고 생각한다. 화단을 기웃거리며 킁킁대던 개를 쫒아버리던 외판원의 모습을 기억하고는, 제프는 화단에 살인과 관련한 증거가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리사가 간호사가 화단을 파보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뒤이어 리사가 외판원의 집에서 증거를 찾는다. ‘결혼반지’다. 외판원의 부인이 결혼반지를 놓고 긴 여행길에 오르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제프의 전화를 받고 도일은 경찰과 함께 출동하고 결국 제프의 방에서 몸싸움을 벌이던 외판원을 체포한다.


 영화는 관객이 외판원이 범인이라는 것을 쉽게 확신하게 두지 않고, 도리어 다수의 관음 대상을 제공하면서 끝까지 서스펜스를 놓지 않는다. 이는 영화를 흥미롭게 볼 수 있도록 하는 장치일 뿐 아니라, 인간이 지니는 인식의 범위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인식의 한계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없고 남을 엿보고, 추측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속성 그 자체이며, 정도는 다르지만 항상 그 속성을 전제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영화를 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때문에 관음증적 시선을 갖는 것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관음의 의도와 결과가 어떠한가에 따라 좋고 나쁨을 가를 수 있다. 영화에서 제프가 엿보는 것에 대해 윤리적으로 성찰하는 대목이 관음이 시작하고 나서 한 참 후에야 등장한 것. 또 그것이 ‘엿보는 것’ 자체에 대한 반성이 아닌, 자신의 추측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우려에서 비롯된 것에서 관음증 자체가 아니라 의도와 결과에 따라 윤리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살인 사건의 전모를 파헤치려는 제프의 의도는 선했다. 외판원과 개인적인 원한이 있어 모함하려는 것이 아니라, 외판원과 아내가 다투고 아내가 보이지 않은 것을 보고 ‘염려’하는 마음에서 흘려보던 횡적인 시선이 깊이 있는 종적 시선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상함을 느낀 제프가 건너편에 사는 외판원을 엿본다


 관음증 환자에 가까웠던 히치콕은 이를 통해 항변하는 듯하다. 관음증은 가치중립적인 속성일 뿐, 이를 사용하는 의도와 그 결과에 따라 좋거나 나쁘다고 할 수 있다. 제프가 ‘엿보는’ 행동을 반성하는 지점은 자신의 추리가 틀렸을 때며, 엿보는 행위 자체에 대한 본질적인 반성은 보이지 않는다.  


 관음증이라는 히치콕의 테마를 가장 직접적으로 다룬 이 작품에서 감독은 예술의 당위성과 명분을 피력하는 듯하다. 사람과 이야기를 끊임없이 엿보는 감독의 변명으로 보이기도 한다.  결국 세상의 떠도는 이야기를 엿보고, 또 엿보게 해주는 예술은 단지 관음증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의도를 품은 ‘관심’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은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타난다. 

극 중 유일하게 카메라가 비추는 장면에서 살인 사건이라는 주요 이야기가 전개되는 장면 


 호사가와 오지랖 넓은 사람의 속성 자체가 밉상은 아니다. 주변에 관심을 가지고 이웃을 살피고 가능한 도움을 주려는 선한 의도인 관심이 아니라, 단지 재미를 위한다거나, 나쁜 의도를 품고 좋지 않은 영향을 퍼뜨릴 때 밉상이 된다. 그런 맥락에서 영화 <이창>은 단순히 타인을 엿보고 자극을 즐기는 변태적 욕망으로서의 관음을 경계한다. 또한 선한 의도로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예술의 기능, 인간의 시선이 가진 긍정적인 가능성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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