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 존스에서 살아남기>
학교의 수업은 항상 세미나로 시작한다. 세미나는 세인트 존스에서 가장 유명한 수업으로 20명 이내의 학생들이 2명의 튜터라고 불리는 교수님들과 함께 동그란 책상에 앉아서 2시간 동안 토론을 하는 수업이다. 저녁 먹은 뒤에 밤 7시 반에 학교의 종이 치면 모든 학생들과 교수님들은 각자의 반에 들어가서 9시 반까지 열띤 토론을 한다. 수업은 교수님들 중 한 분이 "opening question"이라고 하는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된다. 그렇게, 첫 세미나와 함께 세인트 존스의 모든 수업이 시작된다.
1학년 첫 학기의 수업은 책 일리아드와 함께 하는데, 그리스 작가인 호메로스가 쓴 책으로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 정말 중요한 책 중에 하나다. 우리가 흔히 아는 트로이 전쟁에 대한 내용인데 트로이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그 반대편인 그리스인들의 진영에서 이 책은 시작한다. 헬레나의 남편인 메넬라오스의 형제인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의 갈등에서 이 책은 시작한다. 원래 전쟁에 별로 참여하고 싶지 않아 했던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친구인 파트로클로스의 죽음 등 여러 상황들을 겪어 나가면서 계속된 분노로 트로이와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전쟁에 참여하게 되면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신탁에도 불구하고. 결국 트로이 왕자인 헥토르를 죽이게 되고 아킬레우스는 친구의 복수를 한다. 그러나 자신의 아들인 헥토르의 시신을 찾으러 온 왕인 프리아모스와 화해를 하고 시신을 돌려주며 이 책은 끝이 난다.
이 책은 정말 길다. 한국어로 읽어도 벽돌책 2권이나 된다. 물론, 학교에서도 부분으로 나눠서 읽는다. 어쨌든 책을 읽을 때 정말 재밌었다. 그러나 전부 영어로 읽어야 한다는 것과 지금은 쓰지 않는 여러 가지 영어 단어들 시적인 표현등이라는 점에서 읽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읽는 것 자체가 오래 걸리기도 했고 힘들었어서 수업에 대한 걱정은 많이 하지 않은 채 수업에 들어갔다. 물론 미국인 친구들과 같이 수업을 한다는 점 그리고 새로운 환경이라는 점에서는 너무나 긴장을 했다.
서로 자기의 소개를 하고 한 교수님께서 질문을 던지셨다.
"아킬레우스는 왜 분노했을까?"
정말 생각하지도 못했던 질문이었다. 지금이라면 왜 그런 질문을 던졌는지 어느 정도 맥락이 파악되지만 그때 신입생이었던 나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인 질문이었다. 나는 왜 감정이 중요한 걸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정말 나는 그때 책의 내용이나 책 자체에 집중하지 못했다. 첫 수업에 오면 나뿐만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생소한 수업에 적응하느라 바쁘다. 나도 수업 방식에 대해서 많이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정작 제대로 영어로 경험한 것은 처음이어서 모든 것이 새로웠다. 그리고 수업에서 제일 중요한 "말하기"에 대해서 그냥 입을 열고 말을 하면 될 줄 알았다. 또, 나름 열심히 읽어갔다고 생각했던 나는 이상한 자부심에 차 있었다.
그런데...
정말 말이 하나도 들리 않았다. 당연히 모든 말은 영어로 진행되었고 내용은 너무나 어려운 철학, 문학이었다. 신입생들이 주로 하듯 친구들은 자신의 지식을 뽐내고자 어려운 단어와 긴 문장을 사용했다. 그 속에서 나는 정말 패닉 한 체로 멍하니 있었다. 단어, 단어만 간간히 알아들었다. 이런 상황에 말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뭐에 대해서 얘기하는지도 모른 체 얘기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다행히도 다른 한 친구가 말한 것에 대해서 뭔가가 떠올라서 내가 생각한 것을 그냥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이제는 입을 떼려고 할 말을 생각했지만 도저히 영어로 뭐라고 해야 할지 생각이 제대로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이미 내가 얘기하고 싶은 주제는 더 이상 친구들과 교수들의 관심사가 아니었고 나는 다시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입을 닫게 되었다. 또다시 단어 단어만 듣기를 반복하고 있을 때, 다시 겨우 몇 마디 주워듣고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 떠올랐고 이 번에는 겨우 말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모든 미국인 친구들의 눈이 나에게 향했다. 그저 들으려고 했는 것임에도 정말 부끄러워졌다. 내 생각을 말했을 뿐인데 뭔가 사람들 앞에서 벌겨벗겨진 기분이 들었다. 정말 부끄러웠다. 내가 한 질문이 뭔가 친구들이 얘기하고 있는 것과 다른 주제의 말이었는지 아니면 관심이 없었던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내 영어가 이상했는지 아이들은 내 얘기에 별 반응을 하지 않을 체 다시 각자가 관심 있는 다른 얘기로 수업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2시간의 첫 수업이 끝이 났다. 정말이지 고난의 연속이었다.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 하고, 부끄러움에 가득 찬 수업이었다. 그럼에도 난 내가 꿈꿔 왔던 수업을 한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다독였던 것 같다.
정말 그랬다. 그전까지의 나는 듣는 것은 그 무엇보다 쉬운 것이고, 말을 한다는 것은 그냥 입을 움직이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두 가지는 우리의 일상에 항상 함께 하던 것들이라서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특히 말하기는 친구들과 말을 할 때, 가족과 말을 할 때, 그리고 사람들을 만날 때 항상 하던 행동이라서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영어라서 이게 더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말로 전한다는 것은 때로는 내가 가장 자신이 없고 취약한 부분까지 보여줘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 했다. 남들에게 말을 하지만 내 생각을 말하면서 나 자신을 바라봐야 하는 기분을 처음 느꼈다. 그리고 그 말을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부드럽게 설득을 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라는 것은 세인트 존스에 와서 내가 제일 처음 배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