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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Nov 16.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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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완성된 나의 음악

intro 이렇게 완성된 나의 음악


세상엔 하지 말라는 걸 굳이 하는 사람이 있다. 보통 위인이 되거나 탕아가 된다. 나는 위인도 탕아도 아닌 여행자가 됐다. 어렵게 들어간 신문사를 관둔, 2014년 10월의 일이다. 열심히 공부해 대학에 가고, 또 열심히 노력해 취업을 하고, 다시 열심히 버티며 직장 생활을 하고…. 문득 의문 하나가 떠올랐다. ‘이 모든 게 누굴 위한 거지?’ 결국 일을 저질렀다. 28년을 모범적으로 살다가 갑자기 좋다는 직장을 관두고 지구 반대편 유럽으로 갔다. 초보 신문 기자는 어느 날 그렇게 여행자가 됐다.


유럽에 가기 전 나는 지인들로부터 ‘제도권의 사생아’로 규정됐던 바 있다. 제도권을 아버지 삼아 누구 못지않게 잘 따르며 살아왔지만, 어쩐지 이분은 내 아버지가 아니라는 생각에 늘 괴롭고 힘들었다. 그럴 깜냥도 안 되면서 늘 히피와 예술가를 동경했다. 세상을 떠도는 사람들, 동양의 한 점을 벗어나 세계를 벗 삼는 이들이 부러웠다. 쉽게 말해 세상 말 잘 듣고 나름 열심히 살면서도 지랄병이 끊이지 않았다는 뜻.


결국 그래서 사고를 친 것 같다. 28세에 이르러서야 제도권을 박차고 나가고 싶은 욕망이 임계점에 도달한 것은… 축복일까. 적어도 지금으로선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란 생각이다. 이런 세상이 있었구나.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구나. 제도권하의 모범생 바운더리를 깨고 나가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은 컸다. 상대적으로 남루한 행색의 동세대 외국인과의 조우도 인상적이었다. 나의 세상이 어느덧 한 뼘 더 넓어진 기분이다. 대학생 때였다면 느낄 수 없었을 감정도 살뜰하게 챙겨온 것 같다.


런던에서 동행했던 한 친구는 아일랜드에 온 지 8개월째였다. 영어도 공부하고, 여행도 다녔다고 한다. 외국에 나와 언제가 가장 기억에 남느냐는 질문에 그 친구는 “지금”이라고 답했다. 인상적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비슷한 종류의 질문에 항상 “대학 시절에…” “예전에 말이야…” 등의 대답을 달고 살았는데…. 과거 지향도 아니고, 미래 지향도 아니었던 어정쩡한 삶.


그래서 나처럼 제도권에 갑갑하게 몸을 끼운 채 살아온 이들에게 ‘퇴사 여행 예찬론’을 펴고 싶다. 회사를 다니는 일이, 또 한국에서 많은 이들이 집중하는 일이 끝끝내 잡히지 않을 미래와 결국엔 남인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동시에 겨냥하는 성격의 것이라면, 퇴사와 그에 잇따른 여행은 지금 이 순간과 나 자신에게 몰두한 채 지내볼 수 있는 선택인 것 같다.


여행하는 동안 많이 보고, 많이 느꼈으면 했다. 부족하다고 느꼈던 부분을 채우는 시간이길 소망했다. 한 뼘 더 자라고 한층 더 성숙해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다. 무엇보다 인생에서 지워지지 않은 진한 한때로 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취직한 이후부터 퇴사하기 전까지의 나날들을 떠올리면 그야말로 희뿌연 모습이었다. 먼 훗날 돌아보면 전혀 기억나지 않을 것만 같은 잿빛 시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반짝이는 생의 순간을 다시금 힘껏 호명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순간들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었다. 여행하는 동안 끊임없이 기록을 이어간 까닭은 그 때문이다. 12개국 30여개 도시를 80일간 떠도는 동안 카메라와 수첩을 부지런히 놀렸고, 매일 밤 잠들기 전 기록을 정리했다. 짧게나마 기자로 보낸 날들의 습관 때문일까. 어쩐지 여행기라기보다는 어설픈 취재를 해온 것 같긴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취재 말이다.


“봄의 노래에 대해선 생각지 말라. 너에겐 너의 음악이 있다.” 영국 시인 존 키츠(John Keats)의 시 ‘가을에(To autumn)’의 한 구절이다. 기자 시절 알게 된 이 시구를 여행 내내 생각했다. ‘너에겐 너의 음악이’란 책 제목을 붙이고 나니 여행이 정말로 끝난 기분이다. 이렇게 완성된 나의 음악. 이 부족한 글과 사진이 ‘유럽을 여행하는’ 사람을 위한, 또 ‘젊은 퇴사자’를 위한, 무엇보다 자신의 음악을 만들어 가려는 이를 위한 작은 안내서가 될 수 있기를.


2014년 가을 시작한 여행을 마치며

2015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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