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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Nov 17. 2015

01 ‘선생’의 흔적들 앞에서

영국 런던

01 

‘선생’의 흔적들 앞에서

영국 런던


런던의 지하철역엔 ‘Underground(언더그라운드)’란 표시가 붙어있다. 흔히 지하철을 가리키는 영어단어로 ‘Subway(서브웨이)’를 떠올리기 쉽지만, 영국에서 이는 지하도를 가리키는 단어다. 런던 지하철은 언더그라운드라는 이름 외에도 ‘Tube(튜브)’란 애칭으로도 불린다. 지하철 모양이 튜브를 닮아서다. 런던에선 왜 유난스럽게 이런 특이한 표현을 사용하는 걸까.


사실 이런 의문은 영국 입장에선 억울할 수도 있다. 런던은 세계 최초로 지하철을 도입한 도시다. 1863년 1월 9일 첫 열차가 패딩턴에서 패링턴 스트리트까지 6.4km를 달린 이후 지금까지 런던 곳곳을 거미줄처럼 이어왔다. 2013년에 150주년을 맞았고, 2014년 올해로 151주년에 이른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지하철을 도입한 영국 사람들로서는 땅 속을 달리는 이 기차의 이름을 지어줄 의무가 있었을 터. 그리고 아마 그들이 택한 단어는 언더그라운드였을 테다. 후발주자인 다른 나라들이 서브웨이니 ‘Metro(메트로)’니 하는 다른 이름을 붙였어도 원조가 이름을 바꾸기란 뭔가 이상했겠지. 영국은 불과 한 세기 전만 해도 산업혁명을 시작으로 근대로 진입하는 인류를 힘차게 견인하던 세계 최강대국이었다. 그들의 다양한 유난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오전 8시 30분. 빅토리아 라인 핌리코 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세계 최초의 지하철답게 크기가 아주 아담했고, 출근시간이었던 만큼 그 아담한 공간은 당장이라도 터져나갈 듯 사람들로 빽빽했다. 런던의 출근길 풍경은 서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들 바빠 보였고, 빠르게 걸었다. 지하철역이 서울의 그것보다 훨씬 규모가 작고 통로도 좁아 오히려 서울보다 더 복잡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지하철 탑승을 앞둔 사람들은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문이 닫히는 지하철에 가방을 밀어 넣거나,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찬 지하철을 타보겠다며 몸을 내던지며 육탄공격을 하는 이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지하철이 떠난 뒤 나는 조금 감격했다. ‘영국은 신사의 나라라더니, 과연….’이라는 생각을 하던 순간, 갑자기 새 지하철이 큰 소리를 내며 역으로 들어왔다.


그때 깨달았다. 이들은 신사라서 차분한 게 아니라 조급해할 필요 자체가 없다는 것을. 안내 전광판을 보니 거의 1분 간격으로 새로운 지하철이 역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 생각해보니 런던 여행 5일차인 지금까지 지하철을 타면서 단 한 번도 오래 기다린 적이 없었다. 역으로 내려가 안전선 앞에 서면 언제나 거의 곧 지하철이 도착했다. ‘의식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의식을 탓하기 전에 환경부터 살펴봐야 한다.’ 전혀 조급해하지 않는 지하철역 속 영국 사람들을 보며 떠올린 생각이다.




런던 언더그라운드에서 발견한 광고. 처음엔 상업광고인가 싶었는데, 좌측 하단에 ‘MAYOR OF LONDON(런던 시장)’이라고 적혀있는 것을 볼 때 공익광고인 듯하다. ‘STAY COOL WITH A BOTTLE OF WATER’란 문장이 언더그라운드에 타고 있는 런던 사람들과 잘 어울려 보였다.




런던 지하철을 놓기 위해 영국 사람들은 약 150년 전 땅을 아주 깊이 팠다. 지금도 지하철을 타려면 지하로 2층, 심하면 3층까지 내려가야 하는 이유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흐르고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지하철과 지하철역을 보수할 필요가 생기자 문제가 생겼다. 마치 구멍이 뻥뻥 뚫린 치즈처럼 생긴 석회암으로 이뤄진 런던의 땅, 더군다나 곳곳이 깊이 파인 이 땅에선 대규모 보수공사가 불가능했던 것. 자칫 잘못했다간 붕괴의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런던 시내는 매일 공사판이다. 이번엔 여기를 조금 보수공사하고, 다음엔 저기를 조금 보수공사하고. 그 과정이 끝없이 이어진단다. 과연 버스를 타고 달리는 런던의 땅 위는 곳곳이 공사판이었다.


런던에 지하철이 놓이자 큰 충격과 자극을 받은 도시가 있었다. 바로 영국의 라이벌인 프랑스의 수도 파리다. 이후 파리엔 급하게 지하철이 놓였다. 지하철 다닐 통로를 팔 시간을 기다릴 수 없었던 그들은 하수도를 지하철이 다니는 통로로 활용했다. 그래서 파리의 지하철역은 얕은 곳에 있어 보통 지하로 1층 정도 내려가면 된다고 한다. 영국 지하철역과의 차이는 바로 ‘악취’. 애초에 태생이 하수도였던 한계겠다.


런던 전역을 거미줄처럼 잇고 있는 런던 지하철 노선도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기분이 묘해진다. 총 15개의 라인 중 10개의 라인이 약 100년 전부터 달렸다고 한다. 산업혁명을 통한 신기술을 바탕으로 대영제국이 최절정기에 달했던 1863년, 지하철이 처음 놓인 그때 그 제국의 수도가 바로 내가 서 있는 런던이었다. 비록 지금은 미국과 중국에 밀려 쇠락해가는 나라지만… 빨간 동그라미를 관통하는 파란 막대에 적힌 ‘Underground’란 글씨를 볼 때마다 증기기관차가 곳곳에서 연기를 뿜고 구석구석 활기가 넘쳤을 제국의 풍경이 환영처럼 아른거리곤 했다.




런던 곳곳엔 인류가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혀 나가던 시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대표적 사례가 1886년에 착공을 시작하여 1894년에 완성한 타워브리지다. 런던 시내를 흐르는 템스강 위에 도개교(跳開橋)와 현수교(懸垂橋)를 결합한 구조로 지은 다리인데, 이런 모양이 된 까닭은 다름 아닌 증기선 때문이다. 대형선박이였던 증기선이 지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중앙 60m 부분을 도개교로 만들었다고 한다. 단순 관광지로 보이는 이 다리가 실은 산업혁명의 흔적이다. 완공된 첫 달에만 655번이나 다리를 들어 올렸고, 2~3년 전만해도 연 6000여 회, 하루 20여 회가량 가동됐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효용가치가 떨어지면서 지금은 고작해야 하루 1회, 연 200회 정도 가동된다고 한다. 다리를 세로로 가로지르는 증기선은 자취를 감춘 반면, 다리 위를 달리는 자동차는 늘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타워브리지의 낮과 밤.




템스강 동남쪽에 위치한 한적한 마을 그리니치는 보이지 않는 시간에 가닿으려는 인류의 몸부림이 깃든 동네다. 이곳엔 1675년 찰스 2세 때 만들어진 천문대가 있다. 경도와 위도가 파악되고, 세계 각국의 시차와 시차를 가늠하는 기준 시간이 태어난 곳이다. 바다를 따라 동서남북으로 뻗어나가던 배를 통솔하고 전 세계에 포진한 식민지를 다스려야 했던 영국으로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의 정체를 속속들이 파악하는 일이 지상과제였다. 시간을 정복하려는 영국인들의 노고는 오늘날 그리니치 천문대 앞마당에 본초자오선(本初子午線·경도 0°)이란 이름으로 새겨져 있다. 그들이 파악해 나간 위도와 경도가 GPS와 내비게이션, 구글맵스 등으로 계승된 풍경은 경이롭다. 내가 선 땅의 위치와 시간을 파악하는 행동 속엔, 수백 년 전 영국인들의 흔적이 묻어있는 셈이다.




GMT(Greenwich Mean Time·그리니치 평균시)를 가리키는 시계. 12시간 기준이 아니라 24시간 기준이다.


내가 양발 사이에 두고 있는 것은 시간이 시작되고 끝나는 본초자오선. 지구 경도의 원점이기도 한 바로 그 선이다.




런던 블룸즈버리에 자리 잡은 영국박물관은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 러시아의 에르미타주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힌다. 미술사적으로 가치 있는 작품뿐 아니라 인간의 역사와 문화에 관련된, 인류학적 유물들을 함께 전시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별한 전시회를 제외하곤 무료로 입장 가능하다. 문화와 유물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과학자 한스 슬론의 컬렉션이 전시품의 시초. 국가에 기증할 당시 7만 1000여 점이었던 슬론의 컬렉션은 4만여 점의 도서, 7000여 점의 문서, 방대한 자연사 표본, 이집트 유물, 그리스 로마 유물, 고대 근동, 극동 유물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선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 그리고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과 관련한 전시품을 살펴봤다.


내세를 지향한 이집트인과 현세에 집중한 메소포타미아인. 삶에 대한 태도는 극명하게 엇갈렸다. 그러나 평화로운 나날 속에서 삶이 끝난다는 사실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이집트인이 만들었던 미라도, 끝없는 침략과 전쟁 속에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금의 삶을 소중히 여긴 메소포타미아인의 조각도… 모두가 결국엔 하나의 풍경으로 느껴졌다. “삶은 견딜 수 없이 절망적이고 무의미하다는 현실의 운명과, 이 무의미한 삶을 무의미한 채로 방치할 수 없는 생명의 운명이 원고지 위에서 마주 부딪치고 있습니다. 말은 현실이 아니라는 절망의 힘으로 다시 그 절망과 싸워나가야 하는 것이 아마도 말의 운명이지요. 그래서 삶은, 말을 배반한 삶으로부터 가출하는 수많은 부랑아들을 길러내는 것인지요.” (소설가 김훈의 ‘칼의 노래’ 동인문학상 수상 소감 중) 이집트인과 메소포타미아인이 남긴 흔적에 대한 느낌은 이 조각글로 갈음하고자 한다. 그들은 말 대신 미라를 만들고, 조각을 했을 터이다.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리거나 조각하기보다는 이상적(ideal)인 모습으로 표현했던 이집트인과 달리 메소포타미아인은 눈에 보이는 실존 그 자체를 중시했다. 메소포타미아인이 남긴 조각 속에선 인간의 종아리 근육이 선명하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지구 반 바퀴를 돌아와 ‘선생(先生)’의 흔적들 앞에 선 후인은 심경이 복잡했다. 먼저 살다간 이들이 남긴 것들을 보며 생각해 봤다. 이 무의미한 삶을 무의미한 채로 방치하지 않기 위해, 나는 살아가는 동안 무엇을 해야 할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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