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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Nov 18. 2015

02 쾌락의 도시에서 만난 고흐와 안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02

쾌락의 도시에서 만난 고흐와 안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암스테르담 숙소에 도착해 로비에서 여행 계획을 짜고 있는데 생전 처음 맡아보는 특이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약간 고약하기도 하고, 구수하기도 한 냄새. 오묘한 표정으로 그 냄새를 맡고 있는 내게 한국인 동행은 ‘마리화나 냄새’라고 일러줬다. 미국 유학 경험이 있다는 그 동행은 “오랜만에 맡아 본다”며 “여기가 암스테르담이 맞긴 맞나 보다”라고 했다.


과연 암스테르담은 그 명성에 걸맞은 모습이었다. 거리를 걸을 때마다 수시로 마리화나 냄새가 코끝에 당도했다. 트램 정류장에서도, 식당 앞에서도, 박물관을 나설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도시는 깨끗한 편이 아니었다. 길가엔 담배인지 마리화나인지 모를 것들을 피고 남은 꽁초가 여기저기 나뒹굴었고, 암스테르담 여기저기를 관통하는 운하의 색깔은 탁했다. 암스테르담 꽃시장을 거닐며 꽃을 구경하다가 뜬금없이 등장한 ‘매직머시룸(Magic Mushroom)’이란 이름의 가게에 놀라기도 했다. 담배나 마리화나 등을 파는 가게인데, 꽃향기 속에 파묻힌 채로도 마리화나 냄새는 뚜렷했다.


암스테르담 중앙역에서 약 200m 정도 떨어진 담락 거리 한복판엔 ‘섹스박물관(Sex museum)’이 있다. 성(性)과 관련된 온갖 모형과 사진, 춘화(春畵) 등을 가득 전시하고 있다. 홍등가를 재현해 놓은 곳도 있고 폰섹스를 체험할 수 있는 폰부스도 있다. 박물관을 둘러보는데 붉은색 머리의 한 서양 여성이 거대한 남성 성기 모형 옆에 서서 그쪽으로 혀를 내밀며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약간은 멍해진 기분으로 섹스박물관을 나서니 10살이 채 되지 않아 보이는 아이들이 박물관 문 앞을 감자튀김을 먹으며 지나가고 있었다.


밤이 되면 암스테르담 중앙역 동남쪽에 위치한 홍등가에 붉은 빛이 번쩍인다. 국가에 세금을 내고 합법적으로 운영되는 곳이다. 속옷만 걸친 서양 여성들이 붉은 빛 아래 서서 유리창 너머로 길거리를 오가는 남성들을 지그시 바라본다. 세계 각국의 남성들은 그 좁은 골목골목을 오가며 그 여성들을 구경한다. 때때로 몇몇 남성들이 유리창에 노크를 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여성은 문을 반쯤 열고 흥정을 시작했다. 흥정이 잘 마무리되면 남성은 유리창 너머로 입장했고 유리창은 커튼으로 가려졌다. 홍등가를 떠도는 마리화나 냄새는 다른 거리에서보다 더욱 강렬했다.




암스테르담 꽃시장에 위치한 ‘매직머시룸’ 내부 풍경


담락 거리 한복판에 자리 잡은 섹스박물관의 입구




현세의 쾌락에 이처럼 몰두하는 곳이 또 있을까, 싶은 이 도시엔 아이러니하게도 현세의 삶을 꾸려나가는 내내 고통에 몸부림쳐야 했던 두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다. 빈센트 반 고흐, 그리고 안네 프랑크다. 고흐 박물관과 안네의 집은 암스테르담을 대표하는 관광지 중 하나다. 이곳을 방문하려는 관광객들은 항상 차고 넘쳐서, 내가 갔을 때도 꽤 오랜 시간(고흐 박물관의 경우 약 20분, 안네의 집의 경우 약 1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고흐 박물관엔 작품보다도 드라마틱했던 그의 삶에 관한 내용이 잘 정리돼 있다. 자신만의 그림을 밀고 나가며 세상의 인정을, 돈을, 사랑과 우정을 바라고 또 바랐으나 결국 세상의 지독한 외면 속에서 권총자살로 세상을 떠난 그의 삶은 슬프다 못해 처참했다. 그는 한때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박물관엔 고흐가 ‘감자 먹는 사람들’ 등의 작품을 완성하고 나서는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는 내용도 있다. 그러나 거듭된 실패로 끝 모를 가난과 외로움, 절망과 슬픔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던 그는 죽기 얼마 전에 동생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난 화가로서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그것을 확신한다.” 박물관 벽에 새겨진 “I feel - a failure. he wrote”란 문장은 글자 그 자체로 서러웠다.


안네의 집에선 수시로 소름이 돋는다. “언젠가 이 무서운 전쟁은 끝이 나겠지. 우리가 단지 유대인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정받는 날이 반드시 올 거야(1944년 4월 11일).”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녀 생전에 그런 날은 오지 않았다. 집 곳곳엔 이처럼 ‘안네의 일기’의 몇몇 구절이 네덜란드어와 영어로 나란히 새겨져 있다. 안네의 집을 모두 살펴보고 나오는 출구 근처엔 안네의 일기장과 전 세계 각국에서 발간된 ‘안네의 일기’가 전시돼 있는데, 그곳 벽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너는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나의 가장 큰 소망은 저널리스트가 되는 거야. 그리고 그 이후엔 유명한 작가가 됐으면 해. 전쟁이 끝나면 나는 ‘The Secret Annex’라는 이름의 책을 펴내고 싶어(1944년 5월 11일).” 안네는 1945년 3월 베르겐-벨젠 수용소에서 발진티푸스로 사망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연합국에 항복하기 불과 2개월 전의 일이었다. 


고흐와 안네가 살아야 했던 삶을 구체적으로 떠올리는 일은 견딜 수 없이 슬프다. 삶 속으로 무자비하게 짓쳐들어오는 야만 속에서도 그들은 강렬한 꿈을 놓지 않고 품 안에 간직한 채 씩씩하게 걸어갔다. 하지만 그런 그들이 감당해야 했던 삶은 얼마나 참혹했나. 비록 그들이 죽은 오늘날 온 세상은 호들갑을 떨며 그들에게 사랑을 보내고 있지만, 생전에 그들은 볕 한 조각 마음껏 쬘 수 있는 처지도 못 됐다. 뒤늦게나마 고흐가 인정받고 안네가 생전 그녀의 바람처럼 유명한 작가가 된 것을 보면 ‘진심으로 꿈을 좇으면 언젠가는 이뤄지는 건가 보다’ 싶다가도, 그게 그들은 전혀 알 수 없는 그들 사후(死後)의 일이라면 고흐와 안네에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싶기도 했다.


암스테르담의 풍경은 그래서 한편으론 고흐와 안네의 삶을 추모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들이 누리지 못했던 삶의 쾌락은 도시 구석구석 흘러넘치고 있었다. 우리 생명 빛날 때 삶의 쾌락을 한껏 쫓자고 말하는 듯한 이 도시를 떠나기 전, 바람 부는 담락 거리에 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내세의 존재를 믿을 수 없는 무신론자로서 어쩐지 이 도시의 풍경과 냄새가 오래도록 생각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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