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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Nov 19. 2015

03 자전거, 혼탕 사우나, 공동묘지

독일 뮌스터

03

자전거, 혼탕 사우나, 공동묘지

독일 뮌스터


독일 서북부에 자리 잡은 뮌스터는 대학의 단과 건물이 도시 전체에 흩뿌려져 있어 ‘대학도시’로 이름이 높다. 하지만 실제로 도시에 도착했을 때 눈을 사로잡는 건 대학보단 자전거다. 수십, 수백 대의 자전거가 도시 곳곳을 누비고 다니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이곳은 대학도시 이전에 자전거도시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인구 약 30만 명의 도시에 자전거가 약 50만 대가 있다고 하니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수치다. 그래서일까. 도시 곳곳엔 자전거 바퀴에 바람을 넣을 수 있는 장치가 마련돼 있고 도로마다 자전거용 신호등이 따로 설치돼 있다. 자전거 도로를 엄격히 존중하는 것도 이 도시의 특징. 중앙역 지하엔 자전거 주차장이 따로 있을 정도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게 있다. 바로 사거리나 삼거리마다 자전거 탑승자의 손이 보내는 수신호다. 교차로에서 사람들은 팔을 뻗어 왼쪽 혹은 오른쪽을 가리키며 뒷사람에게 자신이 갈 방향을 알렸다. 검지와 중지를 함께, 또는 검지만, 혹은 손바닥을 내밀기도 했지만 전부 다 명쾌한 수신호였다. 4명이 나란히 달리다가 일제히 오른팔을 들어 수신호를 보내는 진풍경을 보기도 했다. “저런 건 학교에서 배우는 건가?” 내 질문에 뮌스터에서 공부 중인 친구가 고개를 갸웃하며 답했다. “아마 여기 사람들은 그럴 거야. 나는 와서 직접 보면서 어깨너머로 배웠지만.”




뮌스터 시내를 자전거로 달리고 있는 어린아이들의 모습




뮌스터엔 특이한 게 또 있다. 바로 사우나다. 물론 사우나는 우리나라에도 있다. 하지만 이곳의 사우나는 혼탕 사우나다. 수영복? 그런 거 없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탈의한 채 한 공간에서 씻고 물에 몸을 담그고 사우나를 한다. 친구가 미리 언질을 주지 않고 데려갔기에 처음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입장하자마자 나체의 중년 여성이 내 눈앞을 비현실적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당황하는 것도 잠시. ‘이것도 경험’이라고 마음을 가다듬고 옷을 벗었다. 프런트 데스크에서 빌린 가운(이동 시 걸쳐 입는 용도)을 허겁지겁 걸쳐 입었지만, 사우나실 앞에 이르자 이 가운도 별 수 없이 벗어야 했다.


예상과 달리 사우나실 안의 분위기는 전혀 음란하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벗고 있다고 해서 의식적으로 시선을 피하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다들 사우나실 안에서 증기(蒸氣)를 즐기는 데 집중했고, 증기를 타고 퍼지는 레몬향이나 허브향에 몰두했다. 가끔 시선이 마주치면 미소를 보내기도 했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노출에 더 둔감한 것도, 나이가 어리다고 더 예민한 것도 아니었다. 혼탕 사우나를 대하는 뮌스터 사람들의 태도는 모두 한결 같았다. 그들에게 이곳은 사우나를 하는 곳이지, 이성(異性)의 나체를 훔쳐보러 오는 곳이 아니었다.


친구는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가 이처럼 혼탕 사우나를 한다”라고 넌지시 일러주었다. “우리나라에 만약 이런 게 있다면 사람들이 올까?” 내 질문에 친구는 “남자들은 불순한 목적으로 올 수 있겠지만, 여자들은 절대 안 올 것 같다”라고 했다. 나도 같은 의견이었다. 혼탕 사우나실 속에 들어찬 약 30명의 사람들을 둘러보니 절반 이상이 여자였다. 조금은 익숙해졌던 기분이 다시금 어색해졌다.




‘혼탕 사우나’라는 문화 충격을 선사했던 ‘아이만 사우나(eymann sauna)’


친구와 함께 자전거를 빌려 타고 뮌스터 시내를 돌아보다가 중앙 공동묘지에 들렀던 기억은 마음 깊이 새겨져 있다. 보기 좋게 꾸며진 묘는 대부분 2대나 3대가 함께 묻힌 가족묘였고, 비석 앞엔 색색의 풀과 꽃이 아름답게 장식돼 있었다. 친구의 말에 따르면 이 공동묘지에 묘를 들이는데 드는 비용은 30년에 750유로라고 한다. 친구는 “이곳에서 공부를 하며 주말이면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곤 했는데, 이곳에 머무를 때 기분이 가장 편안해지고 좋았다”라고 했다. 주위 풍경을 둘러보며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묘지 한 구석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은 아이들을 함께 묻은 합장묘(合葬墓)도 있었다. 아이들의 이름이 적힌 목각 인형, 장난감 블록, 하트 모양의 돌 등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함께 적힌 생년월일과 사망일시를 보니 대부분 같은 날짜였다. 비석은 하나뿐이었고 거기엔 ‘태어나고 죽은 아이들의 무덤’이란 말과 함께 “하늘의 작은 별들이 얼마나 많이 떠있는지 알 수 있느냐? 그분께서는 너희를 알고 너희를 사랑하신단다”라고 독일어로 적혀 있었다. 끝을 헤아릴 수 없는 슬픔 속에서도 굳센 다정함이 새싹처럼 피어나는 풍경이었다.


공동묘지를 나서자마자 척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주택이 줄지어 선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친구는 “이곳은 공동묘지 바로 옆인데도 오히려 고급주택이 모여 있기로 유명한 곳”이라며 “죽음에 대한 이곳 사람들의 의식은 우리나라의 그것과는 많이 다른 것 같다”라고 했다. “여기 집값이 정말 비싸다”라는 친구의 말에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뮌스터 중앙 공동묘지의 모습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은 아이들을 함께 묻은 합장묘도 있다. 아이들의 합장묘엔 비석 대신 목각 인형, 장난감 블록, 하트 모양의 돌 등이 놓여 있다.




뮌스터의 낯선 풍경 앞에서 ‘사람은 사회적 동물’ 등의 명제가 머릿속에 두둥실 떠올랐다. 한국인으로 28년을 살아온 내게 그 풍경들은 생경했고, 더불어 부러운 기분을 들게 했다. 자전거 수신호는 품격 있어 보였고, 혼탕 사우나는 진솔해 보였으며, 공동묘지는 따뜻해 보였다.


문득 의식과 제도 중 무엇이 먼저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인과 다른 독일인의 의식이 이런 제도를 만든 걸까? 아니면 우리나라와 다른 독일의 제도가 이런 의식을 만든 걸까? 나는 항상 ‘제도가 먼저’라는 입장이었다. 그 대표적 예로 늘 현재 우리나라에서 성공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쓰레기 종량제를 제시하곤 했다.


과거 우리나라는 건물면적, 재산세 등을 기준으로 쓰레기처리 수수료를 징수하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제도의 부작용과 비효율성은 심각했다. 이에 환경부는 실제 배출량을 기준으로 수수료를 부과하는 쓰레기 종량제로 전환, 일부 지역에서 시범 실시했다. 그 결과 쓰레기 발생량이 30~40%나 줄고 재활용품 수거는 2배 이상 늘어나는 등 큰 성과를 보였다. 결국 쓰레기 종량제는 전국적으로 전격 시행됐고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쓰레기 종량제의 사례는 내게 있어 서로 다르게 디자인된 제도가 다른 의식과 다른 반응을, 그리고 끝내는 다른 결과를 도출한다는 결정적 증거와도 같았다. 의식 개혁을 촉구하기보다는, 잘 디자인된 제도를 통해 판 혹은 구조 자체를 바꿔 의식과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믿음을 주었다.


하지만 친구의 생각은 달랐다. 생소한 뮌스터의 풍경 앞에서 연신 놀라워하는 내게 친구는 “독일인의 가치 체계는 한국인의 그것과는 판이하다”며 “판이한 가치 체계가 이처럼 다른 풍경을 빚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리가 있는 말 같았다. 친구는 “쓰레기 종량제야 어찌 보면 자본주의적 요소가 강한 제도라 정착시키는 일이 수월하지 않았을까”라며 “하지만 뮌스터의 풍경은 한국인이 떠올리기조차 어려울 것”이란 입장이었다.


좋아 보이는 풍경만 기록한 듯하니 한국인 대다수가 눈을 찌푸릴 만한 풍경도 기록해둔다. 며칠 전 머물렀던 암스테르담의 중앙역 플랫폼에선 흡연이 가능했다. 재떨이도 있었고, ‘Rookzone(흡연 장소)’라는 표지판도 선명했다. ‘쾌락의 도시인 암스테르담은 과연 별나구나’ 싶었던 내 감상은 유럽의 정치와 경제를 이끄는 독일에 들어서며 산산조각 났다. 독일 뮌스터에서 베를린으로 넘어가던 도중 들린 함역 플랫폼에도 ‘Raucherbereich(흡연장소)’라는 표지판이 있었던 것이다. 기차역 플랫폼에서 흡연을? 놀랍게도 그렇다. 흡연을 하던 한 중년 여성은 기차가 도착하자 피던 담배를 급하게 비벼 끄고는 기차에 올랐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중앙역 플랫폼의 흡연공간.




뿐만이 아니다. 런던, 암스테르담, 뮌스터, 그리고 현재 머물고 있는 베를린까지 유럽 도시에선 누구나 길을 걸어 다니며 이른바 ‘길빵’을 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눈을 찌푸리거나 핀잔을 주는 이가 없었다. 친구의 증언은 내가 본 풍경과 일치했다. “누가 앞에서 담배를 피면서 걸어가면 그냥 아무 말 없이 피해 가더라고.” 아닌 게 아니라 여행 중 만난 한국 여행자 중 흡연자들은 하나같이 ‘유럽은 흡연자의 천국’이라는 의견을 보였다. 그때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들었던 인상 깊은 주장을 떠올렸다. “‘길빵’하는 사람들은 사형을 시켜야 해.”


‘혐연권이 중요하면 흡연권도 중요하다.’ 우리나라에서도 흡연자 사이에서 간간히 탄식처럼 터져 나오는 논리다. 그러나 이 논리는 대개의 상황에서 무력하다. 금연구역은 전염병처럼 신속히 번져나가고 있다. 흡연구역을 대폭 추가 지정했다는 뉴스는 내 기억에 없다. 배제와 추방, 제거의 논리가 관철되는 형국이다. 이웃나라 일본은 어떨까. 도쿄와 오사카, 삿포로에서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일본에서도 역시 ‘길빵’은 금기시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곳엔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흡연구역이 거리 곳곳에 준비돼 있었다. 그것도 다양한 편의시설과 함께 말이다. 적어도 일본인은 흡연자를 인간으로 여길 줄 알고, 흡연자의 욕구를 자신의 욕구와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을 줄 아는 것 같아 보였다.


유럽의 풍경은 단순히 어느 날 ‘이렇게 합시다!’ 한다고 구현될 풍경이 아닌 것 같았다. 오랜 역사 속에서 축적된 의식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풍경으로 보였다. 경제체제로 자본주의를 채택하고도 다양한 다른 요소를 살뜰하게 챙겨갈 수 있는 여유로움, 팍팍한 삶 속에서도 타인의 욕망과 입장을 고려할 수 있는 관용 등은 제도보다는 이 사회의 전통과 관습에서 비롯한 듯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제도와 풍경을 구현해내기란 과연 힘든 일일까? 의식도, 전통도, 관습도 유럽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여행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지만 ‘유럽은 이런 점이 참 좋은데, 우리나라는 도대체 왜 그 모양일까… 도입하기 어려운 것도 아닌데…’ 싶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리나라도 이렇게 한다면 사람들이 더 행복해질 수 있을 텐데…’ ‘우리나라에도 이런 제도가 있다면 더 많은 이들이 편리함을 누릴 수 있을 텐데…’ 싶은 점도 넘쳐났다. 유럽의 풍경이 전부 다 우리나라의 풍경보다 마음에 든다는 말은 아니다.


아니로되, 유럽은 우리나라보다 분명 덜 피곤하고 덜 안쓰러워 보였다. 말도 많고, 고집도 세고, 피해의식도 많은 나를 비롯한 한국인들. 알고 보면 정(情)이 많고 속 깊은 사람이 참 많은데…. 뮌스터에서의 인상적인 풍경을 가슴 속에 새기며, 왠지 피곤하고 안쓰러워 보이는 한국인 모두가 지금보다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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