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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Nov 20. 2015

04 네 멋대로 해라

독일 베를린

04

네 멋대로 해라

독일 베를린


베를린은 익숙한 느낌을 주는 도시였다. 네모반듯하게 각진 건물이 가득한 도시. 그동안 거쳐 온 런던, 암스테르담, 뮌스터 등보다는 서울이나 도쿄 등에 가까워 보였다. 다시 말해, 관광지로서의 매력은 영 떨어진다는 소리다. 이는 유럽 여행 전부터 예상했던 바고, 실제 그 느낌은 적중했다. 하지만 애초에 베를린을 들르기로 한 이유는 관광 때문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인 건축물 때문이었다. 바로 베를린 장벽이다.


베를린에 장벽이 세워지기 시작한 건 1961년 8월 13일의 일. 동독이 쌓기 시작한 이 장벽은 서베를린을 동베를린과 주변 동독 지역으로부터 완전히 고립시켰다. 콘크리트로 축조된 장벽을 따라 곳곳에 감시탑이 설치됐는데 동독 정부는 이 장벽을 ‘반파시즘 방어벽’이라는 이름으로, 서독 정부는 ‘수치의 벽’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1961년부터 1989년까지 5000여 명이 이 벽을 넘어 탈출을 시도했고, 그 가운데 100명에서 200명가량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베를린을 동서로 나누는 장벽의 길이는 43km, 서베를린 외곽 장벽은 156km에 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장벽은 시간이 흐르면서 개량된 ‘제4세대 장벽’으로, 높이는 3.6m, 폭은 1.2m였으며, 감시탑은 116개소, 벙커는 20개소에 달했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국경을 횡단할 수 있는 장소는 모두 9곳이었다고 하는데,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이 현재 관광지로 남아있는 체크포인트 찰리(찰리검문소)다.




독일 분단의 흔적. 체크포인트 찰리와 체크포인트 찰리에 서 있는 표지판




베를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두 장소는 체크포인트 찰리와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에 남아있는 베를린 장벽이었다. 체크포인트 찰리 바로 옆엔 박물관이 있는데, 동독을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탈출했던 동독 주민들의 생생한 사례와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여행가방에 몸을 구겨 넣었던 사람, 차를 개조해서 검문소를 정면 돌파했던 사람, 허술하기 짝이 없는 보트를 타고 바다를 향해 나간 사람, 심지어 열기구를 이용한 사람까지… 자유를 갈망했던 동독 주민들의 처절하고 절박했던 심정은 사진으로, 기사로, 모형으로 이 박물관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박물관 곳곳에선 ‘free’, ‘freedom’이란 단어가 자주 눈에 띄었다.


베를린 장벽은 현재 철거됐지만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엔 아직 장벽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란 이름은 슈프레 강을 따라 강변을 두르고 있던 장벽에 세계 각국의 미술가들이 세계 평화를 기원하며 각종 그림을 채워 넣은 데서 유래했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를 따라 천천히 거니는데, 세계 각국의 언어로 적힌 낙서 가운데 다음과 같은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FUCK YOU. I WON’T DO WHAT YOU TELL ME!(엿이나 먹어. 난 네가 하란 대로 하진 않을 거야!)” 미국의 록 밴드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의 노래 ‘Killing in the name’의 가사였다. 적힌 지 꽤나 오래된 듯한 그 영어 낙서를 들여다보며… 자유란 개념이 어쩌면 이리도 간단한 것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의 풍경과 장벽에 적힌 낙서




베를린 여행을 마치고 프라하로 달리는 기차 안에서 가수 신해철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새벽녘까지 공부를 하며 그의 라디오 방송을 자주 접했다. 냉소적이고 세상만사를 아니꼽게 보던 사람이었지만, 라디오 방송은 미치도록 웃겼다. 혼자 새벽에 그의 라디오 방송을 듣다가 어느새 샤프펜슬을 놓고는 소리죽여 낄낄대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예의나 형식 따위는 무시한 채 그야말로 자기 멋대로 하는 방송이었는데, 도대체 이런 정신 나간 방송이 어떻게 전파를 타고 전국에 송출될 수 있는지 의아해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 그가 죽고 나자 인터넷 세상은 애도의 물결로 가득하다. 그 덕분에 나는 라디오 방송을 듣던 기억을 소환할 수 있었다. 더불어 ‘신해철의 음악도시’ 마지막 방송 클로징 멘트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그 멘트를 읽으며 그가 실은 어떤 사람이었을지 새삼 생각하게 됐다. 내 기억이 맞다면 ‘고스트 스테이션’ 진행 당시, 그는 투병 중인 부인을 간호하기 위해 집에서 방송을 진행한 적이 있다. (신해철은 삐딱한 사람답게 결혼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는데, 부인이 암 투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서둘러 결혼을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날 방송도 한 마디로 요약해 미치도록 웃겼는데, 당시 나는 ‘고스트 스테이션’이라는 방송 제목과 부인의 암 투병, 그리고 이 미친 웃긴 이야기가 어떻게 한데 어울릴 수 있는 건지 황당했다.


뜬금없이 신해철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새삼 돌이켜 본 그에 대한 기억 속에서, 또 새롭게 알게 된 ‘신해철의 음악도시’ 마지막 방송 클로징 멘트 속에서 이 시대에 추구해야 할 자유의 단면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선언된 시대. 외형적으로 우린 자유를 누리고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문득 느끼게 됐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사라졌지만, 분명 어떤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건재하다. 특히 ‘신해철의 음악도시’ 마지막 방송 클로징 멘트로 미뤄보건대 삐딱한 사람 신해철은 그 이데올로기의 억압 속에서 자유란 무엇인지에 대해 나름대로의 답을 내리고, 그에 따라 나름대로의 선택을 하며 살아간 사람이었던 것 같다. 다음은 ‘신해철의 음악도시’ 마지막 방송 클로징 멘트.




여러분, 우리는 음악도시의 시민들입니다.


매일 밤 12시에 이 도시에 모이는 우리들은 사실 외형적인 공통점은 그다지 없습니다. 직업, 거주 지역, 성별, 주위 환경 이런 게 다 달라요. 그냥 우리 공통점은 단 하나. 우리가, 글쎄요. 제가 생각했을 때는 아직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남들이 우리를 푼수라고 부를 가능성이 아주 농후하다는 거죠.


저는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 대답을 하고 싶어서, 그 사춘기적인 우쭐함(지금 생각했을 땐 그런데요) 그런 걸로 철학과를 건방지게 진학을 했었고, 근데 학문에는 재주도 없었고, 가보니까 그런 게 아니었고… 해서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 그 대답을 포기하고 그냥 잊고 사는 게 훨씬 더 편하다는 걸, 그런 거만 배웠습니다. 그리고 음악도시를 그만두는 이 시점에 와서야 그 질문에,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 자신 있게 이제는 대답을 할 수 있게 된 거 같아요.


그 대답은, 우린 왜 사는가 하면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는 겁니다. 아, 뭐 자아실현, 이런 거창한 얘기 말고 그냥 단순무지무식하게 얘기해서 행복하게 되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찾고 있는 그 행복은 남들이 ‘우와~’ 하고 막 바라보는 그런 빛나는 장미 한 송이가 딱 있어서가 아니라, 이게 수북하게 모여 있는 안개 꽃다발 같아서 우리 생활 주변에서 여기저기에 숨어있는 고 조그만 한 송이 한 송이를 소중하게 관찰하고 주워서, 모아서, 꽃다발을 만들었을 때야 그 실체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음악도시에서 나눈 얘기들은 정치, 경제 토론도 아니었구요, 그냥 가족, 학교, 꿈, 인생 얘기였고, 인류애나 박애정신 그런 게 아니라요 부모, 형제, 친구들, 뭐 실연, 첫사랑 이런 얘기였잖습니까. 이 하나하나가 작은 그 안개꽃송이였던 거고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행복인거죠. 우리는 은연중에 그런 것들을 무시하도록 교육을 받구요. 더 나아가서 세뇌를 받고 자꾸만 내가 가진 것을 남들하고 비교를 하려고 그럽니다.


근데 자꾸 비교를 하면서 살면 결국 종착역도 안식도 평화도 없는, 끝없는 피곤한 여행이 될 뿐이구요, 인생살이는 지옥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인생이 여행이라고 치면, 그 여행의 목적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게 아니라 창밖도 좀 보고 옆사람하고 즐거운 얘기도 나누고 그런 과정이라는 거, 그걸 예전엔 왜 몰랐을까요.


많은 사람들의 이름하고 목소리가 떠오릅니다. 우리 꿈 많은 백수, 백조들.. 제가 얼마나 백수들을 사랑하는지. 또 왕청승 우리 싱글들, 발랑 까진 고딩들, 자식들보다 한술 더 뜨던 그 멋쟁이 푼수 부모님들. 또 ‘여자친구의 완벽한 노예다’라고 자랑하던 그 귀여운 자식들. 그리고 속으로는 속마음은 완전히 학생들하고 한패인 그 선생님들. 아이스크림 가게의 아저씨. 또 청춘이 괴로운 군바리. 음악도시가 자리를 잡고 나니까 신해철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화제거리가 됐었구요. 여러분들이 바로 나의 프라이드고 자랑이고 그랬어요. 


자… 이 도시에서 우리는 ‘혹시, 혹시 남들도 나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조금 있지 않을까’라고 조마조마해 하던 것들을 사실로 확인했잖습니까, 이 도시에서. 우리 국가와 사회를 현재 지배하는 이데올로기 있죠. ‘인생은 경쟁이다’ ‘남을 밟고 기어 올라가라’ ‘반칙을 써서라도 이기기만 하면 딴 놈들은 멀거니 쳐다볼 수밖에 없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반납해라’ ‘인생은 잘 나가는 게 장땡이고, 자기가 만족하는 정도보다는 남들이 부러워해야 성공이다’ 이런 논리들이요. 


우리는 분명히 그걸 거절했었습니다. 이 곳은 우리들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도시구요. 현실적으론 아무런 힘이 없어 보이지만 ‘우리랑 같은 사람들이 있다’라는 걸 확인한 이상… 언젠가는 경쟁, 지배, 이런 게 아니라 남들에 대한 배려, 우리 자신에 대한 자신감, 이런 걸로 가득한 도시가 분명히 현실로 나타날 거라고 믿어요.

 

잘나가서, 돈이 많아서, 권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된다는 거…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대통령도 재벌도 우리랑 비교할 필요가 없을 거구요. 여러분들이 그 안개 꽃다발, 행복을 들고 있는 이상 누구도 여러분들을 패배자라고 부르지 못할 겁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스스로에게는 언제나 승리자고 챔피언일 거거든요. 




이 긴 클로징 멘트를 읽고 있는데, 불현듯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의 짧은 영어 낙서가 떠올랐다.  ‘FUCK YOU. I WON’T DO WHAT YOU TELL ME!’ 그 짧은 영어 낙서도, 길고 긴 ‘신해철의 음악도시’ 마지막 방송 클로징 멘트도… 결국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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