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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Nov 21. 2015

05 진정한 용기

체코 프라하 & 체스키크룸로프

05 

진정한 용기

체코 프라하 & 체스키크룸로프


# 질문 하나. 전쟁 중인 상황. 당신은 군인이다. 이번 작전 지역에서 아군은 처참하게 패배했다. 당신까지 포함해 가까스로 살아남은 아군 10명과 마을에서 함께 도망쳐 온 부녀자 2명은 적군의 추적을 피해 도망친 끝에 산자락의 어느 동굴에 숨어들었다. 쫓아온 적군의 제안이 전달된다. “여자들을 내놓아라. 그럼 나머지는 전원 살려주겠다.” 적군은 이전에도 이런 식의 제안을 던진 적이 있고, 실제로 여자를 내놓으면 약속을 지켰다. 당신은 이 상황에서 어떡할 것인가.




1969년 1월 19일, 체코 프라하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바츨라프 광장 맨 위쪽 국립박물관 앞에서 한 대학생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다. 그 주인공은 바로 카를대 철학부에 재학 중이던 얀 팔라흐. 당시 그의 나이는 21세에 불과했다. 그가 분신이라는 끔찍한 방법으로 젊은 목숨을 끊은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체코는 기나긴 시간 동안 세 나라에게 차례로 지배를 받은 설움 많은 나라다. 먼저 1526년부터 1918년까지 무려 400여 년 동안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가 패배한 것을 계기로 극적으로 독립에 성공했지만, 곧 등장한 나치 독일에 의해 합병되면서 두 번째 지배를 받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며 드디어 다시 자유가 찾아오나 싶었으나, 상상도 못한 세 번째 지배자가 기다리고 있었으니 바로 소련. 체코가 이 세 번째 지배로부터 벗어난 지는 20년이 채 되지 않았다.


1968년, 소련은 체코에 피어난 탈(脫)공산체제 움직임인 ‘프라하의 봄’을 저지한다는 목적으로 군사적 침공을 감행했다. 당시 체코인들은 지도자 두브체크의 ‘비폭력 저항’ 방침에 따라 체코로 향하는 이정표를 페인트로 칠해 가리는 등의 방법으로 소련의 침공에 대응했다고 한다.


얀 팔라흐는 소련의 침공에 저항한다는 뜻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약 한 달 후인 1969년 2월 25일 또 다른 학생 얀 자이츠가, 1969년 4월엔 에브젠 플로첵이란 학생이 얀 팔라흐의 뒤를 따라 분신했다. 이들이 외친 구호는 ‘체코여, 다시 일어나라!’였다고 한다. 이들의 분신은 효과가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즉효는 없었다. 오히려 소련은 체코를 더욱 강하게 억압했다. 체코의 독립은 이로부터 20여 년이 지나서야 이뤄지게 됐다. 그때 일어난 혁명의 별명이 바로 무혈(無血) 혁명으로 유명한 ‘벨벳 혁명’. 이때도 체코인들은 폭력을 행사하는 대신 꽃 한 송이를 들었다. 다행히 이 혁명은 성공했다.


바츨라프 광장 맨 위쪽 국립박물관 앞엔 얀 팔라흐와 얀 자이츠의 무덤이 있었다. 봉긋하게 솟은 보도블록 위에 십자가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엔 꽃 몇 송이가 놓여 있었다.




바츨라프 광장 맨 위쪽 국립 박물관 앞에 마련된 얀 팔라흐와 얀 자이츠의 무덤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 한 가운데에는 종교개혁가 얀 후스의 동상이 서 있다. 그는 카를대에서 신학과 문학을 배우고, 1398년 카를대 교수로 신학을 강의하였으며, 1401년 철학부장, 1402∼1403년 학장, 1409년 총장직 등을 지낸 소위 엘리트였다. 동시에 성서를 유일한 권위로 강조하고, 고위 성직자들의 성직매매나 면죄부 판매 등 종교의 세속화를 강력히 비판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당시 로마 교회는 분열의 혼란 중에 있어서 한동안 얀 후스의 움직임을 묵인하고 있었으나, 1410년 피사 종교회의에서 선출된 교황 알렉산더 5세는 얀 후스에게 그간의 주장들을 철회하도록 명령했다. 이어 후임 교황인 요하네스 23세는 1411년에 얀 후스를 파문(破門)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얀 후스는 여전히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로마 교회는 1414년에 콘스탄츠 종교회의에 얀 후스를 소환했다. 얀 후스는 고위 성직자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바츨라프 4세의 동생 지기스문트가 안전을 보장했기에 거리낌 없이 콘스탄츠로 향했다.


그러나 얀 후스는 콘스탄츠에 도착하자마자 체포돼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했다. 이어 그의 저서에서 ‘이단사상’이라고 지목되는 부분을 취소할 것을 요구받았으나 이를 거절, 결국 1415년 7월 6일 화형에 처해졌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태어나기 70여 년 전의 일이다.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 한복판에 세워져 있는 얀 후스의 동상




블타바강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프라하의 유명한 다리, 카를교 양쪽으로는 성서 속 인물과 체코의 성인(聖人) 등 30명의 동상이 서 있다. 이중 가장 유명한 것은 17번 동상과 19번 동상 사이에 서 있는 성 요한 네포무크의 동상이다. 요한 네포무크는 체코의 국민적인 성인으로, 1393년 바츨라프 4세에 의해 블타바강에 던져져 익사했다.


그의 죽음과 관련한 전설 하나가 전해진다. 당시 바츨라프 4세는 두 번째 부인인 소피 왕비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의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바츨라프 4세는 소피 왕비가 고해신부인 요한 네포무크에게 고해성사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바츨라프 4세는 요한 네포무크에게 “소피 왕비가 무슨 고해를 했는지 말해보라”라고 요구했지만, 요한 네포무크는 “성스러운 고해의 비밀을 누설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엄히 금하시는 것”이라며 “모처럼 명하신 것을 순종치 못하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라고 거절했다. 심지어 왕이 “내게 소피 왕비의 고해 내용을 말할 수 없다면 다른 하나의 생명에게 말해 보라”라고 하자, 요한 네포무크는 옆에 있던 개의 귀에 대고 귓속말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결국 화가 머리끝까지 난 바츨라프 4세는 요한 네포무크의 혀를 자르고 몸을 묶어 블타바 강에 거꾸로 던져버렸다.


그런데 며칠 뒤 요한 네포무크의 시신은 전혀 불지 않은 채 강 위로 떠올랐다. 그것도 머리 위로 다섯 개의 별 모습을 한 광채를 뿜으면서 말이다. 이를 발견한 사람들은 요한 네포무크의 시신을 수습해 프라하 성(城) 내부의 비투스 대성당에 안치하고 성인으로 추앙했다고 한다.


요한 네포무크는 보통 왼손으로 입을 막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고해의 비밀을 누설하라는 강요를 당하고도 단호히 거절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방을 받은 사람들과 자신의 비밀을 고백한 사람들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진다. 또 다리에서 강물에 빠져 익사한 탓에 다리의 수호성인, 혹은 수재민들의 수호성인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카를교에 서 있는 성 요한 네포무크의 동상




프라하에서 남서쪽으로 약 200km 떨어진 작은 도시, 체스키크룸로프에서도 요한 네포무크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 역시 블타바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인 ‘이발사의 다리’ 위에서다. 이 다리의 이름도 순하지만 용감했던 어느 한 체코인의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현재 이 다리가 걸쳐진 라트란 거리 1번지에는 과거 이발사의 집이 있었다. 당시 합스부르크 왕가 루돌프 2세의 아들은 정신질환이 있어서 요양을 하러 체스키크룸로프 성(城)에 왔다가 이 이발사의 딸을 보고 반해 결혼을 하게 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발사의 딸은 누군가에게 목이 졸려 죽은 채 발견됐다.


범인으로 가장 의심을 받은 이는 바로 정신질환을 알고 있던 남편, 루돌프 2세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광기에 사로잡힌 루돌프 2세의 아들은 오히려 마을 사람들을 한 명씩 계속 죽여 나갔다. “아내를 죽인 범인이 잡힐 때까지 멈추지 않겠다”며 말이다. 끔찍한 학살을 보다 못한 이발사는 자신이 딸을 죽인 범인이라고 거짓 자백을 했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사위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루돌프 2세의 아들이 벌이던 어리석은 처형은 결국 이발사의 희생 덕분에 중단됐다. 그 후 살아남은 사람들이 이발사를 추모하며 세운 다리가 바로 이발사의 다리라고 한다.




체스키크룸로프 성 꼭대기에서 바라본 마을 전경. 사진 우측 하단에 보이는 다리가 ‘이발사의 다리’다.


이발사의 다리 앞에서




#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이 질문은 내가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받았던 질문이다. 당시 나는 이런 대답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자들 스스로 선택하게 한다.’ 그런 대답을 하면서도 딴에는 공리주의(功利主義·‘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두는 사상)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며 스스로를 대견스러워 했다. ‘어쩔 수 없으니 여자 2명을 적군 측으로 보내고 남은 10명이라도 목숨을 부지한다’ 등의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소리다. 해법의 열쇠를 쥔 당사자에게 선택권을 준다는 나의 대답은 생각해 볼수록 썩 괜찮은 대답 같았다.


하지만 내게 질문을 던졌던 이로부터 돌아온 말은 내게 심한 부끄러움을 안겼다. “여자들 스스로 선택하게 한다면, 과연 그들이 정말 솔직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책임을 여자들에게 미루는 더 비열한 선택 같은데… 여자들을 적군 측에 보내면 어떤 처지가 되리란 건 뻔한 일이잖아. 그렇다면 차라리 그 여자들과 최후까지 함께하는 것이 맞는 선택 아닐까?” 함께 죽는 길을 택한다. 살길이 있어도 의로움을 위해 죽음을 택하는… 이른바 ‘희생’을 택한다. 그런 생각은… 미처 떠올리지 못한 게 사실이다. 당시 스스로를 자책했던 기억이 난다. ‘여자들 스스로 선택하게 한다’는 어이없는 대답을 하다니… 나는 대체 뭐가 문제지? 내가 받은 교육? 내가 듣고 자란 말들? 아님 나 자체?


체코에서 순하지만 용감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연달아 접하는 동안 나는 자꾸만 그 시절의 그 대화가 떠오르곤 했다. 프라하를 나오는 길.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한 이를 기리고 기억하기 위해 무덤과 동상을, 또 다리를 도시 주요 지역 곳곳에 놓아두는 이 나라 사람들의 감수성을 상상해 봤다. 그 마음을 아무리 떠올려 봐도… 왠지 나에겐 먼 나라의 풍문처럼 희뿌옇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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