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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Nov 21. 2015

06 한 아이의 신발

폴란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

06

한 아이의 신발

폴란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


하늘이 맑고 높은 날,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를 방문했다. 갈색 벽돌마다 눈부신 햇살이 가득했다. 가을이어서, 노랗게 마른 잎사귀들이 나무에서 떨어져 흩날렸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의 건물들은 마치 휴양지의 콘도처럼 한가롭게 줄지어 서 있었다.


그 건물들 안엔 인간의 야만성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여러 가지 증거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인간의 야만성은 새삼스러운 속성이 아니다. 인간은 인간에게 오랜 시간 동안 끔찍한 짓을 끝도 없이 반복해 왔고,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나는 짧은 기자 생활을 하면서 이를 확신하게 됐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 ‘ARBEIT MACHT FREI(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기만적인 문구가 붙어 있다. 당시 이 문구를 설치했던 유대인 수감자들은 일종의 사보타주(sabotage)로 B자의 위아래를 뒤집어 놓았다고 한다. 뒤집힌 B자가 덧없어 보인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에 전시된 유대인들의 소지품. 나치 독일은 이런 물품을 분별해 본국으로 보냈다. 재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이 소지품의 주인들은 가스실에서 죽은 뒤 뒤섞여 소각됐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에서 새삼 경악스러운 것은 인간의 야만성보다는 한 집단을 향한 인간의 증오심이다. 한 집단을 향한 증오심이 구체화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는 말없이 증명하고 있었다.


수용소 안에서 기껏해야 6~7살 정도의 아이가 신었을 법한 신발을 봤다. 아이들은 효용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수용소 도착 즉시 모두 가스실로 직행했다고 하니, 아이가 죽기 직전 벗어둔 신발일 것이다. 아이가 죽어야 했던 이유는 명백했다.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때로 어느 한 집단을 향한 증오심과 마주한다. 주로 삶을 뒤흔들고 난타하는 세파(世波)가 거셀 때, 그런 증오심이 쑥쑥 자라난다. 그것은 어떤 나라에 대한 증오심이기도 하고, 어떤 지역에 대한 증오심이기도 하며, 어떤 계층에 대한 증오심이기도 하다. 그런데 듣다보면 마냥 헛소리 같아 보이지가 않는다. 가만 보면 그 증오심은 나름의 논리와 이유를 탄탄하게 갖추고 있다. 그 논리와 이유는 사료일 때도 있고, 통계일 때도 있으며, 증언일 때도 있는데, 천천히 살펴보다보면 정말로 그럴듯해 고개가 끄덕여질 때가 있다.


살아가면서


바로 그런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나는 이날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본 한 아이의 신발을 떠올리자고 생각했다. 수용소에 도착해 영문도 모른 채 신발을 벗고, 샤워를 하는 줄만 알고 가스실로 들어가 싸이클론 비를 들이켜야 했던 한 아이가 있었음을. 유대인이기 이전에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한 명의 인간으로서, 철저하게 혼자만의 고통 속에 비참하게 죽어갔을 그 아이의 운명을 떠올리자고 말이다. 세파로 인한 피로와 피곤이 집단을 향한 증오심으로 자라났기 때문에, 단지 그 때문에 죽어야만 했던 그 아이의 운명 앞에서… 유효한 논리와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




한 아이의 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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