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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재균 Mar 27. 2024

당신의 삶에 어떤 음악이 흐르고 있나요?

일상의 권태에서 벗어나기

월요일

다소 늦은 출근시간,

약속이 있어 오랜만에 버스를 타고 지하철로 환승하여 시내에 나갔다.      


버스 정류장에 나가니 아직 긴 줄이 늘어져있다. 버스 몇 대를 그냥 보내면서 기다리다 마침내 버스를 탔다. 올라가니 버스 안은 고요했다. 정적이 흐른다. 오랜만에 버스를 타니 내부 풍경이 낯설다. 게임을 하는지 손가락이 핸드폰 위를 분주히 오가는 청년,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듣는지 눈을 감은 사람, 아님 그냥 잠에 빠져들어 고개를 옆으로 심하게 쳐져버린 중년의 여자가 보인다. 삶에 지친 모습들이다.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옆자리에는 등산복을 입은 내 나이 또래의 중년이 앉아있다. 전화로 청계산에서 만나는 장소를 확인하는지 계속 시끄럽게 통화를 한다. 나 역시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 이어폰을 꺼내 들어 귀에 꽂았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니 마치 부유하던 먼지가 가라앉듯이 마음이 차분해진다.     

 

하지만 버스 내에는 온통 무거운 무기력한 기운이 내려앉아있다. 오랜만에 버스를 탔기에 느끼는 분위기이지만 예전에도 늘 그랬던 느낌이다. 내가 느낀 그 버스 속에서의 감정 덩어리는 한마디로 ‘무기력’이었다. 퇴근길에서 느낄 수 있는 ‘피로감’과는 다른 것이었다. 하루의 일과에서 일에 집중하느라 기력이 일시적으로 소진되어 나타나는 피로감과는 다르다. 피로는 휴식을 취하면 다시 활력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삶의 활력을 잃고 찌든 모습이다.


출근길 버스 안에서 느낀 무기력한 기운은 안락한 의자에 앉아 뭔가를 하고 있지만 삶의 활력은 전혀 없는 모습이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팀장이 요구하는 보고서에 토씨하나까지 고치면서 몇 번을 새로 작성해야 하는 나의 아들, 아침에 아이 유아원에 보내면서 엄마와 떨어지기 싫어서 우는 아이를 뒤로 하고 헐레벌떡 회사로 출근하는 나의 딸들이다. 밥벌이를 위해 그리고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기 위해 사장이 터무니없는 헛소리를 해도 그 앞에서는 웃으면서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나의 후배도 있다. 버스 속의 얼굴에는 나의 가족이 있고, 친구, 동료, 후배, 선배들이 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캘리그래피 - 2024년 3월 14일


우리는 극단적인 경쟁에 내몰리고 있다. 초등학교부터 시작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와서까지 경쟁하면서 살아남아야 한다. '오래 버티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라는 어쩔 수 없는 신념으로 살아간다. 그러니 매일의 출근길이 사막에 있는 것처럼 삭막하다. 일상이 사막화가 되었다. 그나마 사람들은 잠시나마 휴식을 갖기 위해 게임이나 SNS, 짧은 양상 등을 본다. 무료하고 피곤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지만 결국은 다시 무의미한 곳에 반복적으로 빠져든다. 일상으로 돌아오면 다시 무기력해지고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다시 게임, 숏츠, 인스타그램 혹은 먹방 TV에 빠져든다. 무기력과 무의미의 무한 반복이다.      


직접 자신의 몸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남이 하는 것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하고 있다. 직접 요리를 하여 만들지 않고 남이 먹는 모습을 보면서 즐긴다. 그 요리를 배민이나 쿠팡이츠롤 통해 주문하여 자신의 식욕을 쉽게 해소한다. 숏츠 영상에 빠져 드는 것 또한 동일하다. 옆에서 지켜보면서 구경꾼으로 남아 소비만 하다 보면 자연히 권태에 빠진다. 쇼펜하우어는 "고통과 권태가 없는 삶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삶이다. 그것이 바로 행복의 절정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찰나의 행복한 순간을 위해 고통과 권태의 진자추에 매달려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가.    

 

운전을 할 때도 비슷한 느낌이 든다.

직접 운전할 때와 조수석에 있을 때의 기분이 다르지 않았던가? 내가 직접 오감을 이용하면서 운전대로 차를 통제할 때는 불안감이 줄어든다. 오히려 조수석에 있을 때가 더 불안하다. 이런 경험을 많이 했을 것이다. 오랜만에 조수석에서 느긋하고 편안하게 가고 싶었는데 왠지 운전자가 위험하게 운전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던가?      


왜 그럴까?      


내가 직접 통제할 수 없다는 상황 때문이다.      

직접 개입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의도하지 않는 방관자가 되기 때문에 몸은 편안할지 몰라도 마음은 결코 편치 않다. 도로 상황이 조금만 좋지 않다거나 하면 불안감은 증폭된다. 내가 직접 개입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수석이나 뒷자리에 있으면 멀미를 하기 쉽다.  

    

최근에 일본 여행을 하면서 느낀 경험이다.

한국에서 미리 렌터카를 예약하고 친구들과 함께 골프여행을 갔다. 현지에서 SUV 차량을 인수받은 후 친구가 운전하고 나는 조수석에 앉아 길 안내를 도왔다. 물론 내비게이션이 장착되어 있지만 일본은 차량이 좌측통행일 뿐만 아니라 우측에 핸들이 있어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 초행길에다 이정표가 일본 가타카나로 표시되어 있어 헷갈릴 때가 많다.    

  

게다가 내비게이션은 인공위성과의 통신으로 인해 가끔 약간의 시차로 인해 안내가 늦게 나오는 경우도 있다. 몇 번 시행착오를 하면서 운전자보다 조수석에 있는 내가 오히려 더 불안하였다. 내가 직접 핸들을 쥐고 통제를 하지 못하기에 불안과 함께 무기력함을 경험하였다. 차라리 조금 힘이 들더라도 내가 직접 운전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의 삶,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운전자와 조수석의 차이다. 운전대를 누가 잡고 있는가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진다. 누가 내 삶을 통제하고 있는가? 회사의 팀장인가, 사장인가? 혹시 나의 부모나 배우자는 아닐까? 나는 그저 조수석에 있는 구경꾼은 아닌지 돌아본다. 결국 본인이 직접 통제하고 삶의 역경에 역동적으로 대응하는가. 아니면 구경꾼이 되어 조수석에 앉아 안락하지만 무기력하게 소극적 방관자로 남는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를 적극적인 운전자 혹은 소극적인 방관자로 만드는가? 소비자와 생산자, 그 차이를 살펴본다.     

      



소비자와 생산자, 그 차이는?     


"우와! 멋져요! 최고예요!"

"요새 영화감독 데뷔한 것 같아, 대단하슈~!"


최근에 여행이나 골프 라운딩을 다녀오면 영상을 만들곤 했다. 여행지에서의 의미 있는 장면의 사진과 동영상을 모아 영상으로 제작한다. 그 영상을 동행자들에게 나누어주면 모두 즐겁게 본다. 남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때 직접 제작한 보람을 느낀다. 남의 유튜브 영상을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소비자로서가 아니라 직접 생산자로 나설 때 보다 더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다. 내가 자발적이고 자유롭게 무언가를 생산할 때 삶의 자유도가 높아지는 것을 느낀다. 그런 생산 활동은 돈이 많다고 할 수 없는 일이다.

    

친구들과 골프 라운딩을 다녀온 후에 만든 영상 타이틀


패션은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물론 옷으로 자신의 외면은 표현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의 내면의 정체성을 알기는 어렵다. 그 사람이 무슨 브랜드의 옷을 입었는가 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글로 쓰고 있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진실을 알 수 있다. 소비를 통해서는 자신의 진정한 내면을 표현할 수 없다. 내가 무엇을 소비하고 있는가 보다는 무엇을 생산하고 있는가? 이것이 자신의 정체성이다. 영상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유튜브를 통해 수많은 동영상을 보고 있지만 정작 자신만의 영상을 만드는 것은 꺼려한다. 영상을 만들면서 많은 것을 생각한다.  


아이폰에 내장된 ‘아이무비’를 이용하면 영상을 쉽게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잘 사용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제작하는 방법을 잘 모르고 서투르기 때문이다. 대부분 다른 사람이 만든 영상을 유튜브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실제로 제작하면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마치 자유여행과 패키지여행과의 차이라고 할까.    

  

아내와 딸의 파리 여행을 기록한 영상, 2022년 11월


독립적으로 계획하여 스스로 여행하는 것이 두려운 사람은 패키지여행 상품을 소비한다. 나만의 여행계획을 만들려면 힘들고 불편하다. 여행사 프로그램을 소비하는 것으로 여행한 것과 같은 기분을 낼 뿐이다. 타인에게도 보여주고 싶은 ‘나’를 보여준다. 진짜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즐기는지 알 수 없다. 그냥 편안하게 프로그램에 따라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영상을 제작할 때 처음에 스토리를 구상하여 사진과 동영상을 순서에 맞게 넣은 후 한번 리뷰해 본다. 아직 사진만 순서대로 흘러가기에 마치 ‘앙꼬 없는 찐빵’처럼 뭔가 부족하다. 단조롭기도 하고 의미 전달이 잘 되지 않는다. 그다음 자막을 넣으면 의미가 전달된다. 하지만 아직 뭔가 아쉽다. 그 순간 배경 음악(BGM)을 넣고 이어폰으로 들으면 아름다운 선율이 흐른다. 단조로웠던 영상에 살아 숨 쉬는 듯한 활력을 불어준다. 한 편의 아름다운 '스토리'가 담긴 영상으로 탄생하는 순간이다. 다양한 장르의 배경 음악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주고 감동을 전한다.  

   

최근에 제작한 영상


최근에 영상을 만든 후, 베토벤의 '월광소나타' 3악장을 배경 음악으로 넣었다. 3악장은 초반부터 베토벤 특유의 긴박하고 격정적인 분위기의 선율과 화성으로 차분한 1악장과는 완벽한 대조를 이룬다. 월광소나타는 베토벤이 1798년 경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청력장애를 겪으면서 30세 되는 해인 1800년에 쓴 곡이다. 그다음 해인 1801년, 제자이자 연인 관계였던 열네 살 연하인 '줄리에타 귀차르디'라는 백작의 딸에게 사모하는 마음을 담아 청혼을 하면서 이 곡을 헌정했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베토벤이 귀족의 집안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와의 결혼을 반대하여 청혼은 무산되었다. 그렇게 사랑했던 줄리에타는 다른 젊은 백작과 사랑에 빠져 결혼해 버렸다. 베토벤은 깊은 좌절에 빠졌다.


독일의 평론가 렐슈타프(Ludwig Rellstab, 1799-1860)는 1악장을 듣고 "마치 스위스 루체른 호수 수면에 달빛이 비치고, 그 위에 조각배가 떠 있는 것 같다"라는 평론울 하면서 베토벤이 죽은 후에 '월광'이라는 이름이 붙이게 되었다. 3악장에서는 베토벤이 줄리에타 연인을 향해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감정을 드러내어 음악으로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내가 영상을 만들면서 나의 진심을 담아 보여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월광 소나타'가 대신 열정적으로 들려주었다. 영상의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베토벤이 정열적으로 사랑했던 그 감정이 피아노 선율에 다시 살아나면서 나의 마음이 표현되었다. 영상의 아름다움이 음악을 통해 더욱 확장되었다. 영상에는 '나의 스토리'가 있기 때문인지 단지 피아노 선율만을 들을 때와는 전혀 다른 황홀한 느낌을 준다.


베토벤은 자신의 음악을 '장엄미사'곡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나의 음악은 내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이것이 듣는 사람의 마음으로 전해지길 원한다.

베토벤은 청중들이 음악에 담긴 자신의 감정을 함께 느낄 수 있기를 원했다. 음악은 이렇게 삭막한 사막과도 같은 현실 속에서 듣는 이로 하여금 열정적인 감정으로 만들어 전달된다. 음악과 그림은 우리에게 일상의 무료함과 권태에서 벗어나게 하고 활력을 준다. 특히 베토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의 인생을 알고 난 후, 그의 피아노 소나타는 들을수록 나에게 새롭게 다가오면서 삶의 의미를 더해준다. 우리의 일상에도 항상 다양한 장르와 음악가의 배경음악이 깔린다면 삶의 한 순간이 영화의 한 장면이 되지 않을까?

     

단조로운 일상의 권태에서 벗어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음악뿐일까? 일상의 반복은 권태를 낳고 그 권태로 인해 더 높은 쾌락을 추구한다. 그 쾌락마저도 반복이 되면 다시 권태에 빠진다. 끊임없는 순환 고리다. 이 쾌락과 권태의 고리를 끊어주는 유일한 길이 예술과 운동이다. 음악, 시, 미술, 문학, 철학, 영화, 운동 등이다. 이것들은 직접 몸으로 실행을 하면 효과가 배가 된다.    

          

유튜브, 숏츠 혹은 인스타그램이 제공하는 영상을 시각으로 즐기는 기쁨은 찰나적이다. 쉽게 빠져들지만 보고 난 후에 왠지 상쾌하지 않고 불쾌한 느낌이 든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라는 여행 프로그램만 열심히 보고 난 것과 같다. 오감을 이용하여 몸으로 부딪쳐서 경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바뀌면 어떨까?    

 

남의 글을 읽기만 하지 말고 직접 내 생각을 써보면 어떨까? 피아노 소나타를 듣지만 말고 연습해서 스스로 연주하면 어떨까. 그림을 눈으로 감상만 하지 말고 스케치라고 그려보면 어떨까. 그 느낌은 전혀 다를 것이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먹방’ 프로그램을 보고 배달음식을 시킬 것이 아니라 직접 요리를 하면 어떨까?   

  

감각기관을 활짝 열어젖혀서 마음껏 보고, 듣고, 향기를 맡고, 맛보고, 만지면서 생산하고 놀이를 할 때만이 나답게 살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만 한다면,

내 삶 속에서 다양한 음악이 흐르고 시를 낭송하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더 풍성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가족과 친구, 이웃의 일상 속에 음악이 흐른다면 출근길, 버스 안의 무기력했던 모습도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캘리그래피 - 2024년 3월 21일





"음악은 우리의 삶을 놀라움으로 가득 채운다."


"음악은 우리가 감정을 표현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다.


"사랑이란 사랑을 한 사람 자신에게 돌아온다. 비극적이게도 미움 역시 그러하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운명에 져서는 안 된다."


"나는 운명의 목을 죄어 주고 싶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운명에 져서는 안 된다."


- 베토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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