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전의 양면과 같은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 디엠'
2019년 초, 국내 안방을 잔잔하게 흔들어 놓은 12부작 드라마가 있었다.
<눈이 부시게>이다.
마지막 회에서 70대 알츠하이머를 앓는 노인 역의 김혜자가 엔딩 내레이션을 하는 장면이 있다. 그 내레이션은 바로 나에게 말하는 것과 같은 울림을 주었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행복했습니다. 새벽의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콤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중략)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김혜자가 극 중에 들려준 소중한 삶의 예찬이다.
삶을 다시 생각한다.
인간은 어쩌면 불쌍한 존재이다.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세상에 던져진 채로 나와서 삶의 의미를 찾다가, 아주 찰나의 기쁨만 느끼면서 결국은 고통으로 신음하면서 또다시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한 줌의 흙으로 사라지는 존재이다. 삶의 의미를 찾을 수밖에 없다. 인생이라는 거대한 연극의 마지막 장이 끝나고 커튼이 내려가는 순간이 있다. 바로 임종의 시간이다. 그 순간에 나는 어떤 행복한 순간을 그리워하고 또한 무엇을 후회할까?
인생이라는 대하드라마도 마지막 노년의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가에 따라 행복을 느끼는 강도가 달라진다. 셰익스피어 작품 중에 <끝이 좋으면 다 좋다>라는 희곡이 있다.
글도 마지막을 어떻게 끝내는가가 중요하다. 나도 글을 쓸 때 항상 어떻게 종결지을 것인가를 고민한다. 글뿐 인가. 모든 일에는 마무리가 중요하다. 인생을 마무리하는 임종의 시간을 한번 상상하면서 시간을 거꾸로 돌려 본다. 가장 가까운 부모님의 임종 과정을 기억해낸다.
나는 어머니 아버지 두 분의 임종을 모두 함께 하지 못했다. 두 분은 뭐 그리 황급하게 갈 길이 있다고, 나는 뭔 그리 바쁜 일이 있다고 작별하는 그 시간도 함께 하지 못하고 이별했다. 어머니는 뇌졸중으로 인해 거의 7년 이상을 병실에서 의식이 없는 상태로 지냈다. 당시에는 연명의료법이라는 것도 없었기에 가족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당신에게는 고문이고 지켜보는 가족에게는 고통이었다. 7년의 긴 시간을.
나의 임종의 그 순간에 나는 무엇이 가장 그립고 어떤 것이 후회스러울까?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했더라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할 걸’와 같은 것을 후회할지 모르겠다. 그 많은 책을 읽고도 정작 실천하지 않았던 것이 얼마나 많았는가를 후회하겠다. 모두 하지 못한 일들을 후회할 것 같다. 젊은 시절, 사업으로 바쁘게 보내다가 어느 날 훌쩍 커 버린 아이들과 그나마 늦게라도 대화를 하면서 서로 마음을 나눈 시간을 그리워하겠지. 아내와 함께 가족이 여행을 한 시간들을 기억하면서 그리워할 게다.
돈을 더 못 벌었다고 후회하지는 않을게다. 다만 내게 주어진 돈으로 얼마나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남들에게 더 많이 베풀지 못한 것을 후회하겠지. 대학에서 더 이상 강의와 연구를 하지 못하고 나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해 더 많이 투자하지 못하고 시간을 흘려보낸 것을 후회하겠지. 딸들이 더 좋은 대학과 직장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들이 서로 사이좋게 의지하면서 살아갈지를 더 염려하겠지.
새해마다 생각만 하고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겠지. 하지만 ‘다시 삶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하고 후회하지는 않으련다. ‘이만하면 인생을 낭비하지 않으며 살았고 한바탕 잘 놀다가 간다.'라고 스스로 위로는 하겠다. 심장 박동 수가 느려지고 의식이 희미하게 되는 순간에 건강을 더 챙기지 못하고 가족에게 부담이 된 나를 후회할지도 모른다.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를 미리 작성해도 어쩌면 이런 시간도 허락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시간은 나의 통제를 벗어나 누구에나 차별 없이 한 번은 꼭 닥친다.
내가 원하는 삶을 위해 변화를 기꺼이 수용하고 실천했더라면 이런 후회는 훨씬 줄어들 것이다. 마지막 임종의 순간 가족들에 둘러싸여 침대에 누워 이런 후회를 뒤로 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모두에게 희미한 미소로 잘 있으라는 인사를 나눌 수 있기를 희망한다. 죽음의 순간에는 모든 쭉정이 같은 욕망은 사라지고 가장 중요한 알맹이만 남기 때문이다.
큰 시련이 올 때 나는 '죽음'을 생각했다. 감성이 예민한 사춘기, 고등학교 시절에 폐결핵을 심하게 앓았다. 죽음이 코 앞에 있음을 느꼈다. 현대의학이 개발한 약리학 덕분에 다시 살아났다. 그래서 어려울 때면 그 당시를 생각한다. '그때도 살아 견디었는데' 하고. '죽음'을 생각할 때면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죽음은 결코 삶과 분리된 것이 아니고 삶의 한 부분이다.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알 수 있고, 삶 가운데 죽음이 있음을 기억한다.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너는 언젠가 죽는다는 걸 사실을 기억하라'는 의미다. 죽음의 순간을 생각하면 삶을 더욱 귀하고 진지하게 대할 수 있다. 또 다른 라틴어 ’ 카르페 디엠‘ 즉 ’ 현재를 잡아라 ‘는 뜻으로 ’ 지금 이 순간도 아까운 시간이 지나가고 있으니 현재를 낭비하지 말고 진지하게 살아라 ‘라는 의미다. 결국 두 개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현재를 잘 살아야 그나마 의미 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탁월한 웅변가인 키케로는 “하루하루가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충만해진다. 나로서는 그런 원숙함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하루하루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오랜 항해를 마치고 드디어 육지를 찾아 항구에 들어서는 선원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라고 말했다. 과연 나는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까.
톨스토이가 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라는 소설이 있다. 주인공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리치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심리 묘사가 사실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일리치는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상류층을 동경하면서 판사가 되어 자신의 사회적 역할에만 충실하였다. 남다른 처세술로 자신의 지위를 보장받고 원만한 대인관계를 유지하였다.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이었던 그에게 죽음이 닥쳐왔다. 가벼운 부상이 원인 모를 병으로 악화되어 45세에 죽음을 맞이하였다. 죽음에 임하면서 가족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동안 가족은 뒤로 하고 오로지 자신의 명예와 쾌락만을 추구한 자신의 삶을 돌아보지만 벌써 죽음의 시간은 가까이 오고 있었다. 일리치는 죽음에 직면하면서 자신의 삶의 방식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후회하며 분노한다. 그를 가장 분노케 한 것은 그의 죽음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태도이다. 그러나 자신도 살면서 타인의 죽음에 대해 똑같이 대했기 때문에 화를 낼 수도 없다.
그의 아내는 남편의 죽음으로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연금을 받을 수 있을지 염려할 뿐이다. 그녀가 슬퍼한 것은 남편의 죽음이 아니라 남편의 죽음으로 경제적 손실이 생기고, 더 이상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결혼을 앞둔 딸은 병으로 죽어가는 아버지가 자신의 미래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을까 전전긍긍한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주인공이 어느 날 거대한 벌레로 변신한 뒤 가족과 사회로부터 고립된 채 비참하게 죽음에 이르는 모습과 유사하다.
소설 속의 얘기가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그렇다. 나 역시 어려울 때면 의도적으로 죽음의 순간을 생각한다. 그 시간을 생각하면 생의 모든 갈등과 욕망이 저 멀리 가고 오로지 순수한 정수만이 남는다. 내일이 그 날일지라도 나는 오늘도 아침에 읽고 쓰면서 나만의 리추얼을 행한다. 그리고 걷는다.
다시 <눈이 부시게>에 나오는 내레이션을 떠올린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살고 있는지 다시 돌아본다.
<Photo by Lesly Juarez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