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오랫동안 답답함을 품고 있느냐에 따라 결과물의 수준이 정해진다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중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삶의 끝자락에 서 있는 듯한 절망 속에서도 그는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여자를 만났고, 두 사람은 깊은 사랑에 빠졌다. 여자는 남자가 몇 개월 혹은 1년을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남은 시간을 정성으로 채우기로 마음먹었다.
여자는 자신이 누군가를 이렇게 깊이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을 사랑에 온전히 바치는 것을 두려워했던 그녀였다. 그러나 이번만은 달랐다. 남자를 향한 사랑은 그녀에게 어떤 희생도 감수할 용기를 심어주었다. 그녀는 그동안 어떤 관계도 1년 이상 지속해 본 적이 없었지만, 죽음을 앞둔 남자를 사랑하며 자신이 비로소 진정한 인간이 된 것 같다고 느꼈다.
그러나 기적처럼 남자는 골수 이식 수술에 성공하며 건강을 회복했다. 시한부 인생이던 그는 눈에 띄게 나아졌고, 6개월이 지나자 거의 완치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전과 같지 않았다. 여자는 알 수 없는 답답함과 갇힌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심각한 위기 속에서 맺어진 관계는 상황이 호전되었을 때 예상치 못한 감정적 동요를 겪을 수 있다. 여자에게는 삶의 끝이 보이는 절박한 순간에 남자를 돌보는 것이 쉬웠을지 모르지만, 50년을 일상으로 채워가는 일은 그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애덤 그랜트 교수는 자신의 저서 <오리지널스>에서 창의적인 사람들의 특성을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창의적인 사람을 전문가이면서 고집이 세고, 기발한 아이디어로 빠르게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랜트 교수는 이와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창의적인 사람들은 반드시 전문성이 뛰어난 것은 아니며, 오히려 폭넓은 견해를 타인에게 구하는 경향이 있다. 또 남들보다 앞서 나가 성공하는 경우보다는 참을성 있게 적절한 때를 기다려 성공하는 사례가 더 많다. 무엇보다 그들은 일을 미루는 경향이 있다. 이를 그랜트 교수는 ‘전략적 지연’이라 부르며, 창의성과 독창성을 이끌어내는 핵심 요소라고 강조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구상하는 데만 15년이 걸렸다. 그는 작업을 미룰 때마다 좌절했지만, 독창성은 서두른다고 달성되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1927년, 러시아 심리학자 블루마 자이가르닉은 사람들은 완성된 작업보다 미완성된 작업을 더 잘 기억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미완성 상태로 남은 작업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떠오르며 계속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전략적 지연은 뇌가 설익은 해결책을 서둘러 내놓으려는 충동을 억제하는 방법이다. 일을 미룬다고 해서 계획을 건너뛰는 것이 아니라, 꾸물거리며 다양한 가능성을 탐색하고 수정과 보완을 통해 점진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남자를 간호했던 아내처럼, 짧은 시간 동안 모든 것을 거는 일이 때로는 수십 년을 일상으로 채우는 일보다 쉬울 수 있다. 숨을 참고 전력으로 달리는 단거리 경주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안갯속을 달리는 마라톤이 더 어려울 수도 있다.
절박함은 몰입을 쉽게 만든다. 마감시간이 다가올 때 비로소 집중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몰입 상태에 들어가면 자신도 모르는 에너지가 솟아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뇌가 그 작업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미완성 상태로 둔 채 생각을 지속하면 뇌는 이를 해결해야 할 문제로 인식하고 끊임없이 탐구하게 된다. 이것이 몰입을 통한 창의적 해결의 원리다.
뇌는 본능적으로 게으르다. 시작한 일을 빨리 끝내고 쉬고 싶어 한다. 그러나 더 깊이 사고하고 성장하려면 뇌의 본능과 반대로 움직여야 한다. 그중 하나가 바로 ‘전략적 지연’이다. 조급함은 창의성과 거리가 멀다. 시작은 빠르게, 그러나 결과물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내놓는 것이 독창적 아이디어를 만드는 비결이다.
시작은 빠르되, 완성은 느리게. 전략적 지연은 우리의 삶과 일, 사랑에서도 깊이를 더하는 중요한 원칙이다. 짧은 순간의 전력을 다하는 몰입만큼이나, 길고 느리게 이어지는 과정 속에서 더 깊은 성찰과 창의성이 탄생한다. 본능을 거스르고 꾸물거리는 태도가 결국 새로운 길을 여는 열쇠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