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이 사유로 전환되면 내려가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by 정강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시작이다.

서른 살이 되었을 때, 고향과 고향 호수를 떠나 산으로 들어갔다. 10년 동안 산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자신의 정신세계와 고독을 즐기느라 지루함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마음에 변화가 왔다. 붉게 물든 동녘 하늘을 보며 일어난 어느 날 아침, 그는 태양을 보며 말했다.

“위대한 태양이여,....... 매일 아침 당신을 기다렸고, 당신에게서 넘쳐나는 것을 받았고, 감사와 축복을 보냈다. 나는 나의 넘치는 지혜에 싫증이 났다. 너무 많은 꿀을 모은 꿀벌처럼. 이젠 도움을 달라는 손길이 필요하다. 나의 모든 지혜를 나누고 싶다.......... 그리하여 나는 저 아래로 내려가야만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상징적이고 철학적 작품으로 인간의 성장과 초월에 대한 독창적 사유를 담고 있다. 위의 시작 글에서 몇 가지 의견과 반론을 제기해 볼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30살’에 산으로 들어갔다

부처는 궁전 밖에서 노인, 병자, 죽음을 목격하고, 이러한 삶의 아픔을 없애기 위해 29살에 출가하였고, 예수도 포교를 시작한 나이가 30세라고 알려져 있다. 공자도 이 시기에 다양한 국가를 여행하며 자신의 사상을 전파를 시작했고, 소크라테스도 30세부터 아테네의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질문하는 철학적 대화와 교육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교에서 30세를 ‘이립(而立)’이라고 부른다. ‘자립하여 서다’라는 뜻으로, 서른은 개인이 자신의 삶과 학문에서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시기이며, 개인이 성숙해지고, 자신의 목표와 방향을 확립하는 중요한 시점이다. 니체가 어떤 함의를 말하려고 차라투스트라를 30살에 산에 들어갔다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현자들에게 서른은 중대한 시점인 것은 분명하다.


차라투스트라는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산속에서 수행한다

‘10년 법칙’이라는 개념이 있다. 어떤 분야에서든지 최소 10년의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비로소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10년은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시점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차라투스트라의 10년은 그의 정신적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일 것이다.


위대한 태양이여,라며 외치다

그가 태양을 향해 “위대한 태양이여”라고 외치며 찬사를 보내는 장면은 태양을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닌, 생명을 유지하고 세상을 비추는 초월적 존재로 상징화한다. 고대 사회에서 ‘태양’을 신으로 여겼다. 원시시대의 밤 특히 겨울밤은 많은 이들을 얼어 죽게 했다. 그들에게 죽음의 고비가 되는 밤을 보내고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는 것은 자신을 살려준 신을 영접하는 순간이었다. 차라투스트라도 ‘매일 아침 당신을 기다렸고 당신에게서 넘쳐나는 것을 받았고, 감사와 축복을 보냈다.’며 태양을 찬양한다.


차라투스트라는 넘치는 지혜에 싫증 났다고 고백한다.

'너무 많은 꿀을 모은 꿀벌처럼'이라는 비유는 그가 축적한 지혜의 과잉이 피로를 가져왔음을 암시한다.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닌 경험과 통찰을 통해 얻어지는 지혜가 쌓이면 사회적 책임감을 느끼는 순간이 찾아온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공동체에 공유해야만 한다는 강한 의무감이 생긴다. 이런 지혜는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자신의 지혜를 공유함으로써 주변 사람들이 더 좋아지는 게 보이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좋은 것을 나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무런 기쁨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부처, 예수, 공자, 소크라테스 등 현자들은 자기 인생의 안위만을 생각하지 못하고, 공동체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얻은 지혜를 공유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핍박으로 자신이 정말 힘들더라도 어쩔 수 없이 대중들을 위해 지혜를 공유한다.


하지만 여기서 의문이 제기된다. 차라투스트라가 지혜를 나누려는 시도가 진정으로 타인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나눔 자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자신의 고독을 극복하기 위한 개인적 욕망은 아닐까?


세상의 생각이 아닌 자신의 생각을 가지면 위험해진다. 고독과 지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위험은 현상계적 관점에서 위험이다. 영혼이 불멸한다는 관점으로 보면 다음 생은 자신이 이번 생에서 고독하게 닦은 영성적 지혜로부터 시작할 수 있기에 엄청난 축복이라 할 수 있다.


고독을 즐기느라 지루함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니체는 고독과 지낸 첫 10년은 지루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결국 그도 너무 많은 꿀을 모은 꿀벌처럼 넘치는 지혜에 싫증 났고 자기에게 도움을 요청하라고, 고독에서 벗어나겠다고 선언한다. 여하튼 닦는 자에게 고독은 필수이지만, 고독이 사유로 전환되면 내려가야 할 때가 찾아온다.


고독은 시작에 불과하며, 그것은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며, 그 깨달음은 나눌 때 비로소 온전해진다. 고독은 축복이지만 그 축복을 나눌 때 인간이 진정으로 완성된다고 말하고 있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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