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에서 피가 난다.
꽈당 ~~~
완전 새게 넘어졌다. 아프다.
건널목, 차들도 모두 멈춘다.
아주머니 한 분과 나, 둘 뿐이다. 한가한 오전 9시 20분이다. 이어폰으로 강의를 듣는다.
초록불이 켜지자 난 첫 발걸음을 내딛는다.
아차~ 작은 돌부리에 걸린다. 완전히 꽈당하며 넘어진다. 손바닥에 피가 난다. 쓰라리다. 창피하다.
겸연쩍게 아픔을 참고 옷을 털면서 일어난다. 건널목에서 기다리는 버스 안에는 4~5명이 있다. 버스 안 한 아이와 눈이 마주친다. 그 아이는 그냥 멀뚱이 볼 뿐이다. 난 빠르게 건널목을 걷는다. 연신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면서.........,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이렇게 완전히 꽈당~하며 넘어진 기억은 신선할 정도로 오랜만이다. 순간 중심을 잃고, 땅바닥과 만나는 그 찰나적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 글을 쓰고 있다. 아주 짧게 ‘어~~’라는 작은 비명과 함께 땅을 만났다.
죽음에 대해.......
손사래 친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말이 씨가 된다’ ‘죽음 그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나도 죽음이 두렵다. 정확히 말하면 죽음으로 인한 중단이 두렵다.
죽음 이후 뭔가가 있지 않을까? 난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불쾌하지 않다. 너무나 자명한 이야기고, 그 이야기를 할수록 현생을 잘 사는 법을 알 수 있다. 아니면 최소한의 힌트는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아마 세상의 수많은 현자들은 죽음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예전엔 삶과 죽음을 이렇게 생각했다.
‘그냥 태어나서 살다가 그냥 가는 거다. 이게 삶이다. 나무처럼, 개미처럼’
근데 세상은 너무 정교하다. 그냥 왔다가 그냥 가기에는 너무나 정밀하다. 일체의 오차도 없이 움직인다. 정확하다.
절벽에서는 반드시 떨어진다. 불에 손을 넣으면 언제나 화상 입는다. 상대방을 위한 일을 해주면 상대는 좋아한다. 상대가 싫어하는 일을 하면 상대는 반드시 싫어한다. 단 한번이라도 이런 법칙들은 어긋나지 않는다. 그냥 왔다가 그냥 가는 것이 삶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명확한 인과법칙이 있고, 너무나 신비로운 자연현상과 아름다운 자연풍광도 보여준다. 진짜 치밀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 같다.
진짜 우주는 왜 생겨났을까?
인간은 왜 생겨났을까?
우리의 임무는 무얼까? 단지 살아가는 일일까? 모르겠다. 태어났으니 살아가는 일이 아마 가장 중요한 일일 것이다.
‘잘사는 법을 아는 사람이 잘 죽는 법도 안다.’
이 말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죽음 이후를 이야기하는 것은 명료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기에 현재를 잘 살면 그만이다. 명료하지 않은 죽음 이후 보다는 명료한 현재에 집중하라 의미 같다.
톨스토이는 죽음을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육체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면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이 정신적 존재이며 육체는 그저 정신의 덮개에 지나지 않는다면 죽음은 하나의 변화일 뿐이다.
그릇에 담긴 물이 그릇의 형태를 하고 있는 것처럼 육체는 신과 연결된 영혼을 제한시킨다. 그릇이 깨지면 물은 그릇의 형태를 버리고 흘러가며, 그 물이 어떤 다른 것과 더불어 새로운 형태를 이룰 것 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물은 다른 그릇에 옮겨 담으면 물의 형태가 새로운 그릇의 형태로 바뀐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다. 이처럼 우리의 육체가 죽은 후에 영혼이 변화할 것이라고 가정할 수는 있지만 살아있는 우리가 죽은 후의 세상을 단정 지어서 이야기할 수는 없다.”
톨스토이는 육체를 그릇에 비유한다. 또 위 문장에서 그릇을 만나는 과정이 운처럼 묘사된다. 그릇의 모양은 우리가 현생에서 지은 수많은 업의 영향으로 모양이 바뀐다. 난 이렇게 생각한다.
또 죽은 후 영혼이 변화할 수 있다? 이건 또 다른 의견이다. 내세에서도 업을 짓는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죽은 후 내세에서도 육체 또는 뭔가가 있어야 업을 짓을 수 있다. 정신은 육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다시 태어나 육체의 옷을 입든지, 내세에서 육체의 옷과 비슷한 것을 입고 행동하든지..............
‘어~’ 라는 작은 비명이 손바닥의 쓰라림, 그리고 죽음까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