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낀 호숫가에서
호수 위로 짙은 안개가 깔렸다. 잔잔한 수면 위에는 바람 한 점 없이 새벽의 고요가 내려앉아 있었다. 나뭇가지에서 마지막 남은 단풍잎 하나가 빗방울에 젖은 채 바닥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조용한 물가를 따라 J와 ‘빛’이 나란히 걸었다. 새벽 햇살이 안개 너머로 아스라이 퍼지고 있었다.
J가 입을 열었다.
“빛, 언젠가는 우리가 지구를 벗어나 태양계를 거느리는 존재가 된다고 했잖아. 그때 우리는, 정말로........ 다 이룬 걸까?”
빛은 발걸음을 멈추고, 호수 쪽을 바라보았다. 수면에 비친 안개는 마치 다른 세계의 입구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이 오겠지. 영원의 의자에 앉는 순간.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순간에 도달했는지가 아니라, 그 순간에 걸맞은 존재가 되었는가야.”
J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빛은 이어 말했다.
“우리는 단지 세상을 견디기 위해 성장하는 게 아니야. 우주의 시민권을 얻기 위해, 신의 큰 설계도 속에서 소임을 다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성장하는 거지.”
J는 다시 아리송한 얼굴로 질문했다.
“우리는 이미 우주의 일부라고 했잖아. 그렇다면 지금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도 결국은 도착할까?”
빛은 가볍게 웃었다. “그렇지. 지금은 감옥을 안방처럼 드나들고, 타인의 고통을 무시한 채 사는 사람도 언젠가는 우주의 모범 시민으로 거듭나게 돼. 자연은 그들이 도착할 때까지 채찍질을 멈추지 않아. 고통과 시련은 사실, 큰 목적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한 훈련이지.”
잠시 고요가 흘렀다. 호수 위를 흰 새 한 마리가 가르며 날았다. 그 모습에 J는 입을 다물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우리는 마치....... 미처 자각하지 못한 태양 같아.” J가 조용히 말했다. “빛, 정말 우리가 언젠가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이미 되고 있어. 지금도 네 몸 안에서는 수백억의 생명체가 너에게 의지해 살고 있지. 네가 웃으면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네가 분노하면 그들은 병들어 죽어. 넌 이미 하나의 세계를 다스리고 있는 존재야.”
J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마치 그 안의 생명들과 대화를 나누듯.
“그렇다면 우리가 저지른 모든 실수도....... 다 대가를 치르게 되는 거야?”
빛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지만 기억해. 치명적인 실수는 없어. 영원히 길을 잃고 헤매는 영혼은 없어. 누구나 가야 할 길이 있고, 다만 속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다른 영혼들보다 늦을 뿐이야.”
“그러면 결국 모두가........ 도달하는 거네!”
빛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래, 어떤 신비주의자는 두 번의 신비체험을 통해 그런 장면을 보았다고 하지. 하지만 그는 그 장면을 끝내 말로 표현하지 못했어. 인간의 감각은 영원을 온전히 담아내기엔 너무 작거든.”
J는 손끝으로 호수 위의 물결을 건드렸다. 일렁이는 물결 위에 가늘게 햇살이 비쳤다.
“빛, 만약 우리가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라는......... 그 사실은 왜 그렇게 중요할까?”
빛은 물끄러미 J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야 우리가 지금 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분명해지기 때문이지. 만약 죽음이 끝이라면, 대충 살고 떠나면 그만이야. 하지만 네가 끝없는 존재라면, 너의 모든 행동은 너의 영혼에, 우주에, 그리고 언젠가 만날 또 다른 너에게까지 영향을 주게 되지. 불멸은 책임이야. 지금의 선택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
J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차가운 가을 공기 속에 무언가 맑은 울림이 있었다. 그는 나직이 말했다.
“결국 선하게 살아야 할 이유는.......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네. 그리고 언젠가 만날 나를 위해.”
빛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선함은 신의 요구가 아니라, 자신의 본질로 돌아가는 길이지.”
안개는 조금씩 걷히고 있었다. 호수 건너편의 능선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순간, J는 문득 알 수 없는 확신이 들었다. 모두가 반드시 언젠가 도달할 것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