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오래전에 행한 선의 보상도 받는다

by 정강민

장마가 끝난 오후, 하늘엔 구름이 걷히고 햇볕이 사정없이 내리쬐고 있었다. 논두렁 사이를 걷는 J는 손수건으로 이마에 땀을 닦으며 말했다.

“후… 비 그치니까 바로 더워지네. 숨이 턱턱 막혀.”

빛은 처마 밑 평상에 걸터앉으며 웃었다.

“그래도 이맘때 햇살은 축복이야. 비로 씻긴 세상이 햇살에 다시 구워지는 시간이지. 너도 카르마란 게 이런 거라고 생각해봐.”

J는 생수병 뚜껑을 열고 목을 축이며 물었다.

“뭔 소리야, 갑자기?”

“카르마는 말이야, 저주 같은 게 아니야. 그냥 지난번에 못 끝낸 숙제 같은 거지. 오늘 못 한 일은 내일 해야 하듯이, 전에 못 푼 일은 지금 풀어야 돼. 언제든 마무리될 때까지 따라오거든. 빚이 있으면 어떻게든 갚아야 하듯이.”

“그래도 사람 마음이, 과거에 한 실수는 그냥 묻어두고 싶을 때가 많아. 괜히 끄집어내면 더 괴로워질 것 같고.”


빛은 부채로 바람을 일으켜 얼굴의 땀을 식히며 말했다.

“그게 바로 괴로움의 본질이야. 숨기고 외면하면 더 깊어진다. 반대로 인정하고, 책임지려는 순간 괴로움은 가벼워져. 카르마는 누가 우리한테 던져주는 형벌이 아니라 우리가 만든 공과금 고지서야.”

J가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그럼 나는 얼마나 남았을까, 내 영혼의 공과금은?”

“그건 아무도 몰라. 너도 몰라. 너가 이번 생에 진 빚은 다 기억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전생에서 어떤 빚을 졌는지까지는 기억하지 못하기에 너도 알 수가 없어.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있어. 너 지금 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거. 그 자체가 이미 빚을 갚는 중이라는 증거야.”

J는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새로운 빚을 만들지 않는 것도 중요한 거겠지?”

“정답. 더는 실수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면, 이미 큰 걸 이룬 거야. 성장은 ‘짐이 없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짐을 다룰 줄 안다는 뜻이니까.”


잠시 불어온 바람에 나뭇잎이 우수수 소리를 냈다. 장마 후의 습한 공기 속에서도 작은 쉼이 느껴졌다. J는 그 바람을 얼굴로 받으며 물었다.

“근데… 오래전에 한 좋은 일도 언젠가는 돌아올까?”

빛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빚만 있는 게 아니야. 예전에 베푼 선의도 반드시 돌아와. 문제는 우리가 그걸 기억을 못 한다는 거지. 이번 생은 그럭저럭 기억해도, 전생은 전혀 기억할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막막한 상황에서도 뜻하지 않게 도움을 받는 일이 생기는 거야. 그게 바로 오래된 선한 씨앗의 결실이야.”

J는 평상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계속 선하게 살아야겠네. 지금 이 순간도 어딘가에 저장되고 있는 거라면.”

“맞아. 너의 오늘이 내일의 운명을 만든다는 말, 그게 그냥 말장난이 아니야. 그걸 성찰하는 것도 중요하고.”


빛은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세상은 고통스럽다고만 생각하면 진짜 견디기 힘들지. 하지만 정직하고 단순하게 살아가면, 의외로 괜찮은 곳이야. 너는 이미 그쪽으로 걷고 있는 중이야. 그러니까 잊지 마. 고통은 채무고, 선행은 예금이야. 삶은 그 둘의 잔고를 매일 갱신하는 은행이지. 가끔 고통이 진 빚을 갚는 게 아니라 예금처럼 쌓는 일도 있기는 하지.”

J는 눈을 가늘게 뜨고 멀리 번져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빛, 너랑 이야기하면 늘 마음이 환기되는 기분이야. 비온 뒤 하늘처럼.”

빛이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다.

“그리고 지금 넌 물에 젖어 축축한 빚을 뜨거운 햇볕으로 말리는 중이야. 잘 마르면 더 단단해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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