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나 나나 내 돈 주곤 못 마시는 것
보르도 와인 샤또 마고 / 정건우
김 과장이 주뼛한 표정으로 결재판을 펼쳐놓는 것이었다. 지출결의서였다. "엘레강스?" "예, 와인바입니다" "응?, 와인을 70만 원어치나 마셨단 말인가?" "아닙니다. 두 잔 마셨습니다" "그래?"나는 호기심이 발동해서 잔뜩 긴장한 김 과장을 앉게 하였다. 꼴랑 와인 두 잔에 70만 원이라니. 황당한 회계에 간밤의 김 과장 무용담이 궁금해졌다. 거래처 P 건설의 까탈스럽다는 J 부장 팀 접대를 주당인 김 과장에게 맡겼던 터였다. 얘긴 즉, 저녁 식사에 의외로 J 부장이 참석하였고, 식사 비용을 그가 지불했다는 것이다. 난감해진 김 과장이 그를 붙잡고 현란한 개인기를 펼친 끝에 단 둘이서 와인바에 가게 되었다는 시말이다. J 부장이 와인에 상당한 조예가 있는 마니아급으로 보였다는 정보가 나는 매우 흡족했다. "와인 이름이 뭐였나?" "샤또 라투르라고..."김 과장이 메모지를 펴보며 말했다. 역시 치밀한 친구였다.
당시 회사는 P 건설이 계획 중인 대규모 프로젝트에 출사표를 던지고 물밑 작업을 진행할 때였다. 프로젝트의 핵심 PM 부서가 J 부장 팀이었는데, 그와 나는 지나치며 인사나 할 정도로 안면만 트고 있던 사이였다. 따라서 나는 주요 파트너가 될 J 부장에 대해 알아야 했고, 평소에 그의 실무자와 교류가 잦았던 김 과장 일행을 탐색 선발대로 보내 간단한 접대를 지시했었다. 그러던 차에 김 과장이 아주 주요한 정보를 몸으로 습득했던 것이다. 김 과장 전언에 따르면 J 부장은 FM에 가까운 업무 스타일에 대인 관계의 폭이 좁고, 술을 거의 안 하지만, 와인엔 특별한 관심과 조예가 있는 다소 까다로운 성격의 소유자란 것이었다. 그가 술을 즐기지 않는다는 말에 나는 쾌재를 불렀다.
나는 체질상 술을 잘 못한다. 알코올 분해 효소, 이른바 아세트알데하이드 분해 효소가 정상인의 삼분지 일도 안 된다는 것이다. 거의 알코올 장애인 수준이라 했다. 내 주량은 최대 소주 두 잔이었고, 거기서 조금만 과해도 고꾸라지기 일쑤였다. 기도가 부어올라 숨쉬기가 어려웠다. 업무상 접대가 많았던 나는 내 핸디캡을 보완하는 다른 분야로 관심을 돌려 접대 분위기로 활용했다. 일찍이 사주와 풍수지리를 깊이 공부해 온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정서적 토대에는 문학이 있었다. 다소 고리타분한 사주, 풍수도 문학적인 맥락에서 풀어나가면 상당한 설득력과 흥미를 유발했다. 나는 그 파생 효과를 톡톡이 보았다. "한잔에 35만 원 하는 포도주라, 팔자에 없는 와인 공부를 해야겠네" 말뜻을 이해한 눈치 백 단의 김 과장이 활짝 웃는다.
다음날부터 와인 공부에 들어갔다. 그 분야가 엄청나게 방대해서 총체적 접근은 어려웠고, J 부장이 마셨다는 와인의 주변부터 더듬었다. 공부는 할수록 재미있었다. 그 와인에 샤또라는 명칭이 붙게 된 연유, 프랑스 남서부의 보르도라는 지명과 지롱드강 서쪽의 메독 지역 인근에서 샤또라고 통칭되는 세계적인 와인 브랜드가 생산되는 배경을 알게 되었다. 김 과장이 맛본 라투르는 메독 중심부의 포이약이라는 지역에서 생산된, 보르도 공식 최고등급인 프리미에 그랑크뤼 클라세(Premiers Gran Cru Classe)였다. 가격은 빈티지에 따라 천차만별이었지만 비교적 무난한 빈티지를 맛봤다는 걸 알게 되었다. 비싼 이유가 있었다. 이건희 회장이 가장 좋아했었다니 알만한 것이다.
또한 라피트 로쉴드, 무통 로쉴드도 알아주는 포이약 샤또이며, 마고 지역의 샤또 마고, 보르도 남부 그라브 지역의 오브리옹 또한 명성이 자자한 샤또로 위의 5개 브랜드가 당시 보르도 5대 샤또로 불렸다는 것이다. 나는 내친김에 와인에 대한 전방위적인 자료를 수집해 공부하였고 또한 틈틈이 포항의 와인바에 들러 각양각색의 와인을 시음해 보는 등 부산을 떨었다. 와인도 알코올 도수가 13~14% 정도 했었기 때문에 알코올 장애자인 나는 상당한 고역을 치러야 했다. 내가 지금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닌지 여러 번 후회도 했었다. 프로젝트는 일정에 따라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J 부장과 공식적인 식사를 몇 번하면서 대화 분위도 원만한 사이로 발전하였다. 드디어 기다리던 때가 왔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와인 공부에 푹 빠진 지 약 3개월 후, 추진 프로젝트에 대한 발주사 회의가 서울에서 열린다는 기별이 왔다. 당시 회사는 경쟁사와 공개입찰을 전제로 총력을 다하고 있었다. J 부장 주재로 업체 간 Proposal 관련 회의를 진행한다는데, 기술적 우위를 피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나는 서울사무소에 연락하여 괜찮은 와인바와 구매 가능한 최고급 와인을 알아보라고 당부하였다. 그리고 저녁 식사와 더불어 J 부장과 둘이 와인바에 가겠다는 계획 보고를 사장님께 올렸다. 부서원들의 완벽한 준비로 기술 제안 회의는 호평 속에서 무사히 끝났다. J 부장도 본인이 당부했던 보완사항을 충분하고 과감하게 채택한 회사의 결정에 상당히 흡족한 반응이었다.
나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식사 후 와인바 투어를 동갑내기 J 부장에게 권유했다. 뜻밖의 제안에 그는 "정 부장, 술 안 하시잖아?" 하며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래도 근사한 사람과 와인 한잔은 좋지"하며 나는 너스레를 떨었다. 내가 와인을 마신다는 게 그는 매우 신기하다며 흔쾌히 승낙하는 것이었다. 와인바는 압구정에 있었고, 준비 부탁한 와인은 샤또 마고 1990 빈티지였다. 당시 알아주던 빈티지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던 특급 와인이었다. J 부장은 놀란 눈을 한동안 깜빡이질 않았다. "자자, 그대나 나나 내 돈 주곤 못 마시는 것이니 천천히 향기의 여왕을 즐깁시다" 두 시간이 넘도록 둘은 와인 이야기에 까무룩 취했다. 이후 회사는 프로젝트를 수주하여 훌륭하게 마무리했고, 그즈음 나와 J 부장과의 심리적 거리는 한 뼘으로 좁혀 있었다. 당시 400만 원에 육박하는 지출결의서에 사인을 하시며 사장님은, 내가 김 과장에게 했던 질문을 비슷하게 하시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