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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May 16. 2021

여행지의 책들


집에 있는 젊은 도가 말했다. 엄마가 요즘 젊은이로 산다면 아마 인스타에 중독되었을 거라고. 인스타가 젊은 사람들만의 전용물은 아닐 테고, 해보지 않아 잘은 모르지만 감은 왔다. 사진 찍길 좋아하고 또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길 좋아하니까. 한때 왁자지껄한 세상에 섬처럼 지낸 적이 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스마트폰을 남들보다 늦게 손에 쥐는 바람에 한창 붐이 일었던 단톡 방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했다. 따로 연락을 받아야 하니 상대방이 불편해했다. 매니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마침 공짜 폰도 생겨 스마트한 세상에 합류하게 되었는데,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새는 줄 모른다고 무한정 찍을 수 있는 디카 기능에 그만 빠져 버렸다. 걸핏하면 형제들 단톡 방에 사진을 올리는 바람에, ‘쟤, 왜 저러니???’ 같은 무언의 메시지를 받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요며칠 때이른 여름 날씨가 소나기같이 몰려와 여행의 추억이 스멀 올라온다. 여름에만 여행을 떠난 건 아니지만 덥다고 온데 창문을 열어 놓으니 들리는 무질서한 소음들과 미지근한 바람결이 어느 낯선 거리로 데려간다. 인스타 감성을 발휘하자면 그곳의 멋진 풍경을 배경으로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아련한 뒷모습을 찍어 올려야겠지만 … 요즘 젊은이가 아닌 나는, 대신 여행지에서 만난 감성 책들을 내 맘대로 소개하고 싶다. 기념품처럼 꽂힌 그 책을 보면 그곳의 작은 책방과 주변이 환하게 살아난다. 멀리서 데려온 것부터 올려 보자면


이 책은 독일 프라이부르크 보봉마을 근처 큰 느티나무 그늘 아래 열린 벼룩시장을 갔다가 발견한 그림책이다. 펼친 순간 그림이 무척 마음에 들어 좀 많이 낡았지만 내용 불문하고 데려왔는데 알고 보니 조금 특별한 책이었다. 1960년대 동독에서 초판이 발행되었고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그림형제 버전 <들장미 공주> 이야기였다. ‘레진 그루베 하이네케’ 라는 일러스트 작가도 동독에서 대단히 유명한 사람이어서 그림만으로 충분히 가치가 있을 거라 어림짐작했던 게 거의 맞았다. 화려하면서 환상적이고 해학적인 그림이 정말 일품이다.



요즘 개성 있고 아기자기 한 독립 서점들이 전국에 많이 생겼다. 작은 책방에 가면 꼭 책 한 권은 사는 게 예의라고 한때 작은 책방에 근무한 사람으로서 지인들을 종용한다.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 가면 구멍가게 같은 <소심한 책방>이 있다. 휑한 시골 마을에서 이 책방을 찾기위해 두리번거리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어떤 여인을 발견하고 책방지기일 것 같아 따라 갔는데 맞았다. 파란색 표지 그림이 들어와 고른 책이다. 마침 그때 다윈을 알아가던 중이었고 아내 엠마와의 러브 스토리라니, 아내가 된 사람과의 러브 스토리, 긴장감은 없지만 뭐. 역시 읽다 말아 내용은 아직 다 모른다. 다윈에게 아내 엠마가 중요한 사람인 건 분명하다.




경남 통영에 가면 <남해의 봄날>이라는 출판사와 책방이 있다. 지방 출판사임에도 꾸준히 좋은 책들이 나오고 있고 근처 책방도 이름처럼 나지막한 건물이 따뜻한 봄날 같은 외양으로 여행자들을 불러 모은다. 근처 미술관, 음악당 등 문화, 예술적으로 풍성한 이 바닷가 마을 책방에서는 요런 책을 사게 된다. 가볍게 청량하게.

 



충북 괴산 칠성면 산골 마을에 가면 <숲 속 작은 책방>이라고 피터래빗이 튀어나올 것 같은 책방이 있다. 북 스테이도 하는 이곳은 아주 성황리에 영업 중인 것 같던데 외진 그곳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신기할 뿐이다. 주인장 부부는 유럽의 오래된 책마을, 동화마을을 답사하고 서울에서 이곳으로 내려와 꿈꾸던 공간을 마련했다. 이들에게 영감을 준 책이 이 책이라 해서 냉큼 사 왔다. 도서관에서 읽은 적 있지만 현실화된 책방을 보고 오니 새로웠다. 책방에 대한 꿈은 없지만 세계 곳곳의 책마을을 여행하고픈 꿈은 생긴다.




충남 홍성에 가면 홍동마을이 있다. 풀무학교라는 농업 중심 대안학교를 중심으로 원주민과 대안적인 삶을 지향하는 외지인들이 어울려 사는 곳인데 그곳에 ‘그물코’라는 작은 출판사가 있고 옆에 '느티나무 헌책방'이라고 무인 책방이 있다. 지금은 안타깝게도 문을 닫았다 한다. 책방지기가 없는 그곳에서 아름다운 부부의 합작품인 이 책을 만났다. 남편이 쓴 글에 아마추어인 아내가 색연필로 그림을 그렸는데, 전문가가 그린 그림보다 훨씬 따뜻하고 정감이 있다. 알고 봤더니 이 부부가 근처 경기도 광주에서 자기들 서재를 오픈한 도서관 <책 읽는 베짱이>이란 공간을 꾸리고 있었다. 곳곳에 이런 문화적인 공간, 사람들이 있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가장 최근에 다녀온 당진 면천면에 가면 <오래된 미래>라는 자전거포를 리모델링한 멋진 책방이 있었다. 들어가 보니 원래는 한옥이었는지 천장 서까래가 멋스럽고 2층으로 올라가니 헌책들 속에 <채링크로스 84번지>가 눈에 띄었다. 마침 그 무렵 브런치 작가님들 통해 이 책에 대한 특별한 이미지가 생기고 있었는데 운명적으로 그곳에서 딱 만났다. 주인장 책이라고 안 판다는 걸 억지로 얻었고 그걸 또 사진 찍다가 거기 두고와 결국 우편으로 받은 귀한 책이 되었다. <바다 마을 책방 이야기>는 앞에 소개한 <남해의 봄날> 책방 스토리가 만화로 된 책이 있어 가져왔다. 표지 그림의 부인은 마을에 사람이 점점 줄어 이사까지 생각할 때쯤 옆집에 생긴 책방 때문에 다시 행복해진 사람이다. 부인의 모습에 나를 넣어 본다.




속초 시내에 가면 백 년 가게로 지정된 <동아 서점>이 있다. 제법 큰 서점이지만 3대째 유지를 하고 있는 모습이 큰 나무를 보는 듯했다. 시내라지만 한산한 거리에 있는 세련된 서점에 들어가 보니 주인장의 꼼꼼한 손길이 느껴질 정도로 규모 있는 곳이 아기자기하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연로한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중년의 아들 모습이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이 곳에서 도감 같은 이 책을 거금을 주고 샀다. 두고두고 볼 책이다.






지금까지 소개한 책방과 책들에 대한 나의 근간은  부산에 있는 어린이 전문서점 <책과 아이들>이라는 곳에서 생겨났다. 그곳에서 보낸 책방에서의 한 시절은 갈 길 몰라 헤매고 있던 내 인생을 잡아준 묵직한 지점이다. 결코 빼고 싶지 않은 지점이면서 다시 돌아가고 싶지도 않은 그곳, 한 시절이어서 고마운 그곳, 미야자와 겐지의 <은하철도의 밤>이 환상적인 연극으로 살아난 그곳, 그곳에서 얼마 전에 책방 이야기를 아홉 편의 동화로 역은 책이 나왔다. 한 때 책방의 일원이었던 사람으로서 읽으니 알수 없는(사실은 알고있을)눈물이 난다.

 6월이면 그곳 마당 한편에는 파란 수국 무더기가 집채만하게 필 것이다. 백년 가게처럼 대를 이어 책과 아이들이 노니는 장소로 영원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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