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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Apr 09. 2021

벚꽃 옆에 배꽃이 있었다

용천리 돌배나무 이야기


나는 나무가 좋습니다

                           -오순택-


나는

나무가 좋습니다.


혼자 서서

생각하는 나무


새가 날아와

가지에 똥을 누고 가도

바람이 잎을 마구 흔들어도

말없이 서서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나무


나무의 몸에

가만히 등을 기대면


따스한 체온이 묻어나는 것 같고

잎을 만지면

손은 온통

초록물이 드는 것 같은

나무


나는

나무가 좋습니다.

        - 시집 <해바라기 얼굴> 중 -


이 시를 적어놓고 나무를 기다렸다. 지나간 나무 사진들을 들추어 보고 길가다 덩치 큰 나무만 보면 달려가 사진을 찍고 무슨 나무인지 가늠해보고 찾아보고, 그 곁을 서성거렸다. 갤러리 앨범에는 나무 사진들이 쌓여갔지만 이야기는 좀처럼 따라오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지난 늦겨울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덕소를 벗어난 벚꽃길을 알아보다 인근 양평에 제법 많은 장소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게다가 고도가 높은 지역이라 늦게 피고 사람들이 부러 찾아오기 쉽지 않은 한적한 곳이다.  급 호기심이 당겨 운씨를 주말마다 꼬드겨 사전답사를 시작했다. 주로 산골마을을 통과해 큰 재를 넘는 장소였는데 비록 온 천지가 잿빛으로 황량했지만 이미 마음은 나뭇가지에 팝콘 터지듯 하얀 꽃이 피고 벌들이 왕왕거리는 그날로 달리고 있었다. 여기도 벚꽃, 저기도 벚꽃! 혼잣말처럼 연신 중얼대는 소리에 말수 적은 운은 힐끔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앞만 보고 운전을 한다.


남쪽 지방부터 전해오는 이른 꽃소식에 마치 여행 떠나기 전 설렘으로 3월을 보내고 동네 꽃들이 약속이나 한 듯 한꺼번에 터진 와중에 4월을 맞았다. 둘째 주, 드디어 때가 왔군! 양평으로 가야 할 때다. 출사지는 옥천면 용천리 마을을 통과해 설매재 고개를 넘기 직전까지 길이다. 운은 자전거로 먼저 출발했고 나는 경의중앙선을 타고 오빈역에서 만나 자전거 뒷자리를 얻어 타기도 걷기도 하면서 용천리 마을 입구로 들어섰다. 이미 거기까지 오는 길에도 벚꽃이 즐비했지만 용천리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좀 더 빼곡히 늘어선 벚나무 가로수 옆으로 산에서 내려오는 냇물이 합세해 산골마을 봄의 정취를 흠뻑 풍긴다. 넋이 빠져 있는데 나무 밑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던 운이 벌써 돌아가잔다. 자전거 전용로가 아니라 위험하고 똑같은 벚꽃길이 이어질 뿐이니 그만 봐도 된다고. 받아들일 수 없어 혼자 걸어가기를 시도했지만 기다리고 있을 운이 신경 쓰여 곧 내려왔다. 운이 찍어 준 사진엔 주변 정취는 없고 세월을 머금은 내 얼굴만 크게 나왔있다...


젊은 도가 벚꽃 사진을 보더니 자기도 가고 싶단다. 웬 떡이냐! 마다할 일 전혀 없지. 이번엔 도가 모는 차를 타고 쭉 올라가는데 운이랑 본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굽이굽이 끝없이 이어지는, 올라갈수록 더 신선한 벚꽃의 향연에 하얀 구름 속을 통과하는 듯 온 기운이 부웅 솟아올랐고 눈은 바빴고 입은 연이어 벌어졌다. 더 감격스러운 건 젊은 도가 같이 호응했다는 것이다. 아니 더, 이렇게, 우왕~~~~~.

그때 벚나무들 안쪽으로 왠지 ‘군계일학’ 포스의 사뭇 다른 분위기 나무가 스쳐갔다. 초록잎과 흰꽃이 어우러진 아름드리나무였다. 좀 더 올라가니 한그루 더 있었고 내려오는 길에도 눈길이 머문다. 드라이브에 안주하며 마을로 그냥 내려왔다.


서울에서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친구, 이름처럼 하늘하늘 한 나리를 불렀다. 이른 봄부터 최고의 벚꽃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했기에 예정된 만남이다. 마음 따라 용천리로 또 향했다. 아름드리나무가 계속 삼삼했기 때문이다. 어머, 쓰앵님, 도대체 여기가 어딥니꺼?!!! 를 연발하는 나리 반응에 흐뭇한 마음 배가 되어 아름드리나무를 또 스쳐 지나갔고 내려오며 한번 가까이 가봐야겠다 결심했다. 좁은 2차선 산길이라 마땅히 주차할 공간이 없어 만남이 쉽지 않다. 그런데... 뜻이 있으면 정말 길이 있어 내려오며 자세히 살피니 가까이 있는 집이 빈집이고 마침 옆에 공터가 있다. 주차를 하고 단박에 계곡으로 내려갔다. 가까이서 보니 멀리서 본 것보다 훨씬 아름답고 젊었다. 사과꽃이다!?? 꽃을 이렇게 많이 피우는 사과나무라니! 나무 아래서 나리와 난 진짜로 넋을 잃고 말도 잃었다.


곧 나리는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미술을 전공한 나리는 남다른 감각으로 비록 핸드폰일지언정 빛과 각도를 잘 잡아 나무 그대로의 모습을 담기 위해 애썼다. 그 옆에서 난.... 벅찬 기분을 누를 길 없어 차마 글로 옮길 수 없는 몸짓을 하며 까불었다. 계곡엔 우리밖에 없었다.








2021년 4월 8일 오후 모습






한참 계곡이 떠들썩하게 나무랑 놀다가 꽃이 떨어지면 곧 맺힐 열매를 상상했다. 정말 사과?가 꽃송이만큼 달릴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정확한 나무이름을 알기 위해 *야모 앱에 올렸다. 놀랍게도 #돌배나무라고 알려준다! 음,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 고향집 마당에 한그루 있었던 청배나무 이파리랑 꽃이 닮았다.  박완서님의 <그 많은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에서는 '열매 맛은 별로지만 꽃이 장한 돌배나무'라는 구절이 있더니... 야생의 배나무는 이렇게 크고 꽃이 많이 피구나. 언젠가 무지 막혔던 쌍계사 십리벚꽃길 옆 과수원 배나무가 생각났다. 수확을 위해 가지를 벌려 묶어 키를 낮추고 공장 제품처럼 똑같은 모습으로 서있던 배나무들. 먹고 사는 일은 이렇게 다른 생명에게 죄짓는 일이구나. 고문을 당해도 계절은 어쩔 수 없어 환호하는 하얀 벚꽃길 옆 하얀 배꽃은 숨죽여 있었지. 오늘 만난 돌배나무는 과수원 배나무들 설움을 씻어주기라도 하듯 벚나무들 사이에서 전혀 기죽지 않고 본연의 모습으로 화려한 꽃을 뽐내며 당당하게 찬란하게 서 있었다.


식물도감에서 열매는 둥근 모양으로 다갈색이며 10월에 익는다, 열매는 식용이 가능하다, 산에서 자란다, 저습한 계곡을 좋아한다, 로 나온다. 거의 99% 돌배나무로 생각하고 100%를 위해 10월을 기다려 보련다. 아니 그 전에, 봄이 무르익고 온 대지가 후끈 달아오를 때 잎이 또 얼마나 성성할지 나리랑 보러 오기로 했다. 우리들 나무로 정한 날이다. 자연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우리는 자연 앞에서 평등하니까.


기다리던 나무가 이렇게 찾아왔다. 이야기를 담고서. 느닷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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