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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Sep 14. 2020

미세스 홍당무

어느날 아들이 이런다. 엄마, 외갓집 식구들은 모이면 싸우는 것 같아.  

.... 이제 너도 알아버렸구나....


외갓집 식구들, 그러니까 내 친정식구들은 모두 목소리가 크고 성격이 급하여 감정이 소용들이 치면 울그락불그락 얼굴에 숨김없이 드러난다. 세명의 오빠들 중 3분의 2가 어릴 때 말을 더듬었다. 하고 싶은 말이 안 나와 상기된 얼굴로 머리를 흔들어대던 오빠들 모습은 어린 동생이 보기에도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했다. 어른이 되어 말더듬을 고친 오빠는 말수가 엄청 줄었고, 아직도 조금 남아있는 오빠는 말을 여전히 같은 양으로 하고 있다. 이런 기질이 여성들에게는 갱년기 증상과 연관이 있지는 의학적으로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나보다 14살, 7살 많은 두 언니는 얼굴 홍조로 고초를 겪었다. 그 시기에 진입하고 있는 나도 전조현상이 나타나고 있어 살피는 중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에 벌써 전전 전조 현상이 있었던 것 같다. 차가운 데서 따뜻한 곳으로 간다거나, 어른들 앞이나, 밀폐된 공간에서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 기억이 있다. 공간이나 기온 차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사람 앞에서는 부끄럼이 많은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꼭 그런 이유가 아님을 살면서 알게 되었다. 전화로 대화해도, 물론 오래 붙잡고 있을 경우다, 글을 쓸 때도,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도, 긴장감이 고조되거나 벅찬 장면을 맞닥드리면 혼자 얼굴이 더워진다. 이런!


그래서 믿거나 말거나 이런 결론을 내렸다. 이건 감정, 환경만의 문제가 아니고 체질의 문제구나. 분명 얼굴, 뇌의 실핏줄이 남들보다 표피가 얇아 쉽게 달구어지고 두께도 0.000 어디쯤 좁아 산소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여 두통도 잘 오고 외부, 혹은 감정의 자극에 쉽게 반응이 된다는 것. 결국 이런 체질은 성격과도 연관이 있어 어떤 상황에 진중하지 못하고 쉽게 흥분하여 감정을 표출하고야 마는 가족의 기질과 딱 맞아떨어진다.

성취를 위한 공부는 되지만 생각하고 곰삭히는 공부는 하기가 어렵겠다. 모두 그러했다. 머리가 자주 뜨거워지면 건강에 해로울 것이기에 몸 따라 생태도 결정되는 것이다. 몸을 역행하는 생태를 가지면? 사람이기에 가능할 수는 있겠지만 뭔가 부작용이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부모님의 삶이 다시 보였다. 물론 성장과정, 사회적인 분위기가 당신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겠지만 순전히 뇌의 관점, 기질의 관점에서 말이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열악한 실핏줄로 인해 몰려오는 현실적인 문제들의 위압감이 배로 느껴진 듯, 고민보다는 바로 뛰어나가 본인이 모든 걸 해결하기 위해 늘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였다. 계획이 어느 정도는 통하는 시대였으니까. 불안심리에 과도한 책임감이 결합되면 엄청난 생활력으로 나타난다. 개성이나 자의식이 발달되지 않았고 중시되지 않았던 시대를 산 형제들은 그 덕분에 물질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이 어른이 되었으나 자신에 대한 치열한 고민 없이 나이, 경제력만 어른이 된 이들은 나름 또 고충이 있게 마련이다. 암튼 늘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아버지는 밥, 커피, 과일을 함께 차려놓고 연달아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었고, 꽃게탕은 천하에 화만 돋우는 몹쓸 음식이었다. 자식들 뒷바라지에 얼마나 열과 성의를 다하셨던지 막내인 나를 시집보내고는 그만 그 허탈감에 우울증까지 왔었다.


엄마는 아버지와는 사뭇 다르게 열악한 뇌순환의 문제를, 현실에서 살짝 벗어나는 자기만의 은신처를 만들어 달래며 살았다. 그것은 일과 노래였다. 억척같은 밭농사가 필요치 않은 형편인데도 집에서 멀직이 떨어진 밭을 오롯이 혼자 일구며 채소와 곡식을 돌보러 집을 나섰다. 위장병 때문에 밥을 못 먹을 때는 주전자에 멀건 흰 죽을 담아서 나갔고, 아기는 밭두렁가 바구니에 담아두고 혹시 뱀이나 벌레들이 물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풀을 맸다. 그때 흙냄새 풀냄새가 몸 어딘가에 배여 버렸는지 난 그 냄새들이 친근하고 향기롭다. 통통하고 기름진 참깨 벌레를 뙈약볕 아래서 한 마리 한 마리 잡던 여름의 시간들, 또 작은 꼬투리에서 진짜 깨알을 털어내던 가을의 시간들은, 몸은 힘들어도 가부장적인 아버지로부터 숨죽여 살아야 했던, 지금도 울화병이 있는 엄마에게 몰아(沒我)의 시간, 본인도 알아채지 못한 명상의 시간 이었으리라. 밭일이 집안일보다 좋을 때는 이유가 있다.


일보다 더한 은신처는 노래, 트로트 가요다. 90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너덜너덜한 종이에 꼬불꼬불한 글씨로 베스트 30을 적어 노래방 가는 걸 좋아한다. 효자, 효녀의 기준은 노래방을 데리고 가느냐 마느냐이고. 요즘 같은 트로트 시대, 엄마는 물 만난 고기다. 전화를 걸면 쿵작쿵작 배경음악에, 니는 이것도 안보나 끊어라, 다. 시시때때로 오는 통증과 외로움, 우울감에 밥맛이 없다고 소리치고 밥 먹는 걸 게을리 하지만 꼬부라진 허리로 여전히 혼자 밭일을 하고 혼자 가쁜 숨으로 노래를 부른다.


혼자만의 세계에 몰입하는 성향만 보면 난 엄마 쪽에 가깝다. 품목이 책과 글쓰기라는 게 문제다.

 속 여러 세상을 들락거리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걸 조금 알아버려 웬만한 일엔 흥분을 잘하지 않지만  아버지가 그토록 중이 여겼던 돈, 버는 일을 등한시하고... 다행히 쓰는 재미도 모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기쁜 일이기도 하다. 대신 혼자 하는 책 읽기와 글쓰기로 종교생활 비슷하게 하고 있다. 분명 이건 가족력, 몸을 역행하는 생태다. 증거가 있다. 얼마 전 미용실에서 뒷머리를 들추다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머리카락 안쪽이 거의 반백이 되어 있었다. 앞에만 살짝 새치 염색하고 뒤에는 신경 안 썼더니 많이도 세어 있었다. 형제들 중 막내인 내가 흰머리가 제일 많을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또 이런 결론을 내린다. 뇌 용량에 맞지 않은 과도한 생각으로 얇은 실핏줄을 자주 뜨겁게 해 얼굴도 홍당무가 되고 머리도 세어 버렸다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목 위는 열불 나고 있다. 그런데 어쩌랴. 조만간 머리카락이 파뿌리처럼 된다 해도 글쓰기를 멈출 수 없고 멈추고 싶지 않은 걸.


생각을 쉬고 머리 열을 내린다는 명상을 좀 알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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