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 가는 길이다.
어르신은 지하철뿐 아니라 공항철도 일반은 무료다. 돈암동 집에서 인천공항까지 1시간 45분이 걸린다. 서울역에서 환승할 때 직통열차를 이용하면 시간은 17분 정도 단축할 수 있지만 요금을 내야 한다. 방랑길을 떠나는 것이라 시간단축은 내게 별 의미가 없다. 직통열차는 좌석지정도 되고 쾌적하지만, 일반열차도 시발역인 서울역에서 타면 무난히 앉아서 갈 수 있다. 무려 한 시간을...
내 앞 긴 의자에 앉은 7명 중에 오른쪽 끝에 앉은 어르신 말고는 모두 핸드폰 화면을 보고 있다. 젊은 남자 한 명은 자세가 유튜브를 보고 있는 것이 확실하고, 두 명은 자판을 두드리는 것으로 보아 메신저를 하고 있는 듯하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대에는 신문이나 책을 보거나 멍하니 앞만 보고 있었을 텐데... 퇴근시간이라 열차는 금세 사람들로 거의 만원이 되었다.
나는 아이폰의 브런치스토리 앱을 열었다. 통계와 좋아요 알림을 확인하고 저장글 폴더를 열었다. 쓰다 만 저장글 중에서 하나를 골라 내용을 수정하고 보충한다. 글쓰기의 가장 좋은 점은 자신의 생각을 구체화한다는 것이다. 의식의 흐름을 또박또박 따라가며 내용을 완성하는 것이다. 글의 완성이란 사실 없다. 다시 읽어보면 수정하거나 보완해야 할 것이 항상 보이고, 전체 구조를 뜯어고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인생처럼…
의식의 구체화
행복감을 느끼거나 만족감을 느끼려면 원하는 것이 구체화되어 있어야 한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구체적으로 알고 있어야 한다. 어르신이 되어 죽기 전까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구체적이어야 한다. 막연하거나 애매모호한 바람은 결코 충족될 수 없고, 어느 순간 덜컥하고 눕거나 저승문이 보일 것이다. 그 순간 껄, 껄, 껄 하고 후회하지 않으려면 아주 구체적인 목표와 목표 달성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 계획 소위 action plan이 있어야 한다.
인생 목표가 아닌 어르신의 목표가 수정되거나 변경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목표가 항상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목표는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서 생을 마감하지 않는 것'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행동계획은 끊임없이 방랑길을 떠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러운 객사가 완성되지 않을까?
끊임없이 방랑을 해야 한다. 필리핀 입국서류를 웹(e-travel)에 작성하느라 어젯밤에 여권을 펼쳤다. 여권 만료기간이 2033년 3월 13일이다. 만 74세 5개월이다. 한국 남자의 평균 건강 수명과 거의 일치한다. 내가 평균이라면 여권 만료기간과 함께 건강수명이 끝난다는 얘기다. 이 여권이 내 마지막 여권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여권의 많은 페이지가 비자를 붙이거나 출입국 도장을 찍는 면이다. 모든 면이 비자와 도장으로 꽉 차면 새로 여권을 발급받아야 한다. 내 마지막 여권의 모든 면을 비자와 도장으로 꽉 채우고 싶다. 그러면 내 목표가 완성되지 않을까?
57면을 채우려면 더 부지런히 방랑길을 떠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