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콩콩
콩콩콩
또 콩이다. 제발 콩만 아니면 된다 했건만 또 콩이다.
엄마는 내가 싫어하는 것을 일부러 하는 거 같다. 정말로 계모일지도 모른다.
추석에 내려왔던 막내 삼촌이 그랬다. 내 친부모는 서울 한남동 어디인가에 살고 있다고
한남동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서울에 있다니 분명 괜찮은 곳일 거다. 내 언젠가 이 시골 구석을 떠나 서울 한남동으로 내 부모를 찾으러 가리라
그나저나 배는 고픈데 여기서 승질 부렸다는 아버지 호통에 밥상머리에 못 앉을 거고, 울며 겨자 먹기로 콩밥을 먹어야 한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보니 죄 짓고 징역살이 하는 사람들은 철창에 갇혀 콩밥을 먹는다 던데… 이해가 간다. 콩밥을 매 끼니 먹어야 하니 얼마나 싫을까.
콩밥이라도 어느 정도라면 양보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 엄마 콩밥은 해도 너무한다. 콩이 쌀알보다 많으니 콩밥이 아니라 밥콩이다.
콩콩콩
난 콩이라면 질색이다. 콩밥에서 시작해 송편도 콩이 들어간 것은 골라내며 먹는다. 점박이 콩떡도 콩고물이 묻은 인절미도 사절이다. 콩고물 얘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난 미숫가루가 좋다. 비슷하게 생겼지만 미숫가루는 볶은 쌀가루고 콩가루는 볶은 콩가루다. 그런데도 엄마는 미숫가루 대신 늘 콩가루를 물에 타 준다. 말해 놓고 보니 친엄마가 아닌 게 점점 확실해 진다.
콩 중에서도 내가 제일 싫어하는 콩은 강낭콩이다. 퍼석하게 씹히는 그 맛없음이란… 강낭콩은 왜 심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까만콩 서리태는 그래도 먹을 만 한데, 엄마가 이 콩으로 밥을 지으면 하도 많이 넣어 밥 색깔이 완전 보라색이다.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콩이 있긴 하다. 완두콩. 연두색 완두콩은 생김새도 귀엽지만 맛도 달큰하다. 특히 읍내 홍콩반점의 짜장면 위에 올려진 완두콩은 정말 최고다. 짜장면 고명으론 채 썬 오이보다는 역시 완두콩이다. 메주콩도 나름 괜찮다. 우리 엄마 음식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실 거의 유일하게 좋아하는 음식은 콩국수다. 메주콩을 삶아 불려서 맷돌에 곱게 간 후 무명천으로 걸러내면 뽀얗고 말간 국물이 나온다. 냉장고에 한두 시간 넣어 둔 콩물을 소면이 푹 잠기게 부어주고 굵은 소금을 슬쩍 쳐 먹으면 음~ 우리 엄마 음식이지만 정말 맛있다.
메주콩은 내가 좋아하는 여러 음식 재료로 변신한다. 메주콩 변신의 정석인 된장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식재료이고 메주콩을 뜨끈한 아랫목에 띄운 청국장도 좋다. 그리고 두부. 된장찌개에 넣어 먹어도 좋고, 뜨거운 물에 슬쩍 데쳐 김치와 먹어도 좋고, 프라이팬에 들기름을 둘러 구워 먹어도 좋고, 양념간장에 졸여 먹어도 좋고… 두부로 한 건 뭐든지 다 좋다.
콩 하니 안방 윗목에 한자리 차지하는 콩나물 시루도 빼놓을 수 없다. 빨간 고무 다라이에 나무 삼각대를 놓고 시루를 올리고 시루구멍은 나뭇잎이나 삼베천으로 막는다. 나중에 먹을 마른콩은 바닥에 깔고 미리 싹틔운 아기 콩알들을 그 위에 올린다. 그리고 생각날 때마다 물을 부어 주면 끝. 시루는 금새 콩나물로 수북하다. 콩나물엔 고춧가루다. 콩나물 무침도 콩나물국도 고춧가루가 팍팍 뿌려져야 제 맛이다. 난 콩나물을 두부 만큼이나 좋아하지만 콩나물 밥은 제발 그만 먹고 싶다. 아무리 아버지가 좋아해도 그렇지 엄마는 콩나물 밥을 너무 자주 한다. 밥은 그냥 하얀 쌀로만 살짝 되게 지어 주면 좋겠다. 그런데 엄마는 자꾸 밥에 뭘 넣는다.
콩콩콩
콩밥 콩떡 콩고물을 다 합쳐도 이것보다 더 싫지는 않다. 콩자반. 밑반찬 리스트에 절대 빠지지 않는 콩자반. 이 연사, 밑반찬 리스트에서 콩자반은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맛없는 음식이 밥상에 매일 오르는 반찬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검은콩을 간장과 설탕물에 졸여 만든 찐득찐득한 콩조림. 젓가락으로는 잘 잡히지도 않아 이걸 먹으려면 숟가락으로 퍼 먹어야 하니 먹기 싫어도 한 움큼을 먹게 된다. 엄마는 시도 때도 없이 커다란 가마솥에 콩조림을 끓인다. 콩조림을 하는 날이면 그 냄새가 대문밖까지 풍기고... 아 난 한동안 매일같이 저 놈의 콩자반을 도시락 반찬으로 만나야 한다. 안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나는 아버지 고봉밥의 두배를 먹는 밥을 정말로 잘 먹는 튼튼한 소녀다. 반찬을 뭘 싸주던 도시락은 늘 싹싹 비운다. 어떤 음식이 싫다는 것과 입이 짧다는 것은 같지 않으니까. 엄마! 난 소시지 계란말이 안 싸줘도 좋으니 제발 콩자반만은 넣지 말아줘. 그냥 김치에 고추장을 싸주면 안될까. 도시락을 여니 또 콩자반이다. 엄마는 콩을 정말 좋아하는 거 같다. 우리 엄마는 둘째딸을 정말 안 좋아하는 거 같다.
콩콩콩
그로부터 20년 후, 난 돈을 버는 어엿한 어른이 되어 원하는 음식을 맘대로 사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여름이 되면 난 엄마의 콩국수 맛을 찾아 장안의 이름 난 콩국수 집을 찾아 다닌다. 유명하다는 콩국수집들은 대체로 국물이 걸쭉하다. 땅콩 같은 견과류를 넣어 알갱이 씹히는 맛이 나기도 한다. 맛있지만 엄마처럼 말간 국물로 고소함을 주는 콩국수집은 없었다. 여름에 어쩌다 시골집에 갈 때면 콩국수를 해달라고 엄마에게 미리 전화를 건다. 하지만 손 많이 가는 콩국수가 엄마는 이제 귀찮다고 한다. 애지중지 큰 아들 내려갈 때만 그 귀찮음이 사라진다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흠,,, 어쩔 수 없지. 큰 아들과 동선을 맞추는 수밖에.
또 하나 내가 찾는 콩음식이 있다. 콩자반이다. 백반집에 가서 콩자반이 나오면 한 접시를 싹 비우고 더 달라고 한다. 동네 반찬가게에 들려서도 콩자반을 찾는다. 정작 시골집 밥상에는 이제 콩자반이 드물다. 엄마 콩자반 없어? 야 그게 손이 얼마나 많이 가는데. 그냥 딴 거랑 먹어.
콩콩콩. 콩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건 나이가 들었다는 징표임에 틀림없다. 엄마가 더 귀찮아 하기 전에 충청도식 콩자반을 배워 놓을까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