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나는 출근 시간보다
두 시간 정도 일찍 회사에 도착해서 책을 읽거나,
여유가 되면 쪽잠을 자고,
영어 공부를 하는 게 루틴이다.
특별히 대단한 포부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여유 시간을 갖고 싶었을 뿐이다.
그날은 책을 읽다가 잠시 눈을 붙였다.
“위잉—”
사무실 입구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가
얕은 잠에 든 내 귀에 어렴풋이 들렸다.
눈을 슬쩍 떠서 누군가 하고 봤더니
“어?”
그 벨기에로 간 [노빠꾸 상여자]가 들어오는 게 아닌가.
황당한 꿈을 꾼 것이었다.
이렇게 단박에 이야기에 젖어들 만큼
그녀의 생존기는 생생했다.
그녀의 시시콜콜한 사연을 읽다 보니
내적 친밀감이 나도 모르게 쌓여서,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면
친구처럼 인사라도 할 정도다.
나는 전형적인 INFP이다.
어쩌면 내 글을 그녀의 남편인
누렁이 황소의 눈을 한 남자가 읽을지도 모르니,
설명을 조금 추가하자면
“INFP”는 한국에서 매우 유행하는
성격 유형 테스트의 분류 결과를 부르는 말이다.
더 풀어서 말하자면 내향적이지만
즉흥적인 성향이 가장 도드라지는 그런 성격.
시끄러운 곳에 가면 이내 기가 빨리는가 하면,
평소에는 내면과의 대화를 가장 즐기는 주제에
즉흥적이기까지 하다.
벨기에로 간 그녀가 내향적인지는
확인 안 해봐서 잘 모르겠으나,
즉흥적인 느낌은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Never judge a book by its cover.라는 말이 있다.
사실 표지만 보고서는
‘어느 커리어 우먼의
화려한 벨기에 성공기’겠거니 생각했다.
물론 이 책 또한 나름의 성공기라면 성공기이다.
내가 만약 그 상황에 직면했다면
해낼 수 있었을까 싶은 미션들을
거침없이 깨부수어나간다.
한 번은 읽다가 버스 정류장을 지나칠 뻔한 적도 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유독 술술 읽히는 글들이었고,
그건 글이라기보다는
그녀와 성수동 블루보틀에서
라떼 한 잔 시켜 놓고
수다를 떠는 그녀를 지켜보는 것 같았다.
벨기에라니.
마치 “직업으로서의 래퍼” 같은 문장처럼
어딘가 생소하다.
머릿속에는 왠지 모르게 메이플 시럽이나 꿀 같은
와플에 발라 먹을 법한 것이 잔뜩 떠오르게 하는데,
그건 아마 내 상상력이 짧아서일 것이다.
갑자기 단 게 땡긴다.
지금처럼 나는 쓰다가 옆길로 종종 세는 편인데,
그녀는 달랐다. 오로지 직진하는 여성이었다.
네덜란드어를 배우고 (세상에 네덜란드어라니),
거기에 프랑스어도 할 줄 알게 된 그녀에게
그 언어들을 섞어서
프리스타일 랩을 요청해 보고 싶다.
무리한 부탁이겠지만요.
엄격한 부모님께 외국인과의 결혼 허락받기,
해외로 나가 언어 배우기, 직장 구하기,
거기에 아이 둘까지 낳고 기르다가
끝에 다다라서는 자전거 여행까지 해버리는 그녀.
읽다 보면 문득,
그런 통과하기 어려운 미션에 대해
“난 못해”
라고 생각하게 하다가도
“까짓 거 하면 하지”
이렇게 바뀌게끔 하는
쿨한 에티튜드를 갖게 만들어 준다.
세상은 아마 그걸 용기라고 부를 것이다.
유명한 힙합곡 중
“Young & Wild, Free”라는 제목의 곡이 있다.
이 책의 부제를 짓는다면 그게 딱 어울리지 않나 싶다.
물론 물리적인 나이로 더 이상 “Young”이 아닐 수는 있다. 나는 정신적인 영역에서의 “Young”을 말하고 싶다.
그녀의 17년 벨기에 살이는 그녀를
한국인/벨기에인 사이 어딘가에 갖다 놓았다고 고백한다. 나는 그 느낌을 너무 잘 안다.
어쩌면 나는 그녀의 리버스(Reverse) 버전의 삶을 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20년 동안 “래퍼 제이켠”의 삶을 살다가,
하루아침에 9시부터 6시까지의 직장인 A로 탈바꿈했다. 그 간극에서 느껴지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느낌은
사람을 외롭게 만들거나 위축되게 만들기 마련인데,
그녀는 그 틈마저 어떤 휴전 지대처럼 선포하고
그대로 받아들여 버리는 쿨함을 보인다.
벨기에로 간 그녀, 누렁이 황소 눈의 남편,
그들을 쏙 빼닮은 아이들 1호와 2호,
그들이 나오는 꿈을 다시 꿀 것만 같다.
“나는 나대로 잘 살고 있다.”
그 문장 안에 오롯이 녹아 있는 긴 여정을 느낀다.
그녀는 국경을 넘었고, 나는 정체성을 넘었다.
방향은 달랐지만 우리는 모두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었다.
그래서, 너는 너로 살고 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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