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간다 했지만 사실 도망간 거야.

by 지한

여행의 시작은 보통 설렘이고 스스로 선물하는 휴가나 즐거움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이 여행의 시작은 사실 도망이었다. 지치고 있었고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다. 대학생활 내내 남들처럼 공부를 잘해 장학금 받으면 됐을 것을, 등록금 마련하느라 입학하기 전부터 시작한 아르바이트는 학기 중과 방학 내내 이어졌고 졸업하기 전까지 계속됐다. 누구 탓이 아니라 그냥 살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부모님은 최선을 다했지만 돈을 대주시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먹고살기에 바빴다. 그래도 가끔 벅차게 행복했고, 때문인지 또 때론 견디기 힘든 불행도 찾아왔다.


그렇게 스스로 앞가림하기 위해 돈을 벌고 공부도 하고 가끔 숨 쉬려 친구들과 어울리고 나니 시간이 사라졌다. 그렇게 죽어라 남들이 부러워하는 유명 대기업에 취업을 했지만 사는 게 다 이런 것인지 너무 힘들고 지쳐서 다 그만두고 싶었다.(실제로 미친 건지 현재는 그만두었다.) 고등학교 때는 대학 가면 나아질 거라고 말하는 선생님 말을 철석같이 믿었지만 대학 가보니 나아지기는커녕 해야 할 일들만 늘었다. 더구나 알아서 해야 하는 돈 들어가는 일만 늘었다. 그렇게 대학을 가니, 취업하면 나아질 거라는 새빨간 거짓말에는 더 이상 속지 않았다. 한 번 속지 두 번 속냐. 그렇게 취업을 위해 전쟁터를 피 흘리며 지나왔는데, 그곳 역시 또 다른 전쟁터였고 나는 심지어 밑바닥에 있었다.


그래서 취업을 하고 1년 만에 여행이라 뻥치고 사실 도망 온 것이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 차라리 외국에서 미아나 되길 바라는 꼴로 말이다. 진심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물론 도망 온 신세계는 일단 모든 것이 신기했고, 하나뿐이던 나의 세상 대한민국을 벗어나 다른 세상을 보는 기적을 만났다. 떠나와서 떨어져서 보니 다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빙산의 일부였고, 놓치며 살아온 수많은 것들이 여행에서 만난 것들과 연결되어 새롭게 다시 떠올랐다. 그래서 사진과 함께 이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그저 힘들기만 한 삶이 아니었다는 것을. 너무 가까이 있어서 미처 소중히 하지 못한 것들이 많았음을 깨달았다.


돈이 부족했지만 용기와 호기심이 넘치던 시절, 호텔에서 지내며 여행할 수는 없었지만 도미토리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행복이 낭만이 있었다. 문화적인 교류, 내가 알던 세상에서 벗어나 세상에 얼마나 아름다운 것들이 더 많이 존재하는지, 나라마다 알려지지 않거나 몰랐던 얼마나 다양한 역사와 아픔이 있는지 밤새 일면식도 없던 낯선 이들과 떠들며 배우고 나누며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고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물론 술 먹고 각자 다른 나라와 문화 얘기하며 어울리다 4인실에서 자는 것은 술 먹고 놀기 전까지만 행복했다. 자려고 보면 저기서 이 갈고 저기서 코 골고 심지어 탱크가 지나가는 소리에 자다가 깨면 알게 된다, 내 조그만 방이라도 얼마나 소중한지. 또 매일 아침 출근 전 따뜻하고 입에 맞는 하얀 밥과 맛있는 국과 반찬이 엄마의 정성과 사랑이었음에 다시 감사하게 되었다. 처음 신기한 다른 나라 음식도 신기해서 먹어보지 하루만 지나도 짜고 달고 느끼하고 이것 참 어찌해야 할지, 배가 고파지고 집이 그리워졌다. 걷다가 보면 같은 언어를 쓰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이던지 뭐 하나 물어보기도 힘들어서 난감하고 두려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걱정하지 않던 안전을 걱정하게 되고 소매치기를 경계하고 인적이 드문 으쓱한 골목길은 피해 걸어야 했다.


그래도 그 속에서 우당탕탕하며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웃었으며, 결국 어쩌면 모두가 떠난 여행의 종착지인 가족이 있는 집으로 대한민국으로 가는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올 수 기뻤다. 물론 곧, 금방, 다시 도망을 꿈꾸겠지만 꿈에서 깨면 내 방 침대이거나 책상 위에서 침 흘리고 있듯이 여행의 종착지인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Sun rise.jpg


그래서 마지막 날은 이름도 모르는 바다 근처 산에 올랐다. 매일 아침 해가 뜨고 새로운 날이 다시 시작됐다 말해주는 나의 희망. 같은 하루를 사는 것 같지만 매일 다른 아침해는, 이 날 열정적으로 살라는 듯 어둠 속에서 시작해 사진처럼 찬란하게 타오르는 불같이 나타나 열정적인 빨간색 세상을 밝히고 나를 응원해주는 듯했다. 나도 열심히 타오르고 있으니 너도 한번 타올라보라고 네가 보여줄 수 있는 빨간색은 무엇인지 묻는 듯이, 이 여행은 끝났지만 나의 여행은 다시 또 시작이다. 가자.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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