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유서
아버지와 함께한 행복한 기억도 아픈 기억도 많다. 누구나 그렇듯 삶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늘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겠지만, 이 날은 충격적이어서 여전히 잊을 수 날이다.
술을 좋아하거나 잘 먹지는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다 좋았지만 아버지는 술만 드시면 다른 사람이 되셨고 그 안 좋은 기억이 트라우마가 되어 나와 동생은 소주 한 잔 이상, 맥주 한 병 이상 먹어 본 적이 없다. 실수해서 내가 모르는 그런 순간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남기게 될 두려움에 술의 유혹 따위는 지나가는 개에게 줘버린 지 오래다.
대학생 때 술 먹고 집에 늦게 들어갔을 때였다. 물론 맥주 한 병이 술의 전부였지만. 도착해 집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거실 컴퓨터에 하얀빛이 남아있었다. 동생은 자고 있을 시간이었고 안방 문도 닫혀있었다.
근데 누가 컴퓨터를 쓰고 저렇게 둔 거지 하고 컴퓨터를 끄려고 앉았다. 보지 말아야 했고 잊어버리고 싶었지만 평생 지우지 못할 그 순간, 아버지가 쓴 유서와 마주했다. 한글 프로그램으로 작성되어 있었던 글은 "유서"라는 제목으로 시작했다. 그전까지 유서는 드라마에서 재산 많은 사람들이 자식들에게 뭘 주고 뭐 그런 내용이나 쓰는 건 줄 알았다. 젠장. 당연히 줄 재산도 없는 우리 집에서 그런 걸 보리라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내 기억 속 내용은 "열심히 살았지만 미안하다. 잘해주고 싶었는데. 거지 같은 xxx 세상 부모 도움 없이 고등학생 때부터 막노동하며 동생도 대학에 보내고 힘들었지만 최선을 다했다. 결혼해서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택시 기사부터 막노동까지 할 수 있는 일은 다했지만, xx 남은 게 없다. 보증을 서준 친동생마저 자기 가족을 위해 우리 가족에 빚을 넘기고, 또 다른 누군가를 믿어 배신을 당해 빚을 갚느라 가족을 고생시켰다. 잘해보려 한 건데 미안하다. 좀 나아지는가 했더니 열심히 일하며 신용을 믿고 받은 친구가 준 어음은 휴지 조각이 돼버렸다. 희망이 없다. 가족 말고는 누구도 믿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 같은 놈 때문에 모두 힘들게 살게 하느니 다 같이............."
그냥 글자 하나하나가 다 충격적이었다. 또 추임새 같은 욕들이 너무나 많았다. 평소에 우리에게 하지 않아 들어 본 적 없었던 말이었다.
더구나 앉아서 보니 컴퓨터 옆 프린터에는 칼이 있었다. 일단 칼을 주방에 안전하게 싱크대 밑에 모조리 숨기고 동생과 엄마를 확인했다. 아픔과 분노, 실망 이전에 동생과 엄마가 소중했다. 다행이다. 자고 있었다. 술 취해한 일이었으리라. 그래도 어려웠다. 난 어떻게 해야 하나. 그날이 기억났다. 아버지보다 훨씬 작은 몸으로 술 취한 아버지를 막아서고 우리에게 너희는 들어가라며 방문 닫고 있으라고 문 앞을 지키던 작지만 커 보이던 어머니가.
나가서 문 앞에 앉았다.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아버지는 운동을 해서 몸이 다부지시고 무섭지만 술도 드셨고, 이제 나도 건장한 청년이니 어떻게든 이 문만 막아서면 되지 않을까 했다. 그냥 두어 더 많은 가족이 다치게 둘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나은 일이 그 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막자.
서서히 해가 뜨고 새벽 7시가 되어 어머니가 일어나기까지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별의별 생각을 하며 뜬 눈으로 지키다가 안에서 나는 소리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버지도 무서워서였을까 술 김에 쓴 내용을 저지르기에는. 아니면 혼자서 그냥 사고를 치신 걸까. 걱정되었다. 일단 들어가서 나는 잤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전화는 이미 백 통 넘게 걸었고 아침에 그런 일을 저지른 적은 없었으니까.
다음 날 아버지가 지방에 있는 현장으로 다시 내려가셨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유서는 내가 지워 아버지조차 기억하지 못할는지 모른다. 가족들이 아는 걸 원치 않았다.
우리네 아버지들은 술을 먹지 않으면 속에 있는 이야기를 꺼낼 줄 모르고 혼자 모든 걸 안고 있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곪아 간다.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내가 조금이라도 덜 수 있다면 좋겠는데 말이다. 아니 어쩌면 그 일이 없었으면 나도 무심했을지 모른다. 아버지의 등은 항상 넓었고 커 보였으니까.
어떤 말도 못 했다. 이 글을 쓰지 전까지. 그리고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5000만 원짜리 받지도 못할 어음 몇 장을 지갑 속에 지니고 미련하게 돌아가셨다. 미안해. 지켜주지 못해서 더 할 수 없어서. 술이 너무 싫어서 당신이 바라던 소주 한 잔을 마주 들고 마시지 못해서.
그렇게 아팠을 당신을 충분히 위로해 드리지 못해서. 부디 그곳에서 행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