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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Lee Sep 12. 2024

회계사가 되고 행복하지 않았다 (하)


Welcome to the 'CPA club'!


선배들은 'CPA 클럽'에 들어온 걸 환영한다며 진심으로 축하해 줬지만, 사실상 그렇게 갖고 싶던 그 이름을 얻고도 바뀐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바로, 내 이름 뒤에 'CPA' 타이틀을 붙일 수 있다는 것.


직책, 연봉, 하던 일 어느 것 하나 바뀐 것 없이 그대로였으며, 회계법인 특성상 내 주위에는 온통 CPA 뿐이었다. 그 대단해 보이던 타이틀이, 5년 차, 10년 차, 20년 차 선배들에 둘러싸이니 알파벳 세 글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별 볼 일 없이 느껴졌다.



온전히 주어진 퇴근 후의 저녁시간도, 여유롭다 못해 따분하게까지 느껴지는 주말도 적응이 안 됐다.


금요일 오후에 퇴근하면 그다음 주 월요일 아침에 출근하기까지 장장 60시간이 넘는 시간이 내게 허락됐는데, 그 시간 동안 정말 책 한 자 안 봐도 된다는 게 미치도록 어색했다.


그즈음 대학원 졸업생 모임이 있어 오랜만에 학교에 갔다가 친하게 지냈던 교수님을 한 분 만났다. 그분이 내 근황을 듣더니, (이제 CPA 시험도 끝났겠다) 박사 과정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마침 넘쳐나는 자유시간을 어찌하지 못하고 있던 터라 솔깃한 마음이 들었던 건 사실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딱히 하고 싶은 공부가 없었다.


학사나 석사도 아니고 그저 학위 하나만을 보고 뛰어들기엔 '박사'라는 이름의 무게가 너무 크게 느껴졌고, 그렇게 선택하기엔 옳지 않은 길 같았다.




오랜 시간 혼자 끙끙 앓다가 어느 날 남편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나 요새 행복하지 않다고.


나 사실, CPA가 되면 내 삶이 180도 바뀔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게 내 착각이었다는 걸 깨닫고 나니 너무 허탈해. 공부를 더 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는 건 또 너무 불안하고... 남들이 걸을 때 나는 쉬지 않고 뛰어야 할 것 같은데, 그냥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면서 살아도 되는 걸까.


남편은 대답했다.


J, 그거 알아?


지금 네 눈앞에 보이는 건 사실 '산(mountain)'이 아니라 '빙산(iceberg)'이야.


그 두 개의 차이점이 뭔 줄 알아? 산은 보이는 게 다지만, 빙산은 오로지 정상의 끝부분만을 볼 수 있어, 훨씬 더 큰 부분은 바다 밑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거든.


눈에 보이는 그것들이 네 것보다 화려하거나 멋져 보일 수는 있지만 나는 이제 네가 그 '일각'이 아닌 숨겨진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각을 가졌으면 좋겠어.



책을 보면서 지혜를 얻는 것도

여행을 하면서 경험을 쌓는 것도

명상을 하면서 마음을 다독이는 것도

모두 너의 내면을 가꾸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에 눈을 돌려봐.



남편말이 맞았다. 내가 이미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게 문제였다면 그 무엇을 얻든 나는 또 그다음을 원할 것이다.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없는 것을 평생 좇으며 사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 후로 보이는 타이틀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내면을 다지는 데 집중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내면을 채우는 데 독서만 한 게 있을까 싶어 책을 읽기 시작했고, 책을 읽다 보니 내 얘기를 쓰고 싶어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마음의 건강만큼 몸도 챙겨야 할 것 같아 운동 한번 안 하던 내가 취미발레를 시작했다.


퇴근 후에는 남편과 종종 산책을 나갔고, 주말에는 도시락을 싸들고 이곳저곳으로 피크닉을 다녔다. 그러자 비로소, 결혼 후 얼마나 오랫동안 공부 핑계로 이 사람을 혼자 뒀었는지, 이제야 찾아온 이 소중한 시간이 사실 얼마나 의미 있는 시간인지 깨닫게 됐다.



<유퀴즈>에 나온 행복 심리학자 서은국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지금 내 일상에는 '행복압정'이 얼마나 많이 깔려있는지 모른다. 그 압정이 없는 곳을 디디기가 어려울 정도로.


행복의 힘, 나는 그걸 일상에서 찾았다.




사진 출처: unsplas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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