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빛나는 해질녘 여유가, 밖에서는 천천히 흘러 가고 있었다. 밥상을 차려놓고 산책 나간 남편을 기다리던 나는, 잠시 서재를 바라보았다. 방문이 조금 열려있어, 석양이 방안을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
눈길을 돌리려던 그 순간, 남편의 책상 서랍이 약간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남편의 스타일을 아는 터라 열린 서랍에서 생경한 느낌이 새어나왔다. 남편은 항상 자신의 공간을 단정하게 유지하는 사람이었으니 작은 변화에도 꽤 시선이 간 모양이었다.
무슨 비밀이라도 숨어 있는 것처럼 호기심이 나를 남편의 서재로 이끌었다. 남편은 왜 그 서랍을 열어놓고 나갔을까? 고요한 방 안에 무엇인가 가득 차 있는 듯하였다. 나는 서랍을 천천히 당겼다.
서랍에는 그저 오래된 사진들과 몇몇 편지들이었지만, 유독 눈에 띈 것은 빛이 바랜 낯선 여자 사진 한 장이었다. 잠시 나는 숨을 죽였다. 도대체 이 여자는 누구일까? 왜 남편의 서랍 속에서 숨겨진 듯 이 사진이 있는 것일까?
여자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미소를 띠고 있는 그녀 뒤로는 어딘가 익숙한 공원이 보였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우리가 처음 만난 공원이었다. 그럼 남편은 당시 이 공원에서 또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었을까…. 남편의 손길이 느껴지는 사진을 보며, 나는 잠시나마 상상력의 물결을 따라 마구 흘러갔다. 그의 과거, 그 여자, 그리고 그들의 관계에 대한 수많은 시나리오가 머릿속을 휘젓고 있었다.
심호흡을 하며 좀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여자의 미소, 그 여자의 눈동자, 그 모든 것이 나와 안면이 있는 여자 같았다. 그제야 나는 깜짝 놀랐다. 그 여자는 바로 청년 시절의 나였기 때문이다. 순간, 지나온 50년 세월이 슬픈 표정으로 내 앞에서 일그러졌다.
남편이 방으로 들어왔다. 남편은 내 손에 들린 사진을 보고는 힐끗 미소를 지었다.
"당신 젊었을 때의 모습이야. 당신에게 미안할 때마다 이 사진을 보면 당신에게 더욱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몹시 힘들었던 그때 당신은 내 삶의 빛이었지. 지금도 마찬가지고…“
세월이 흘러도 남편의 사랑은 서랍 속에서도 깊어갔지만, 내 기억은 하염없이 늙고 있었던 모양이다. 젊은 날의 나를 망각할만큼 살아온 세월, 그럼에도 남편이 있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