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신경세포가 죽는 루게릭병을 앓아 눈빛만으로 쓴 시
by 해드림 hd books Jul 30. 2025
힘
김주은혜
컵이 떨어졌다
숟가락이 떨어졌다
종이가 떨어졌다
모든 것들이 벗어났다
마른 모래알처럼
왼손과 왼팔이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내 몸에 붙어있지만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말 안 듣는 사춘기 아이들처럼
오른팔, 오른쪽 다리, 왼쪽 다리...
하나씩 내 말에 불복하는 녀석들이
늘어날수록 나는 깨달았다
내려놓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할 수 없음을
마침내 내 힘으로 숨도 쉴 수 없을 때
비로소 나는 모든 것을 전적으로 그분께 맡겼다
내 몸이 감옥에 갇히니
나는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나는 너무나 가볍고 홀가분하다
오늘도 나는 저 하늘을 난다
육체의 감옥을 넘어선 자유의 언어
김주은혜 시인의 시 「힘」은 육체의 점진적인 상실 속에서 오히려 내면의 자유와 초월을 발견해나가는 과정을 담담하고도 절절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루게릭병으로 인해 신체 대부분의 기능을 잃고, 오직 눈썹의 깜박임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자 주체로서, 그는 인간 존재의 가장 원초적인 질문 앞에 선다. “힘이란 무엇인가?”, “자유란 무엇인가?”, “의지란 어디까지 유효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 시는 고통을 관통한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깊고 투명한 울림으로 응답한다.
1. 상실의 기록이자, 초월의 서사
시의 초입부에서 시인은 “컵이 떨어졌다 / 숟가락이 떨어졌다 / 종이가 떨어졌다”라고 말한다. 단순한 사물의 낙하를 나열한 듯하지만, 이는 시인의 일상적인 세계가 무너지는 소리이며, 몸의 기능이 하나씩 벗겨지는 서사를 은유한다. 특히 “모든 것들이 벗어났다 / 마른 모래알처럼”이라는 구절은 존재를 구성하던 사소한 요소들조차 시인의 통제 밖으로 흩어져버리는 현실을 적막하게 형상화한다. 이 이미지들은 독자에게 일종의 ‘상실의 리듬’을 전달한다.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신체와 그로 인한 무기력함은 단순히 슬픔이 아닌 깨달음으로 향하는 길목이 된다.
2. ‘힘’의 재정의, 내려놓음에서 비롯된 의지
중반부에서 시인은 점점 자신을 거부하는 신체 부위들—왼팔, 오른팔, 다리들—을 묘사하면서 그 거부가 자신에게 “내려놓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었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힘’이라는 시의 제목이 역설적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힘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오히려 움직이지 못함이야말로 진정한 힘의 시작점이 된다. 신체적 무력감이 깊어질수록, 시인은 ‘자기 힘으로 숨조차 쉴 수 없을 때’에야 ‘전적으로 맡긴다’는 평온한 경지에 이른다. 그것은 체념이 아닌, 자신과 신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궁극의 ‘신뢰’이며, 진정한 ‘의지의 힘’이다.
3. 육체를 벗어난 영혼의 자유
“내 몸이 감옥에 갇히니 / 나는 완전히 자유로워졌다”는 역설은 이 시의 정점이다. 시인은 철저한 무력의 상태에 놓인 채, 이전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가벼움과 해방감을 얻는다. 여기서 ‘감옥’은 신체이고, ‘자유’는 오히려 그 감옥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의 내면에서 피어난다. 신체가 더 이상 통제되지 않을 때, 시인은 자신의 존재를 ‘내 것’으로 붙잡으려 하지 않고 놓아버린다. 이때 비로소 그는 “오늘도 나는 저 하늘을 난다”는 선언으로 시를 마무리한다. 현실적으로 날 수 없는 신체의 상태임에도, 영혼은 날고 있다는 이 말은 단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낸 자만이 할 수 있는 진술로 받아들여진다.
4. 언어의 기적, 눈썹으로 쓴 시
이 시의 또 다른 감동은 시를 쓴 방식 자체에서 비롯된다. 루게릭병으로 인해 온몸을 쓸 수 없고, 오직 눈썹 깜박임을 인식하는 장치를 통해 쓰여졌다는 사실은 이 시의 존재 그 자체를 하나의 ‘기적’처럼 만든다. 한 글자 한 글자, 신호로 인식된 깜박임은 단순히 물리적인 작용이 아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침묵 속에서 길어올린 생의 의지’이다. 언어는 여기서 고통의 표현이 아니라, 침묵의 틈을 찢고 나오는 구원의 도구가 된다.
5. 고요한 혁명
김주은혜 시인의 「힘」은 울림의 밀도가 높은 시다. 감정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깊은 울림을 전한다. 단어 선택은 소박하지만 그 속에 담긴 사유는 경이롭다. 이 시는 한 인간이 병을 통해 육체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을 기록한 일기이자, 죽음과 맞닿은 존재가 삶을 긍정해가는 가장 고요한 혁명이다. 독자는 이 시를 통해 힘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한 자유가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새롭게 묻게 된다. 김 시인의 시는 문학이라는 형식의 테두리를 넘어 존재 그 자체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