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이방원, 어린 세종 충녕의 리더십을 읽었을까

by 해드림 hd books

대한민국이 제대로 세계를 제패하려면 세종학과, 이순신학과가 생겨야 한다. 또한 입사시험 및 각종 국가 시험에서 세종과 이순신은 필수과목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세종과 이순신은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736쪽, 186*248 크기의 방대한 세종과 이순신 각론, 리더십 광산 ‘세종과 이순신, K 리더십’


[세종과 이순신, K 리더십] 엿보기_제1편

어린 세종, 충녕은 언제 왕이 될 뜻을 세웠을까?

<세종과 이순신, K 리더십> 저자, 국정호(㈜한화 종합연구소 책임연구원)

사람은 다른 이로부터 무엇을 하라고 지시나 권유를 받을 때, 이를 맹목적 또는 수동적으로 따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그 일을 해야 한다는 명분과 의미를 스스로 깨달아 주동적으로 수행할 때 일이 제대로 성사되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1418년 6월의 태종실록과 세종실록을 읽다 보면, 태종 이방원에게서 어린 세종, 충녕으로의 전위과정은 태종의 택현(擇賢)만으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충녕의 주동적인 속마음이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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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아버지 태종 이방원의 원대한 계획뿐이었을까

어린 충녕이 태어났을 때(1397년), 할아버지 이성계는 63살, 아버지 이방원은 31살이었다.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 두 부자의 치열한 왕위 다툼은 충녕이 첫돌이 지난 지 불과 4~5개월 뒤에 벌어졌다(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정안군 이방원은 자신의 뜻대로 정도전 등 반대파를 모조리 몰아내고 자기보다 열 살 위인 둘째 형 방과(1357~1419)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그 후 3년 만에 (1400년) 이방원은 조선의 국권을 완전히 잡았고, 이때 이방원 나이 34살, 충녕은 4살이었다. 충녕이 태어난 후 4살 때까지 정안군 이방원은 조선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때로는 아버지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사람들을 죽여야 했고, 때로는 한 치 앞을 모르는 상황 전개에 당황하고 동분서주해야 했다.


1400년 왕이 된 이방원은 젊음과 패기가 넘쳐 있었고, 또 조선의 미래를 내다보는 긴 안목도 가지고 있었다. 나라의 기틀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충녕과 같이 똑똑한 인물을 창건 초 군왕의 자리에 올려 앉혀야만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태종 이방원은 충녕의 두 형 양녕(讓寧)과 효령(孝寧)을 왕위 계승의 위치에서 배제하였다. 태종 18년(1418) 6월 초2일, 국왕 태종의 뜻에 따라 세자 양녕의 폐위 논의가 일어나고, 이직(李稷)과 황희(黃喜) 같은 강직한 인물들은 완강히 이를 반대하였지만, 이튿날(6월 3일) 세자 양녕대군 제(褆)는 폐위당하고, 왕자 중 현명한 자를 선택한다는 ‘택현(擇賢)의 원칙’에 따라 충녕대군을 새로이 세자로 책봉하기에 이른다. 이는 마치 요(堯)임금이 아들 단주(丹朱)나 다른 이들을 물리치고 효행의 덕성으로 이름난 순(舜)에게 자리를 넘긴 것과 흡사하다고들 말한다. 일단 보기 좋은 결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왕위에 오른 세종은 재위 20년(1438) 12월 7일에 도승지 김돈에게 아버지 이방원 시대의 슬픈 가족사를 언급한다. 양녕대군의 어린 시절과 외삼촌인 민무구 형제들과의 관계를 회고했다.


“(형) 양녕대군이 외가에서 자랐는데, 여러 외삼촌들이 모두 양녕에게 마음을 쏟았다. 그때는 양녕의 실덕(失德)한 일이 드러나지 않았으나, 여러 아우들에게 퍽 시기하는 마음이 있어서, 말하는데도 드러났으므로 태종께서 화를 내시기도 했다. 하륜이 나의 외조부(민제)와 매우 교분이 두터웠으므로 매양 민씨를 옆에서 도와주었는데, 여러 외숙들이 광패하고 건방지고 무도하므로 이숙번이 힘써 민씨를 배척했다. 그래서 하륜과 이숙번이 붕당을 나누어 맞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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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양녕이 똑똑한 아우 충녕을 어려서부터 미워했다는 것이고, 또 뒷날 민씨 형제들과 어머니 원경왕후가 한패가 되어 태종을 밀어내고 양녕을 임금으로 세워 권력을 독점하려다가 일망타진된 사건이 일어났을 때, 하륜이 그 배후에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숙번이 민씨와 가까운 하륜을 미워하여 서로 붕당을 만들어 싸웠다는 것이다. 세종의 회고담은 왜 태종이 민무구 형제들을 대거 숙청하고, 또 왕비와도 사이가 나쁘고, 양녕까지 폐위하게 되었는지를 가정사를 통해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② 큰형 양녕의 실수가 그렇게 큰 죄인가

양녕대군(李褆, 이제)은 외모가 훤칠하고 장대하였다. 성미가 괄괄하고 성급한 면이 있었지만, 나이에 비해 성숙하여 아랫사람에게 어질고 착하였다.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법 학문도 좋아하였다. 그러나 실록의 기사에 보면, 양녕대군은 개와 매의 사냥에 문제가 있다고 하고, 여색을 좋아하여 초궁장, 어리 등과의 염문이 났다는 언급이 나온다. 또 양녕은 글공부에 태만하여 빈객 이래(李來)만 보면 머리가 아프다고 싫어하였다거나, 또 다른 빈객 변계량(卞季良)이 양녕과 충녕의 글공부 수준을 견주어 보려고 충녕의 보좌진에게 (충녕이) 읽는 것이 무슨 글인가 하고 물어서, 아무 글을 읽는다고 대답하면 반드시 칭찬하고 탄미하였다(태종 16/09/07)는 기사 일색이다.

실록을 적는 사관들이 세자 양녕의 실수를 꾸준히 들추어 반감을 눈덩이처럼 크게 부풀리면서 충녕의 반듯한 모습만을 의도적으로 적었다는 ‘합리적 의심’마저 들게 한다. 뒷날의 기록이나 전해 내려오는 몇몇 이야기에서는 모두 충녕, 뒷날의 세종을 위한 변명이거나 또는 세종의 우애에 대한 사실뿐이고, 또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두 왕자가 인품에 결함이 있어서 밀려나게 되었다는 믿을 만한 사실의 기록도 찾아보기가 어렵다. 역시 이러한 왕위 책정도 태종 이방원의 개인적인 궁리와 앞을 내다보는 예견에서 나왔으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양녕의 개와 매(鷹)에 관련된 사건이 곧 세자 양녕을 왕위 계승의 자리에서 몰아낼 만큼이나 흠잡을 만한 큰일이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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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붉은 감과 검은 까마귀 사건’은 세자 양녕에 대한 태종의 마음이 이미 떠났음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가을로 들어선 어느 날 태종은 대궐 마당 가장자리에 있는 감나무의 붉은 감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까마귀 떼들이 몰려와 마구 감을 쪼아먹었다. 태종은 활 잘 쏘는 사람을 시켜 화살을 쏘아 까마귀를 쫓으라고 명령했다. 좌우 근신들이 조정의 무인들 중에는 저 까마귀를 쏘아 떨어뜨릴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하면서, “다만 세자(양녕)께서만이 저 까마귀를 쏘아 떨어뜨릴 수 있을 것이옵니다” 하였다. 태종은 신하들의 말대로 세자 양녕을 불러서 붉은 감을 쪼고 있는 까마귀 떼를 쏘게 하였다. 양녕은 내리 두 번이나 연달아 까마귀를 쏘아 떨어뜨렸다. 이때 여러 신하의 칭찬은 대단하였으나 태종은 그저 조용히 웃기만 하였다. 이 이야기가 그릇 전해오는 이야기이든지 아니면 사실이든지 간에 태종의 마음은 뱃고동을 울리며 멀어지는 배처럼 세자 양녕에게서 떠나고 있었다.


태종 이방원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세자를 그대로 둘 것인가, 아니면 폐할 것인가. 그렇다면 누구를 세자로 삼을 것인가 고민하게 되었다. 이때 태종의 앞에 “너는 할 일이 없으니, 평안하게 즐기기나 해라”라고 말했던 셋째 아들 충녕의 반듯한 행동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③ 어린 세종, 충녕대군의 속마음이 궁금하다.

태종 15년(1415, 태종 49세, 세종 19세) 12월 30일, 충녕대군이 의령부원군 남재(南在)의 집에 가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당시 75세였던 남재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과 함께 죽은 남은(南誾)의 형이지만, 동생과는 달리 초연하여 태종과 가까운 사이였었다. 이때 남재는 충녕대군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건넨다.


“옛날에 주상(태종)께서 잠저에 계실 때 내가 학문을 권하니, 주상께서 말하기를, “왕자는 참여할 데가 없는데, 학문을 하여 무엇하겠느냐?”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군왕의 아들이 누군들 임금이 되지 못하겠습니까?” 했는데, 지금 대군(충녕)이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내 마음이 기쁩니다.”


뒤에 태종이 이 말을 듣고 크게 웃으며, “그 늙은이가 과감하구나”라고 하였다. 사실 세자를 바꾸려면 원로대신들의 추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절차인데, 남재가 그 길을 터주었으니, 태종의 마음이 어찌 기쁘지 않았겠는가. 과연 충녕에게도 임금이 되는 기회가 생길 것인가?

이번에는 태종 17년(1417, 태종 51세, 세종 21세) 10월 6일, 태종은 강무(講武)를 다녀온 후 풍년을 맞아 헌수하는 술자리를 마련한다. 이 자리에서 분위기는 마침내 충녕으로 세자교체가 시작됐음이 드러나고 동시에 좌의정 박은(朴訔)과 충녕의 장인 심온(沈溫) 간의 갈등 또한 시작된다. 박은이 세자 교체에 자신이 뭔가 역할을 했음을 충녕에게 알리려 했고, 심온은 그것을 막으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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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좌정승(左政丞) 박은이 심온과 더불어 말했다. “충녕대군이 뛰어나 중외에서 마음이 쏠리니 마땅히 말씀드려 처신할 바를 스스로 알게 해야 할 것이오.” 심온이 듣고서도 (대군에게) 말하지 않았다. 이날 상(태종)이 편히 기거하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나와서 큰 기둥 밖에 흩어져 앉았다. (이때를 틈타 드디어) 박은이 충녕대군과 더불어 말하고자 하니, 심온이 충녕대군에게 눈짓하여 일어나 피하게 하였다.

21살의 성년이 된 충녕대군 앞에 세상에서 부는 바람은 점차 자신을 새로운 동궁(東宮)으로, 이 나라의 차기 국왕으로 떠받드는 형국으로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1418년 6월 3일 세자 양녕은 폐위되고, 충녕대군이 새로이 세자로 책봉된다. 그럼 충녕은 언제부터 왕이 될 뜻을 세웠을까?


충녕의 문명(文名, 글을 잘하여 드러난 명성)은 타고난 듯하다. 그 천성이 몸 아픈 중에도 ‘구소수간’을 손에서 놓지 않고 글을 읽었을 정도로 대단하였는데, 드디어 충녕이 사서삼경의 하나인 <맹자>를 읽고 난 후 세상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이 바뀌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과연 충녕은 당시 혁명론자들의 필독서인 <맹자>를 읽었을까? 대답은 “예스”이다.

세종은 성장하는 동안 근면 성실한 생활을 하였고, 특히 책 읽는 습관이 있어 당대에 읽혔던 웬만한 경사(經史)의 서적들을 두루 읽었다. 또한 인내심이 많고 덕스러운 성품으로 주변의 기대를 받으며 자랐다. 더욱이 세종은 유교와 역사에 대한 각종 고전은 물론, 성리학으로 ‘유신의 교화’를 추구하였던 태종 시대에 강조하였던 <대학연의>와 <맹자>, <서경> 등과 같이 국가경영(Statecraft)과 관련된 책들을 많이 읽었다. 충녕이 <맹자>를 즐겨 읽었다는 것은 세종실록에 그 힌트가 있다.

세종은 재위 6년(1424) 7월 28일부터 <맹자>를 텍스트로 선정하여 경연을 시작하고, 20일이 지난 8월 19일 <맹자>를 마쳤다. 실록에는 이 기간 경연에 나아간 날짜가 10일로 기록되어 있다. 10번의 경연 끝에 <맹자>를 다 마쳤다면, 세종은 왕이 되기 전 이미 여러 번 <맹자>를 읽고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맹자>에 나오는 글들은 충녕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하지 않았을까.

“백성이 살아가는 도(道)는, 일정하게 먹고살 방도가 있어야 떳떳한 마음이 있고, 일정하게 먹고살 방도가 없으면 떳떳한 마음도 없는 법입니다(등문공 장구 상).”

“어진 정치는 반드시 (토지의) 경계를 다스림으로부터 시작되니, 경계를 다스림이 바르지 못하면 토지구획이 균등하지 못하고 곡식으로 주는 봉록이 공평치 못하게 된다(등문공 장구 상).”


“하늘이 장차 큰 임무를 이 사람에게 내리려 하실 적에는 반드시 먼저 그 심지(心志)를 괴롭게 하며 그 근골을 수고롭게 하며, 그 체부를 굶주리게 하며 그 몸을 궁핍하게 하여 행함에 그 하는 바를 불란(拂亂, 어그러짐)시키니, 이것은 마음을 분발시키고 성질을 참게 하여 그 능하지 못한 바를 증익(增益)하게 하려는 것이다(고자 장구 하).”

<맹자>가 어떤 책인가? 유학의 아성(亞聖), 중국 전국시대 맹자(孟子)가 자신의 논리인 균형과 화합의 왕도정치, 민본정치를 강조한 책이다. 특히 <맹자>는 고려말 충신 정몽주가 혁명가 정도전에게 읽으라고 주었던 책자이기도 하다. 옛사람들은 ‘성인의 도(道, 리더십)’를 구해 보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맹자>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라고들 했다. 또한 <맹자>를 읽으면, 세상을 바꾸겠다는 생각이 일어난다는 얘기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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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녕은 정직하고 부지런하며 일의 기미를 잘 파악하고 대체를 아는 총민한 왕자였다. 충녕은 <맹자>를 읽고 난 후 충격에 빠졌을 것이다. ‘생각의 전환’, 곧 패러다임 시프트가 일어난다. 처음에 충녕은 아버지 태종의 말씀대로 인생을 편안히 즐기려고 하였으나, <맹자>를 읽고 나서는 ‘충녕의 리더십 심지’가 불타올라서 이후 형 양녕의 비위 행위와 이를 지켜보는 조정 관료들의 탐탁지 않은 시선이 충녕의 마음을 변화시켰을 것이다. 세자 양녕은 충녕의 반면교사(反面敎師)였던 셈이다. 그 이후 충녕은 똘똘한 ‘넘버3’에서 믿음직한 ‘히든카드’로 패러다임을 바꿨으리라 예상된다. 그다음부터는 우리가 알듯이 충녕은 형 양녕에게 반듯한 행동을 주문하고, 아버지 태종에게 자신의 학문적 지식과 지혜를 드러내며, 신하들의 높은 명망(名望)도 얻게 된다.


충녕은 아버지 태종이 권도(權道)로 택현(擇賢)하여 세자가 되었다는 외현적인 이유보다는 <맹자>를 여러 번 읽고 난 후 스스로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지혜를 터득하여 정직하고 치밀하게 행동에 옮겼기에 선위(禪位)가 가능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그래서 왕이 된 충녕은 힌트를 남긴다. 그 즉위교서에서 <맹자>에 나오는 ‘발정시인(發政施仁)’을 인용하였고, 이를 앞뒤를 바꾸어 ‘시인발정(施仁發政)’, 즉 ‘어짊을 베풀어 정치를 일으킨다’는 정치 비전을 제시한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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