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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카이워커 Mar 19. 2023

[브레이킹 배드 리뷰] 윌터를 어쩌면 좋을까?

영원한 선도, 영원한 악도 없었다. 인간은 한없이 간사하기만 한 것을

(이 글을 미국드라마 브레이킹 배드에 대한 리뷰로, 시즌1~4 전반적인 내용에 대한 강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혹시라도 볼 계획이 있다면 완결까지 보고 와주세요!)


직장동료의 추천에 호기심이 생겨서 보기 시작한 미드가 있다. 브레이킹 배드. 이미 너무나도 유명하고, 나 빼고 다 알고 있었던 전설의 역대급 명작 시리즈다. 어떤 기대도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내 인생은 브레이킹 배드 시즌 1의 1화 재생버튼을 누르기 전과 후로 나뉜다.


밤마다 브레이킹 배드를 보느라 빼앗긴 잠만 40시간이 넘는 것 같다. 정신없이 달리고 휘몰아쳐서 시즌5를 보고 있는 지금, 그간의 윌터의 행적에 대한 리뷰를 써본다.


구불구불한 황무지 사잇길에 흙으로 난 도로, 가죽 벨트가 차인 베이지색 정장바지가 공기의 저항을 받아 양다리가 빵빵해진 채로 하늘에서 떨어진다. 그 위를 밟고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거대한 밴, 그 안에 무언가에 쫓기듯 다급하게 운전하는 방독면을 쓴 중년 남성. 이윽고 길에서 튕겨져 나가 나무와 충돌한 차량에서 하얀 팬티 차림의 남성이 빠져나온다. 이것이 바로 전설의 시작이다.


첫 장면의 충격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다급한 카메라 시점, 운전석 옆좌석에 기절해 있는 왜소한 체구의 남자와 밴 뒤쪽 바닥을 나뒹구는 시체 몇 구, 흥건한 피. 땀을 뻘뻘 흘리며 불안해하는, 나이가 들어 살이 처지고 근육은 없는 팬티바람의 이 중년 남성은 누구에게 쫓기고 있는 걸까? 누가 착한 놈이고 누가 나쁜 놈인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황무지 신을 이해하기 위해 50분을 내리 감상한 뒤에는 팬티바람의 남성 윌터 화이트가 폐암 말기에 걸렸고, 남은 시한부 인생 동안 가족들에게 뭐라도 남기기 위해 화학교사인 본인 능력치를 최대한 발휘해 순도 99%의 마약을 만들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로 윌터의 인생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동네 마약상 밑에서 고춧가루를 섞은 암페타민이나 제조하던 고등학교 제자 제시 핑크맨과 동업을 하게 되고, 사고로 그 마약상을 죽이게 되고, 시신을 플루오딘산(불소)에 녹여 완벽한 증거인멸까지 해낸다. 그리고 만난 투코라는 다른 마약상을 통해 딱 항암치료비만큼의 돈을 벌다가 투코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그 역시 사고로 죽음에 이르게 한다.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방사선치료로 인한 기억상실에 걸려 실종된 것처럼 일을 꾸며내기도 한다.


그즈음 돈만 주면 모든 일을 만능으로 처리해 주는 변호사 사울을 알게 되고, 사울을 통해 인연을 맺은 뉴멕시코 주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거물급 마약상 거스 프링 밑에서 일하게 되면서 윌터의 인생은 영원히 바뀌게 된다. 세탁공장 지하에 모든 것이 갖춰진 실험실에서 메스암페타민을 제조하며 일반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돈을 손에 쥐게 되는데 어쩐 일인지 큰돈을 만질수록 윌터의 자유는 위협되고, 가족들과 주변인의 목숨이 위험해진다. 시즌4는 자신의 고용주이자, 자신을 노예처럼 부리며 생명을 옥죄는 거스 프링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윌터의 발악이다.


사실 윌터에 대해서는 시즌1 때 자기 손으로 사람을 죽였을 때부터 고깝게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때는 죽이지 않으면 자기가 죽게 될 처지였고, 윌터의 사정이 딱했기 때문에, 그리고 윌터가 죄책감으로 괴로워하고 미안해하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에,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주인공에 대한 애정으로 윌터의 생존을 계속 응원했었다.


그러나 시즌4를 다 본 지금, 윌터에 대한 나의 마음은 ‘나쁜 놈, 언제 잡혀갈까'이다. 윌터는 더 이상 예전의 윌터가 아니다. 욕망과 공포에 회까닥 돌아버려서 본인 생존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거짓말을 밥먹듯이 한다.


특히 제시 핑크맨을 대하는 태도에서 간사함과 추악함이 여실 없이 드러나는데, 고등학교 스승이라는(이었던)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가스라이팅을 일삼는다. 일이 잘못되면 제시 탓으로 몰아가고, 자신의 말대로 했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 거라며 버럭 화를 내는 것이 내로남불의 끝판왕이고 분노조절장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는 툭하면 마약을 하고, 소리 지르며 욕을 해대는 제시가 더 구제불능으로 보였지만, 여러 사건을 대하는 둘의 모습을 계속 보다 윌터에 비해 제시는 선녀다. 자기가 피해를 준 사람들에게 제시는 동정심과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어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자책하고 괴로워하는 반면, 그것이 제시의 약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윌터는 시즌4 마지막에 제시를 이용하여 거스를 죽이는 데 성공한다.


윌터를 너무 까는 게 아니냐고? 시즌4의 레전드라고 꼽힐 은방울꽃(Rilly of the Valley)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다면 이 생각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제시의 마음을 이용해 거스 프링이 윌터가 제시에게 준 리신이라는 독약을 빼돌려 여자친구의 아들을 독살하려 했다고 믿게 만들고, 이후로 거스를 죽여야만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된 제시가 윌터의 치밀한 계획에 일조하게 만든다. 아이는 리신을 먹은 게 아니라 윌터가 준비한 은방울꽃의 독을 먹고 쓰러진 것이라는 사실은 시즌5에 윌터가 트렁크에 은방울꽃을 싣는 장면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시즌5에서의 윌터는 회차를 거듭할 수 욕망이라는 괴물에 먹혀버려 무엇이 소중한지, 감사한지도 모른 채 ‘성공한 나’에 취한 추한 인간이 된다. 영원히 이길 수 없었던 절대 강자인 거스 프링을 죽이고 난 뒤 마치 자기가 거스 프링인 양 행동한다. 은방울꽃 이후로 윌터에 남아있던 0.1%의 정이 다 떨어진 것은 아내 스카일러를 대하는 그의 태도가 180도 변한 것을 보고 나서다. 이전까지는 재미로 봤다면, 이제 윌터의 처참한 몰락과 처벌, 정의구현을 보고 싶어서 한 회 한 회 꾹 참고 보고 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윌터의 돈을 다 써버린 스카일러를 ‘용서‘해준다고 표현하질 않나, 생일에 초콜릿 케이크를 준비해 줬으면 좋겠다고 뻔뻔하게 말하질 않나, 스카일러의 의사를 존중해 환불했던 고급 스포츠카를 아들몫까지 두 대를 리스하여 당당히 집 앞에 주차해놓질 않나. 아내 위에 군림하려 하고, 더 이상 아내를 존중하지 않는다. 동생 마리에게 자신의 잘못은 쏙 빼놓고 아내의 바람을 고백하는 장면을 볼 때는 소시오패스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안타까운 것은 스카일러도 사실 떳떳할 수 없기에 이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한다. 윌터의 진실을 알게 된 후 남은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돈세탁에 가담하고, 범죄를 알면서도 눈감아준다. 이제 스카일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이들이라도 윌터에게서 떼어놓는 것. 그리고 윌터의 암이 재발하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것뿐이다.


시즌5 막바지를 앞두고 남은 이야기들을 어떻게 풀어갈지 기대가 된다. 개인적으로 윌터가 너무 혐오스러워서 얼른 진실이 드러나고 모든 것을 잃었으면, 더글로리의 박연진이 받은 벌보다 더한 벌을 받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주인공이고 이미 너무 많은 ‘가엾은’ 서사를 부여받은 윌터에게 그렇게까지 가혹하게 할지는 잘 모르겠다.


브레이킹 배드가 명작이라고 극찬받는 것에는 예측할 수 없는 전개가 한몫하는 것 같다. 아직도 결말이 어떻게 날지 전혀 상상이 안되고 누가 처벌을 받을지, 처벌을 받기나 할지 전혀 모르겠는 이유는 이 드라마가 권선징악이라는 단순한 주제를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등장인물 중에서 완전무결한 선함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는 것에 가깝다. 그것이 윌터뿐만 아니라 윌터 주변인물에게서 잘 묘사되는데, 도둑질을 알고 동생이 뉘우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던, 윌터의 만행을 알고 단번에 이혼을 결심한 철벽 같던 스카일러의 신념도 결국 자기 가족의 생존 앞에서 꺾여버렸다. 형사 남편을 둔 스카일러의 동생 마리도 옳은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서적으로 불안할 때면 도벽이 도진다. 제시 핑크맨은 자기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결국 아무 잘못 없는 게일의 머리를 쏴버린다. 윌터는 말할 것도 없다. 처음에는 ‘가족을 위해서’라는 대의가 있었지만, 점점 많은 돈을 벌고 원하던 것을 손에 쥐면서 가족은 없어지고 욕망만 남았다. 메스암페타민 제조를 멈출 수 없는 이유는 화학을 좋아해서, 돈을 벌고 싶어서가 아니다. 젊었을 적 자기가 세운 회사를 푼돈에 넘기고 나와야 했던, 이후 고등학교 교사와 세차장 알바를 병행하며 악착같이 버티며 살아야 했던 자신이 이루지 못한 대업에 대한 욕망일까. 그 대업이라는 것으로 인해 무고한 사람이 죽고 다쳐도, 심지어 어린아이가 죽어도 욕망에 잠식당한 윌터는 휘파람을 멈출 수 없다.


그 와중에 내가 가장 애정하고, 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주는 캐릭터는 마리의 남편이자 윌터의 동서, 마약단속국 부국장이 된 행크다. 거대한 몸뚱이와 투박하고 거친 말투, 마초스러운 행동이 매력적이지만 일을 할 때만큼은 누구보다도 섬세하여 단 한 톨의 단서도 놓지 않으려 한다. 잡은 일을 놓지 않으려는 끈기와 날카로운 추리력으로 하이젠버그를 턱밑까지 추격하며 숨통을 조여 온다. 비록 하이젠버그가 자신의 최측근, 아내의 언니의 남편이라는 사실은 절대 모르지만. 시즌5 중반까지 전개된 지금, 행크는 선과 악이 흙탕물처럼 섞여버린 아수라장에서 유일하게 선을 담당하는 것 같기도 하다. 조카인 윌터 주니어에게 ‘정직한 사람은 악에 물들지 않는다’라는 가르침을 주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권선징악’, ‘정의구현’이 주가 아닌 드라마에서 모든 것을 알게 된 행크가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해진다. 시청자의 바람대로 윌터의 모든 것을 파헤치고 벌을 내릴지, 가족이라는 명목으로 윌터를 보호할지, 혹은 끝내 윌터의 진실을 모른 채로 막이 내릴지 지켜봐야겠다.




사실 브레이킹 배드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양면성에 관한 통찰이 아닐까 싶다. 윌터가 점점 극단으로 치닫아서 그렇지, 원래는 정말 평범한 사람이었다. 평상시에는 이타적으로 행동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 ‘나‘를 위한 선택을 할 뿐이다. 인간은 한없이 나약하고 간사하여 언제든 윌터가 될 수 있다. 평생을 선하게 살아온 사람도 욕망에 먹혀버리면 누구든지 괴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나조차도 윌터를 이렇게 비난하지만 내가 윌터의 상황이었다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마침내 나를 위협하는 절대강자를 내손으로 제거했을 때,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오만함을 짓누르고 하는 일을 그만둔 채 가족들 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내가 스카일러의 입장이라면, 대학교 입학을 앞둔 아들과 갓 낳은 딸이 있는 상황에서 남편이 가져다주는 돈이 알고 보니 온갖 범죄로 얻은 부당한 돈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자식들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범죄자의 가족이라는 불명예를 감수하면서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경찰에 넘길 수 있을까? 우리는 그것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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