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부터 SNS 카드 뉴스까지
주로 글이라는 수단을 활용해서, 콘텐츠를 만들고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전하는 일을 해오면서 가장 크게 느꼈던 부분은 역시 이야기의 힘이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솔루션을 이야기할 때에도,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와 학대피해아동의 이야기를 전할 때에도 이야기가 가진 힘이 참 강력하다는 생각을 했다.
"인류의 공감 능력은 어떻게 향상되는가는 결국 이야기가 많이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이야기는 우리가 전혀 상관없는 사람에게 공감하고 감동하게 만들지 않냐" - 김영하(작가)
이야기를 접한 사람들은 자신과 전혀 관련 없는 사람들의 삶에 기뻐하고, 공감하며, 실제 행동으로 자신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보고 소셜 벤처 창업을 꿈꾼다거나,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이야기를 보고 수요집회에 참석하거나 소녀상을 찾아가는 일들이다.
이야기는 고대의 전설이나,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가 아니더라도 일상 속에 빼곡하게 자리 잡고 있다. 우리가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가는 SNS 역시 아주 강력한 이야기 채널인데, 고대의 전설이나 천만 관객 영화 역시 사람의 '입', 그리고 '영화관'이라는 채널을 통해 전해진 이야기이듯, SNS는 요즘 시대의 다채로운 이야기 채널 중 하나인 셈이다. (그것도 아주 쉽고,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SNS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들이라고 하여 그 정도가 가벼운 것만은 아니다. 나 역시 SNS를 통해 많은 이야기를 전했는데,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던 카드 뉴스들은 주로 히어로즈 저니(hero's journey)라는 스토리텔링 기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이 스토리텔링 방식은 천만 영화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히어로즈 저니(hero's journey)의 12단계 구성
1. 평범한 일상
2. 모험으로의 초대
3. 모험 거부
4. 스승 혹은 현자와의 만남
5. 사건 발생
6. 숙적과의 싸움, 동료와의 만남
7. 이야기의 심연
8. 최대의 시련
9. 승리
10. 귀로
11. 부활
12. 귀환
*12단계를 모두 따르지 않고 조금씩 변형하여 차용하는 방식도 있다.
이러한 스토리텔링 방식은 그리스 신화를 시작으로 여러 신화에 공통적으로 포함되어 있어 '신화의 법칙'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실제로 이 법칙을 발견한 사람은 죠셉 캠벨이라는 신화학자이다.) 히어로즈 저니(hero's journey) 중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스타워즈, 반지의 제왕, 스파이더맨 등이 있다. 특히 이 중에서도 반지의 제왕은 히어로즈 저니(hero's journey) 구성을 아주 정석대로 구현한 작품이고, 스파이더맨을 비롯한 마블 캐릭터들도 대체로 이러한 흐름을 따른다.
반지의 제왕이나 신화 같은 이야기까지 나왔지만 사실 스토리텔링, 그러니까 이야기를 전한다는 것의 사전적 의미는 '전하고 싶은 생각이나 콘셉트를 상기시키는 인상적인 체험담, 에피소드 등의 이야기를 인용함으로 청자에게 강하게 인상을 심는 수법'이다. 중요한 건 내가 전하고자 하는 생각이나 콘셉트를 청자에게 강하게 심어주는 것이 핵심이다.
요리로 치자면, 저 사람에게 달콤함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 요리(=스토리텔링)를 했고, 그 음식 재료(=에피소드)를 어떤 걸 고를지 고민하는 셈이다. 그 과정에서 애피타이저를 준비하고, 멋진 음악을 연주하고, 아주 좋은 식재료를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먹는 사람(=이야기의 청자)이 달콤함을 느낄 수 있는가가 가장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그런 측면에서 카피라이터 정철 님의 사례는 아주 간결하면서도 훌륭한 스토리텔링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살고 있던 아파트 앞에 초고층 빌딩이 세워질 기미가 보이자 입주자들이 모여서 현수막을 쓰자고 의견을 모았고, 그 현수막을 작성하는 사람으로 카피라이터였던 정철 님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그가 쓴 카피는 다음과 같다.
아이들이 햇볕을 받고 자랄 수 있게 한 뼘만 비켜지어주세요
저 한 줄의 카피는 스토리텔링 측면에서 정말 간결하면서 많은 것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위에서 요리로 스토리텔링을 빗대어 이야기했으니 굳이 음식으로 말하자면 작지만 꽉 찬 에너지바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짧은 글 속에 전하고 싶은 생각과 콘셉트를 상기시키는 이야기를 인용해서 청자(=건설업체)에게 강하게 인상을 심어주었다. 햇볕을 받지 못하고 자라는 아이들의 하루가 머릿속에 그려지고, 자연스럽게 해당 아파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아이들에게 대한 공감이 생겨난다. 실제로 해당 건설사는 마을 입주민들과 논의를 통해 아이들이 햇볕을 받지 못하고 자라는 일이 없도록 건설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이야기는 타인에 대한 '공감'을 가능하게 해준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이야기는 영화 '아이캔 스피크'이다. 영화적인 과장이 조금은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제훈이 갑자기 미국 의회에 등장한다거나) 그럼에도 아이캔 스피크를 통해 우리는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삶에 조금 더 공감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더욱 좋아하는 이유는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뿐만 아니라, 누군가 그저 늙은이라고 무시하던 할머니와 할아버지들 역시 각자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라는 메시지를 느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학대피해아동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하면 좋을까 하는 고민에 빠져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사람들이 학대피해아동의 상황에 공감하여, 문제 해결을 위한 행동에 동참할 수 있도록 유도할까 하는 고민이다. 이야기를 통해 공감을 확장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실제적인 이야기를 하기에도 참 어렵고, 수박 겉핥기 식의 보편적인 이야기를 구구절절 나열하는 것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지 못할 확률이 높다.
재미없는 이야기를 남발하는 것은 오히려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한다. 이야기를 여러 번 접해도 흥미가 안 생기는 청자가 이야기의 소재 자체에 대한 매력이 없는 거라고 판단하게 느낄 수도 있으니까. 언젠가 학대피해아동을 주인공으로 하는, 혹은 학대피해아동으로서의 과거를 가진 슈퍼히어로의 이야기가 퍼지는 날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리고 그때에 나는 어떤 이야기를 함께 해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