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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민 Sep 09. 2022

비교,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

요상스러운 인간의 마음과 그것을 이겨내기 위한 I형의 계획

어느덧 9월이다. 요즘 서울 하늘은 5년 전 노스캐롤라이나 하늘처럼 파랗다. 


MBA 1학년 가을학기 첫날, 파란 하늘과 쨍쨍한 햇빛이 유난히도 기억에 남는 날이었다. 청명한 날씨와 반대로 학교 안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일촉즉발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인가 싶은 느낌. 


포문은 아마존이 열었다. 미 서부 시애틀에 본사를 두고 있는 이 거대한 테크 기업은 리쿠르팅을 위해 대륙을 가로질러 남부 더럼까지 내려왔다. 아직 학교에 들어온 지 몇 달 되지 않아 어리버리한 건 나뿐이었는지, 다들 아마존이 개최한 취업설명회에 가려고 바쁘게들 채비 중이었다. 


"JM, 너는 안가? 아, 너는 안 가도 되지... lucky sponsor."


동기는 부럽다고 말하고 있었으나, 눈은 묘하게 차가웠다. 전쟁터에 왔으나, 정작 전쟁에는 참전하지 않고 있는 자를 보는 것처럼. 




MBA 학생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스폰서'와 '비스폰서'다. 전자는 이전에 다니던 직장으로부터 2년간의 학위과정에 대한 경비를 지원받기로 하고(스폰서십) 학교에 오는 학생이고, 후자는 그동안의 직장생활을 통해 모은 돈 또는 가족의 지원, 장학금(스칼라십) 등의 뒷받침을 통해 자비로 MBA에 진학하는 학생이다. 이러한 구분은 비단 한국 학생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고, 미국이나 다른 나라 학생들의 경우에도 대동소이하다. 스폰서십을 받은 학생일 경우 회사와의 계약에 따라 보통 졸업 후에는 다니던 직장으로 복귀하여 학업 수행을 위해 재정적 지원을 받은 기간만큼 또는 그 기간 이상 근무한다.  


자비로 MBA에 진학한 학생들과 스폰서 학생들 간에 묘한 기류가 흐르는 것은 리쿠르팅 단계에 본격적으로 돌입하는 시점부터다. 졸업 후 돌아갈 직장이 있는 스폰서 학생들의 경우 치열한 리쿠르팅 프로세스에 참여할 동기가 크지 않다. 물론 회사에서 지원받은 비용을 토해내고 리쿠르팅 프로세스를 밟아 새로운 직장으로 옮기는 경우도 없진 않지만, 비중이 크지는 않다. 


전문대학원인 경영대학원의 학비는 만만치 않다. 2022년 기준으로 2년 풀타임 MBA 과정을 진학할 경우 학비만 14만 달러, 요즘 환율로 약 2억 원에 달하는 금액이 소요된다. 물론 이건 학비만이고, 여기에 2년간의 현지 생활비가 추가로 든다. 싱글이면 그나마 덜하겠지만, 가족을 이룬 상태라면 부담이 더 커진다. 풀타임 학생으로 공부하는 동안 포기해야 하는 수입도 기회비용으로서 고려해야 한다. 물론 MBA에 합격하고 나면 상황에 따라 학교로부터 이런저런 형태의 장학금 또는 학자금 대출 혜택을 받을 수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적잖은 재정적 부담이 생기는 것이 사실이다. 


학교에서 제공하는 온라인 취업 게시판에는 시시각각 설명회를 개최하는 회사들 이름이 올라왔다. 투자은행이나 전략 컨설팅 회사들 같이 전통적으로 MBA를 인재 확보 루트로 활용하는 업종들부터 아마존,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대형 테크 회사들, 그리고 생전 처음 들어보는 미국 회사들까지 수백 개의 회사들 리스트가 매일같이 업데이트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중 대부분이 미국에 상장된 회사들, 그중에서도 상위 500대 기업인 S&P500에 포함되는 회사들이었다. 태어나 한국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내게만 생소했을 뿐.) 


학교 수업을 따라가는 동시에 리쿠르팅도 병행해야 하는 첫 학기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도 그럴 것이, 입학하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입학하자마자 새로운 경쟁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력서와 커버레터를 지원하는 회사에 맞춰 수정하고, 본인이 원하는 회사 출신 인터뷰어들이 학교를 방문할 경우 얼굴도장도 꼬박꼬박 찍어야 한다. 짧은 만남의 순간 동안 자신을 어필하기 위한 엘리베이터 피치도 준비해야 함은 물론이다. 낯선 이국에서, 하나같이 훌륭한 동기들 사이에서 경쟁을 이겨내야 하는 상황은 적잖은 심적 부담이 된다. 


그런데 그렇게 한창 인터뷰 준비를 하다 옆을 보면 스폰 출신들이 있는 거다. 리쿠르팅이라는 거대한 부담에서 자유로운. 좋겠다, 부럽다, 농반진반으로 이런 말이 안 나오는 것이 어쩌면 이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스폰서십을 받고 온 학생에게도 전혀 고민이 없는 건 아니다. 그 입장에서 겪어 보니 그랬다. 비유해서 설명하자면 주식과 2년 만기 예금 같은 차이랄까. 


비스폰 학생들의 경우 처음 시작은 비슷하지만, 치열한 리쿠르팅 과정을 통해 여름 인턴십을 확보하고, 취업 제안(Job Offer)을 받고 나면 이전과는 업종도, 지역도, 처우 수준도 모두 달라진다. 물론 모든 학생들이 처음 입학했을 때 원하던 바를 이루는 것은 아니지만, 2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과거보다 나은 환경을 맞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마치 주식처럼, 위와 아래로 모두 방향이 열려있는 구조다. 잘되면 뉴욕의 투자은행에서, 실리콘밸리의 빅테크 기업에서 몇 배의 연봉을 받고 일하면서 글로벌 인재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그런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적잖은 비용 지출과 커리어에 대한 위험부담을 감수하고 더 나은 인생을 위해 과감히 베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스폰서십을 받고 진학한 학생들은 2년 후의 미래가 정해져 있다. 졸업 후에는 전에 일했던 곳과 같은 직장으로 돌아간다. 속해있는 회사 환경에 따라 다를 수는 있겠지만, 대체로 자비 학생들처럼 드라마틱한 변화가 일어나진 않는다. 큰 위험은 없지만 큰 변화도 기대하기 어려운, 만기 이자율이 정해져 있는 정기예금 같은 구조다. 


채권 투자자와 주식투자자의 성격이 다르고, 기대도 서로 다른 것처럼 스폰과 비스폰은 2년간의 MBA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경험도 다르다. 그래서 시기에 따라 서로가 부러울 때가 생긴다. 1학년 때 고달픈 비스폰은 스폰이 부럽고, 2학년 때 다시 원대복귀(?) 해야 하는 스폰은 졸업 후 미국에서 시작할 새로운 삶을 앞두고 가슴이 부풀어있는 스폰을 보며 부러워한다. 원래 어디서든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법이니까. 




동기들이 치열하게 리쿠르팅 전쟁을 벌이던 그 가을, 나는 스폰서십을 받아 온 늦깎이 학생으로서 고민했다. 앞으로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머지않은 미래에 JP모건과 맥킨지와 애플과 구글에서 일하게 될 동기들과 매일같이 부대끼는 날도 언젠가는 끝이 난다. 어찌 보면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존재하지 않았고, 어쩌면 앞으로도 다시없을 배움과 성찰의 순간이다. 그저 걔가 부럽네 쟤는 더 부럽네 하고 계속 비교만 하며 지낼 수는 없었다. 


비교할수록 나만 작아지고 상처받을 뿐이다. 스스로 자유로워져야 했다. 


그 가을의 결론은, 최대한 다양한 경험을, 이곳에서 아니면 할 수 없는 경험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경험하지 않은 것을 생각하기는 어렵다.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만들기 전에 사람들은 아이폰을 생각해낼 수 없었다. 새로운 경험을 하면 할수록, 앎은 조금씩 쌓여간다. 그 속에서, 그전에는 미처 상상해보지 못한 것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었다. 회사와 2년 후에 돌아가기로 약속하고 미국 땅에 발을 내디뎠는데, 나를 믿어준 회사와의 약속을 깨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기간 동안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하며 나를 성장시키는 것, 그것이 회사에게도, 내게도 모두 윈윈인 결과일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당장 할 수 없는 일을 무작정 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할 수 있는 일부터 찾아보자 싶었다. 점점 해가 짧아지고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던 어느 가을날, 나는 내 방 모니터 위에 엑셀 파일을 열고 'MBA 버킷리스트'라는 이름의 제목을 달았다. 그리고 2년간의 미국 생활 동안 내가 경험하고 싶은 것들을 하나씩 둘씩 담아두기 시작했다. 뼛속까지 I형답게. 



* Photo by negar nikkhah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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