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한 인생, 마지막에 보고 싶은 것은
1.
토요일이었다. 시작은 친구로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에서였다. 시간이 얼마나 남아도는지 내가 가끔씩 페북에 올리는 글을 꼬박꼬박 좋아요 눌러주는 것도 모자라 선공유 후감상한다고 댓글까지 달아주는 불알친구. 이 녀석이 다짜고짜 전화통에 대고 하는 말이 엄청 울었단다. MBC <놀면 뭐하니?> 환불 원정대 편을 보다 울음보가 터졌다고 한다. (사회적 위신을 생각하여 구체적인 직업까진 노출하지 않겠다. 네 계급을 하늘같이 쳐다볼 사병들은 뭐라 생각하겠니. 보고 있나 J?)
김태호 PD의 환불 원정대가 싹쓰리에 이어 화제를 몰고 다니는 것은 뉴스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실시간 본방사수까지 할 처지는 아니었다.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양쪽에 참새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아이들 입 안에 억지로 밥숟가락을 퍼넣고 있었다. 주말 저녁 프라임 타임에 내가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본 게 과연 언제적인가. 나로서의 나보다 부모로서의 내 모습이 이젠 더 낯익다.
서둘러 전화를 끊고 아이들을 씻기고 재우고 나서야 자리에 누웠는데, 문득 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포이즌>을 부르던 엄정화 뒤로 김종민이 몰래 등장해서 같이 춤을 추는데 그게 그렇게 뭉클하더란다. 하, 언제적 포이즌이고, 언제적 브이맨이야.
그런데 옛 기억들이 몽글몽글 꼬리에 꼬리를 물더니 잠기운을 쫓아냈다. 이 녀석과 같이 부대끼던 고등학교 시절로 헤엄쳐간다. 엄정화라... 엄정화 하면 누가 뭐래도 S지. 걔만큼 열과 성을 다해 엄정화를 모시던 애가 또 있었을까. 모두가 SES, 핑클, 베이비복스에 환장할 때 꿋꿋이 엄정화를 사수하던 S의 단호한 얼굴이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야수같은 몸뚱이로 <배반의 장미>를 추던 그 녀석의 춤사위에 다들 눈을 찌푸렸지만, 아마도 꽤 많은 동기생들이 환불 원정대를 접하는 순간 S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나처럼.
엄정화의 전성기는 1997년부터 1999년까지, 그러니까 <배반의 장미>, <말해줘>, <포이즌>, <초대>, <페스티벌>로 이어지는 시기였다. 정확히 내 고등학교 학창 시절을 관통하는 시기. 어느새 20년도 훌쩍 넘은 과거 일이다. 그때의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는 건 온통 땀냄새 뿐인데. 남자애들이 쨍쨍 내리쬐는 햇볕 아래 땀냄새 폴폴 풍기던, 볼 차다가 종 치면 정신없이 수돗가로 달려들어 웃통 벗고 등목 하던 여드름 투성이 남고생들의 세계.
그 세계 속으로 엄정화를 좋아하던 S의 댄스와, 그 주변에 둘러앉아 못 볼 꼴 봤다며 거칠게 야유를 퍼붓던 다른 친구들의 모습이 소환됐다. 다들 우락부락했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애써 기억 속을 헤집어 다시 들여다보니 모두 10대 후반 꽃 같은 시간을 지나고 있는 아이들이다. 앳된 청춘들이었다. 지금은 다들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김태호 PD는 <싹쓰리>에 이어 <환불 원정대>를 기획하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좀 더 순수했던 시절에 대한 환기? 레트로 유행에 맞춘 추억의 리커버? 아니면 그만의 방식으로 3040세대들에게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 그게 무엇이든 친구는 김종민의 등장과 엄정화의 놀람에 뭉클하며 반응했다. 코드를 제대로 짚은 셈이다. 프로듀서는 시청자들이 20여 년간 아등바등 살아오면서 어느 순간 놓치고 있었던, 어느 어렸던 날의 어떤 기억과 느닷없이 마주하는 공간을 프로그램 속에 만들어냈다. 그 시절과 마주할 준비가 미처 안된 상태에서 기억들이 온통 밀려들어왔기 때문에 데면데면한 마흔 살 남자 눈물샘까지 터지지 않았을까.
잠자기는 이미 글러서 자리에서 일어나 웨이브로 본편을 찾아보았다. 울컥은 하지만 뭐 베리 울컥은 아닌데 J가 좀 오버했네. 신원호 PD의 <응답하라> 시리즈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역시 비슷한 세대라서? 2030을 타깃으로 하여 화사와 제시를, 3040을 위해 엄정화와 이효리를 배치한 것은 영민한 선택이다. 이 정도 조합이면 BTS와 임영웅 팬덤 빼고는 다 붙잡아둘 수 있겠다.
2.
<커피프린스 1호점>의 배우들이 나와 2007년의 그 드라마를 다시 보며 다큐를 찍는다고 하여, 이번엔 본방사수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역시나, 불가능한 일이다. 어쨌든, 조금 늦었지만 꾸역꾸역 찾아보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커피프린스니까.
사실, 방영되던 2007년 여름에 죽자고 찾아본 드라마는 아니었다. 이선균이 부른 <바다여행>을 즐겨 불렀고, 드라마가 끝난 후 명소가 된 홍대 커피프린스 카페를 가끔 찾았을 뿐. 그래도, 다큐를 보다 보니 그 시기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정말, 잠시나마 젊어졌다. 드라마 속 최한결과, 고은찬과 함께.
다큐에서 공유는, 윤은혜는, 이선균은, 채정안은 모두 놀란다. 다들 '젊다...', '젊었네...!'를 연발하며 옛날 젊은 자신들이 찍은 드라마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본다. 드라마와 다큐는 교차 편집되며 20대와 40대의 공유를 비춘다. 20대 시절은 언제나 다시 꺼내봐도 아름답다. 나도 그랬다. 여느 때처럼 공유에 빠져 있는 옆자리 아내도 그런 눈치다.
2007년은 싱그러웠다. 회사에 갓 입사한 신입사원이었고, 주위의 모든 게 새로웠다. 주머니는 학생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두둑해져서, 홍대를 지나다 옷을 사 입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셔도 거리낄 게 없었다. 젊었다. 열세 해가 지난 지금 보면 여러모로 여전히 많이 부족하지만, 그걸 보상하고도 남을 만큼의 젊음이 그득했다.
주인공들의 풋풋한 사랑 모습도 여전히 좋다. 그런데 그때의 좋음과 지금의 좋음은 조금은 다른 느낌이다. 다큐에 등장한 공유와 윤은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나 보다. 그때 이해 안 되던 최한결의 감정을, 고은찬의 감정을 지금은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십수 년 세월을 지나며 쌓아온 그들의 경험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기분이었다.
"20대 공유보다, 40대 공유가 낫네"
아내는 쿨하게 인물평을 하고 TV를 끈다. 동감이다. 내가 봐도, 20대 탱탱한 피부의 공유보다 지금의 공유가 한결 낫다. 주름이 (아주 조금) 늘었지만, 넉넉한 품성과 여유가 자리하고 있다. 최한결처럼 불같은 사랑은 하지 못하겠지만, 꼭 그것만이 삶의 전부는 아니라는 걸 깨달은 자의 얼굴이다. 그러고 보니 다들 그렇다. 윤은혜도, 이선균도, 채정안도 모두. 다들 이렇게 계속 잘 성장하고 있구나. 30대, 40대가 되어서도.
3.
엄정화의 부캐 이름이 만옥이다. 만옥이라... 장만옥을 애정하는 건 유재석인가 아님 김태호 PD인가. 홍콩 스타일 스틸컷까지 쓴 것 보면 확실히 둘 중 하나일 것 같긴 한데.
갑자기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웨이브에서 <아비정전>을 찾아보았다. 설명할 필요 없이 워낙 유명한 영화다. 아마도 내 주변 사람들 중 내가 가장 나중에 본 사람이 아닐까 슬쩍 소심해진다. 딱히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왕가위 영화가 보고 싶어졌고, DVD를 켤 필요 없이 스트리밍으로 즉시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비정전>과 <열혈남아> 뿐이었다.
영화가 개봉한 1990년대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20대의 장만옥, 30대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장국영과 유덕화의 마스크는 여전히 숨이 멎을 만큼 젊고 멋지다. (이런 영화를 지금 보다니 제정신이야? 그동안 뭐하고 산거야 나?)
만옥을 보려고 켰는데 정작 계속 눈이 가는 건 아비(장국영)다. 아비는 내내 슬프다. 소려진(장만옥)에게 속삭일 때도 슬프고, 맘보춤을 출 때도 슬프고, 나중에 죽어갈 때도 슬프다. 슬픔이 전염되어 오는 속도가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 커피프린스의 밝음과는 사뭇 다른, 젊음의 또다른 모습.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다 슬픔을 안고 살기 때문인지도.
보는 내내 슬픈 건, 장국영이 40대에 세상을 등졌다는 사실을 영화 시작부터 알고 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마흔여섯이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아주 많은 나이도 아닌데. 지금의 공유보다 고작 몇 살 더 많은, 이선균과 비슷한 나이인데.
마지막 장면, 아비(장국영)는 자기를 곤경에 빠뜨린 아비를 원망하는 경관(유덕화)에게 죽기 직전 이렇게 답한다.
(경관) 당신은 정말 별종이군! 삶을 걱정 안 하나? 난 먹고살기 위해 일해야 해. 모르겠어?
(아비) 죽을 걸 몰라? 사람은 쉽게 죽지. 열차 사고가 날 수도 있고. 어떻게 그걸 미리 알지?
(경관이 자리를 비운 사이, 아비가 괴한에게 총을 맞는다.)
(아비) 생이 끝날 때 뭘 보고 싶을 것 같아?
(경관) 인생은 길지. 보고 싶은 것도 많은데. 몰라. 나도 모르겠어.
(아비) 생각해 봐. 당신 직업이 단순하니. 인생은 결코 긴 게 아냐. 잘 생각해봐.
10대를 지나, 20대를 거쳐, 30대를 넘어, 40대에 이르고 있다. 어쨌거나 끝이 있는 유한한 삶이다. 아비의 말을 떠올려본다. 인생이 결코 길지 않은데, 나는 생이 끝날 때 무엇을 보고 싶은가.
아닌 밤중에 엄정화와 고은찬과 장만옥을 거쳐 아비에게까지 달려가 닿았다. 좀 머쓱하지만 어쨌든 고마워할 일이다. 고맙다 친구들. (그래도 생의 끝에 S의 엄정화 댄스가 생각난다면 아무래도 그건 좀 슬플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