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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민 Dec 21. 2021

동해안 삼각지대

사이드 프로젝트로 써내려 간 초단편소설과 후기

1.


1947년 봄, 오사카(大阪).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하고 미국의 군정을 받고 있었다. 도시 전체에 우울한 기운이 넘실대는 시기였지만 와타루(航)는 이제 갓 열아홉, 뭐든 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 4월도 되고 했으니 기분전환 겸 사진이나 한 장 찍으러 갈까?"


일요일 아침, 와타루는 근처 사진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깃집에서 일하며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늘 눈여겨만 보던 근사한 양복을 한 벌 빼입은 참이었다. 식당에서의 일은 꽤 고된 편이었지만 전쟁이 끝나기 전에 일했던 탄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와타루는 사진관 문을 열고 들어섰다. 화창한 햇살이 사진관 문에 반사되어 눈부신 날이었다.


문을 열어 준 사진관 주인은 아직 잠이 덜 깬 듯한 표정이었다. 사진기를 만지작거리더니 케리 그랜트처럼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멋지게 폼을 잡은 와타루의 사진을 한 장 찍어 주었다. 며칠 뒤 찾아오면 기똥찬 사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며 엄지를 치켜드는 사진관 주인을 보며 와타루의 입가도 반달 모양으로 변했다. 와타루는 일 엔짜리 빳빳한 지폐 한 장을 꺼냈다. 한 달 뼈 빠지게 일해 버는 돈이 십 엔인데 일 엔을 팁으로 턱 내놓다니... 와타루는 자신의 호기로움에 스스로 놀랐다. 잠시나마 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2.


일주일 후, 와타루는 다시 사진관에 들렀다. 그런데 사진관이 휑하니 비어 있었다. 어라...? 먹튀야? 내 사진은? 내 돈은? 이런 젠장!


3.


1947년 여름, 충남 공주(公州).


순이는 읍내에 새 사진관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 갓 열여섯, 딸 부잣집 맏딸로 자라며 늘 자기 것 하나 내세우지 않고 자란 순이였지만 이번에는 묘하게도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동생들이 정신없이 고무줄놀이를 하며 노는 사이 순이는 혼자 창밖에서 몰래 사진관을 엿보다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아가씨, 사진 찍으러 오셨수? 들어오슈 예쁘게 찍어드릴게.”

순이는 무언가에 홀린 듯 사진관 문턱을 넘었다. 그리고는 저고리 속주머니에 늘 지니고 있던 쌈짓돈을 꺼내 주인에게 건넸다. 저기 의자에 한 번 앉아보라는 주인의 말에 순이는 고개를 돌려 자줏빛 의자를 쳐다보았다. 저기 앉아 사진을 찍으면, 지금 이 순간의 내 모습을 늘 지닐 수 있다는 것일까?


순이는 순간, 은빛 사진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이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겠다고? 미쳤지, 미쳤어!’


순이는 주인에게 통사정하기 시작했다.


“어르신, 제가 눈에 뭐가 씌었었나 봐유. 돈 돌려주세유. 어머니께 걸리면 저 죽어유!”


“아가씨, 한 번 받은 돈은 돌려줄 수 없어. 대신 좋은 걸 하나 줄게.”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주인은 젊은 남자의 사진 한 장을 건넸다. 순이는 안 받겠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실눈으로 본 사진 속 남자의 모습이 과히 싫지만은 않았다.


“오늘 밤 열두 시에 이 사진을 가지고 여기로 오면 재미있는 광경을 볼 수 있을 거야.”


4.


순이는 거짓말처럼 한밤중에 눈을 떴다.


동생들은 세상모르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진짜 가볼까. 사진관까지는 오 리 남짓이었다. 장맛비가 한차례 몰아치긴 했지만, 달빛에 의지하면 한 시간 남짓이면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내일모레면 혼사를 치러도 될 만큼 컸는데 대체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지만, 혹시나 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호롱불을 들고 길을 나섰다.


5.


“끼익”


순이는 문을 밀었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그런데 마룻바닥이 축축이 젖어 있었다. 비가 내려 그런가...? 몇 발짝 더 들어가 보자고 발을 내디딘 순간, 첨벙 소리가 들렸다. 뭐지? 잘못 들었나?


순이의 눈앞에 시퍼런 물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제야 처얼썩 처얼썩 하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이게 빨래터 아주머니들께 말로만 듣던 그 파도 소리야? 바다라는 거야?


시퍼런 바닷물은 끝이 없었다. 그런데, 바닷가 한쪽 끝에서 누군가가 허우적대고 있는 게 보였다. 앗, 그 남자다! 포마드 기름을 머리에 잔뜩 바른 사진 속 그 남자!

고무신 속으로 짠내 가득한 바닷물이 쉴 새 없이 몰려들고 있었지만, 순이는 그저 멍하니 그 남자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6.


와타루는 밤새 기다릴 참이었다. 중학교에 다닐 때 읽은 어느 서양 추리소설을 떠올렸다.


‘범인은 한 번은 범행 장소를 들른다고 했어.’


끼니를 걸러 조금 배가 고팠지만, 와타루는 꾹 참았다. 아니 그 사진이 어떤 사진인데. 자그마치 일 엔짜리 사진이었다. 그 사진만 보여주면 늘 자기를 애타게 하는 식당 주인 딸 모모코가 마음을 열어 줄지도 모르는데!


와타루는 잠깐 잠이 들었다 깼다. 밖은 이미 어둑어둑했다. 마룻바닥이 점점 젖어들고 있었다. 봄비가 내렸나...? 여름 장마도 아니고 이 정도로 젖지는 않을 텐데.


...라고 생각하는 순간 물은 순식간에 불어 올랐다. 어어...? 살려줘!


7.


2047년 여름, 미국 샌프란시스코(SF).


“일론, 이게 정말 가능하겠어?”


환은 물었다. 일론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환의 어깨를 두드렸다.


“환, Don’t Worry. 이 업그레이드 하이퍼루프라면 분명히 네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거야.”


지난 한 세기 동안 이미 수많은 지구인을 화성으로 이주시킨 일론 일가의 기술력을 못 믿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을 거스른다니, 환의 인지능력으로는 쉬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뭐 어쩌겠나. 환과 아내 현에게는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


“버뮤다 삼각지대라는 거 역사책에서 들어본 기억 없어? 배랑 비행기가 사라진다고 하는 공간 말이야. 지난 세기의 미국 정부는 단순한 사고라고 발표했지만, 실제로는 그거 우리가 만든 거야. 동해에도 똑같은 형태로 베타 버전을 만들어둔 게 있어. 작동할지는 좀 두고 봐야 하지만. 환, 네가 첫 번째 클라이언트야.”


일론은 샌프란시스코를 본사로 삼고 있는 글로벌 기술기업 T의 수장이었다. 단순한 재벌 2세라기보다는 선대부터 자율주행과 우주기술을 통해 수억 명의 지구인들을 운전과 기후변화 문제로부터 해방시킨, 인류의 선지자처럼 추앙받는 존재였다.


환은 그런 일론의 둘도 없는 대학 동창이었다. 학생 때는 일론이 그렇게 잘 나가는 친구일 줄은 물론 몰랐다. 그저 한국 사회에 피로감을 느껴 미국으로 이민을 결정한 부모님의 결정과, 대학 때 외골수여서 친구가 없었던 일론과 함께 작은 스타트업을 창업했던 경험이 십여 년이 지나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자, 이제 시작한다. 이걸 써봐.” 일론은 F1 레이싱 선수 헬멧 같은 걸 하나 건네줬다.


푸른 바다가 보였다. 그리고는 환은 곧 젊은 남자와 여자를 보았다.


8.


‘남자를 구해야 해!’


순이는 반사적으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금강변 물가에서 놀다 빠진 동생들을 여러 번 건져 올린 적이 있었다. 어쩌자고 사진관 속에 바다가 있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사람부터 살리고 봐야 했다.


“이봐요... 괜찮으세요?”


흠뻑 젖은 양복 차림의 남자는 꼴이 영 말이 아니었다. 근데 뭐야 이 남자, 한국말이 좀 어색하네? 일본 사람인가?


9.


정신을 차린 와타루는 한 여자가 자신을 흔들어대고 있음을 느꼈다. 이 사람은 누구지? 


배구 선수를 해도 될 만큼 훤칠한 키였다. 오사카에서는 이렇게 기골이 장대한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설마 이 여자가 나를 구한 건가? 어 그런데 저 사진은? 왜 내 사진을 이 사람이?


순이는 와타루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사이 체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수건으로 와타루의 물기를 닦고 불을 피웠다. 두 사람 앞에 모닥불이 피어올랐다.


“세상에, 일본에서도 곱창을 먹는다구유?”

“그러문요, 조선식 부루고기랑 고뿌창이 오사카에소 인끼에요. 거기소는 호루몬이라고 해요. 제 발음이 조금 이상하죠?”

“아, 아니유, 재밌네유. 전쟁통에 먹을 것 없었던 건 일본도 비슷했나봐유!”

“나마에... 아니 이름이... 뭐에요?”

“순이에유... 김연... 순.”


두 사람은 바닷가, 아니 사진관에서 밤새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둘 사이에 생겨난 이 기묘한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줘 봤자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동이 틀 무렵, 와타루는 오사카를 떠나 공주라는 곳에 가기로 결심했다. 부모를 설득해야겠지만, 두 분이 떠나 온 고향에서도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니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순이는 와타루의 사진을 품은 채 사진관 문을 나섰다. 처음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늘 삐뚤어진 입이었지만, 입꼬리가 배시시 올라가는 것은 여느 소녀와 다를 바 없었다. 와타루가 약속대로 정말 공주에 온다면, 와타루가 아니라 한국식 이름을 불러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항...씨라고 부를 순 없잖아. ...환이라고 부르는 건 어떨까?’


길가엔 아무도 없는데 순이의 얼굴이 홀로 발갛게 물들었다.


10.


“과거를 저 정도까지 비틀어 놔야 두 사람이 만날 수 있어. 이건 하이퍼루프 아니면 불가능해.”


헬멧을 벗은 환에게 일론이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나와 현도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거야?”


“Maybe, 환 결국 너희 커플의 문제는 과거 어느 시점에 생성된 유전자가 오작동해서 생겨난 문제인데, 그걸 바꾸려면 네 선조들의 몸과 감정에 손을 댈 수밖에 없어. 그 순간순간 사람들이 품은 감정이 결국 몸에 영향을 주고, 장기적으로는 유전자에도 영향이 미치니까.”


환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렇게... 계속 해왔던 거야? 버뮤다를 통해서?”


“어, 이게 우리 회사가 사회에 공헌하는 방식이야. Well, 키다리 아저씨라고나 할까? 사랑의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후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감정이 있으면 그걸 조금 비틀어서 조절해주는 거지. 버뮤다 서버는 이제 안정적으로 작동하고 있고, 동해안 서버도 이제 베타 테스트 시작했으니 곧 안정화될 거야. 2200년쯤에는 아마 과거에 절실했지만 결국 이뤄지지 못한 사랑까지 하이퍼루프를 통해 다시 이어 줄 수도 있을 것으로 보고 있어. 그런데 그건 후세에 미치는 임팩트가 너무 크니 어느 수준까지 적용할지는 연구진들이 계속 고민하는 중이야.”


환은 어쩌면 영영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환은 좋았다. 현을 닮은 예쁜 아이의 손을 잡을 수 있다면. 선조들도 후세를 남기는 일이니 본인들의 인생에 정말 이상한 일이 한 번쯤 일어난다고 해도 이해해주시지 않을까. 환은 자신의 팔에 기대 있는 현이 해사하게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비록 현은 조금 민망해하지만, 활짝 웃을 때면 살짝 비뚤어지곤 하는 현의 입이 오늘따라 더 보기 좋았다.


Fin.


2021년 7월, 서울.


"충격! 장마 이후 동해에서 다수의 실종신고 발생. 동해안 삼각지대의 출현인가?




후기


올해 초에 읽었던 글귀 한 줄에서 시작한 사이드 프로젝트


연초에 『Jobs 잡스 - Novelist 소설가』책을 읽다 뜬금없이 올해는 '소설' 혹은 '극본'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 에세이 한 권 냈다고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왔던 때였다.


'사이드 프로젝트로 한 번...?' 

물론, 처음엔 마음만 그저 굴뚝이었다. 소설과 극본 모두 가상의 이야기인 '픽션'을 쓰는 일이다. 기술적으로 아는 게 전무한지라 쉬이 손이 나가지 않았다. 그저 '어떻게 하지...?' 하고 군침만 삼키고 있다가, 에라이 하고 어찌 됐건 교육과정을 찾아 등록하기로 했다. 영어를 배우려면 학원을, 몸을 만들려면 헬스장을 먼저 끊어야 하지 않는가. 때마침 방송작가교육원 드라마 작가 과정이 개강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게다가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으로만 수업을 한다는 희소식에 직장 및 육아와 병행할 수 있겠다 자신만만해하며) 호기롭게 수업 신청을 했다. 


하지만 늘 왜 뭔가 신경 써서 제대로 배울라치면 아주 공.교.롭.게.도 회사 일이 바빠지는 건 무슨 조화인가. 수업 중반부가 되니 벌써 처음의 의지가 오간 데 없이 사라졌다. 수업시간에 맞춰 간신히 줌만 켠 채 다른 수강생들이 쓴 대본 읽는 것만 손 빨고 쳐다보는 상황이 몇 주간 계속되기 시작했다. (어찌나 영어, 수영, 헬스 할 때랑 똑같니... 이 끈기 없는 인간아.) 

아아... 이러다 결국 작심삼일로 끝나는 것인가 하던 차에, 김민섭 작가님 페북을 통해 '초단편소설 출판하기' 수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강사는 무려 장르소설의 대가 김동식 작가님! ♡ 


첫 수업을 듣곤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래, 올해는 소설을 쓸 운명인가 봐...(?)'


5천 자 내외로 쓰는 초단편소설이었기 때문에 드라마 극본보다는 적은 부담감으로 써 내려갈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뚝딱 썼다는 건 아니고... 이야기 소재 찾기가 쉽지 않았다. 여름에 아들과 둘이 다녀온 동해 여행이 아니었음 끝까지 글감을 못찾고 좌절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컨셉을 잡은 후에도 늑장 부릴 수 있는 데까지 부리다 결국 마감 직전에 간신히 냈다. 역시 공.교.롭.게.도. 회사 일이 '또' 바빠지는 바람에(!). 


마지막까지 이래저래 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수강생 동기분들의 작품들과 함께 한데 묶여 느지막이 글이 하나 나왔다. (오탈자는 어쩔 수 없는 원고의 숙명이니 받아들이기로 한다.)


처음 달리기를 할 때도 그랬다. 1km만 달려도 숨이 턱에 차 더 이상 뛰지 못하고 멈춰 섰다. 


연초에 생각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결과물이 나왔지만, 그래도 뭔가 내놓았으니 그걸로 올해는 만족이다. 내년에 아주 조금만 더 나아지기로. :)  


*Photo by Hermansyah on Unsplash



김동식 작가와 함께 한 초단편 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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