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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무덤, 아버지의 영역

by 작중화자

조도가 낮은 지하의 방이다.

어렴풋한 주홍빛의 실내등은 간신히 생을 붙들고 있는 환자의 숨처럼 이 방의 생명을 힘겹게 연장하고 있다.

방의 중앙에는 기다란 책장이 세워져 있고,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모를 낡고 변색된 책들로 채워져 있다. 손끝만 닿아도 책은 저항 없이 바스러질 것 같다. 모두가 잊어버렸을 공간에 무력하게 누워 있는 아직 읽히지 않은 세계. 아무도 찾지 않는 이곳은, 존재하지만 언제라도 사라져 버릴 세계다.

나는 세월의 더께와 뒤섞인 오래된 종이의 냄새에 탄복하며 책의 곧은 등을 쓰다듬어본다. 허공에 흩어지는 먼지가 희미하게 발광한다.


그때, 육중한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온다. 금색 안경테가 얼굴 위에서 반짝인다.

아빠다. 나는 놀랍고 반가워 ‘아빠!’하고 부른다.

근데 왜일까, 나는 그를 지나쳐 방을 나선다. 아빠는 그대로 문을 닫으려 한다. 나오지 않을 거냐는 나의 조급한 물음에 그는 ‘무서워’라고 조용히 읊조린다. 그리고 주홍빛이 내려앉는 먼지 쌓인 미지의 공간으로 자신을 유폐시킨다.

쿵, 문이 닫히며 나는 나의 세계로 돌아온다.




그곳은 경계였다. 현실과 비현실, 의식과 비의식의 경계.

지난 20년 동안 몇 번이나 이 경계에서 그를 만났는지 온전히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늘 놀랐고, 다급했다. 따라잡을 수도, 붙잡을 수도 없어서 언제나 새된 목소리만이 그를 쫓았다.


아마도 그곳은 나의 무덤일 것이다. 그를 가둔 내 무덤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아버지의 영역’이다.

그의 죽음은 다가올 내 20대의 거의 모든 시간이 죄책감으로 이루어질 거라는 일종의 예언이었다. 가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물을 쏟을 거라는 암시였고, 어쩌다 꿈에서 그를 보기라도 한다면 그 하루는 온통 잿빛이 될 거라는 예보였다.

놀랍지 않게도 나는 때때로 숨 죽여 울었고, 자신을 비난했으며, 그리고는 침묵했다.


하루에 몇 마디 듣기도 힘든 과묵한 사내였지만,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도 있더라. 1남 1녀의 귀하디 귀한 막내딸. 나는 함부로 다루어져서는 안 되는 누군가의 전부라는 것.

그는 어디에 가든 어린 나를 데려갔고, 엄마에게 혼이 나 눈물 콧물 짜낼 때면, 조용히 나를 안아 들고 눈물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난을 매만지던 가만한 손길이, 어디서 주어온 고물라디오를 뿌듯하게 건네는 은근한 미소가, 뚝딱 만들어 내밀던 고소한 간장계란밥이, 1세대 아이돌 그룹의 사랑노래에 '저런 거짓말은 믿지 말라'던 그 염세가 내 유년의 주마등이다.


하지만 사춘기의 딸은 술과 담배에 잠식되는 아빠가 싫었다. 그래서 멀리했고, 외면했다. 무지하고 냉담한 딸과의 관계에는 일방향의 서글픈 애정만 남았을 뿐이다.

그때는 몰랐다. 어쩌면 그의 모든 선택들이 ‘느린 자살’이었음을.


애증의 존재와도 같았던 그의 삶을 가여워하고, 알고 싶었던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였다. 그의 생은 나의 일부였고, 나는 그의 생으로부터 기인했다는 그 단순불변의 사실을 그의 부재로 알게 되었다.


그러나, 한마디 말도 없이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가만히 건네던 작은 액세서리가 서투른 애정의 표시였음을, 그 작은 걸 내게 건네기까지의 마음을 헤아렸다 한들, 그런 순간이 언제고 또 있을 거라는 어린 날의 착각이 건재한데 무엇이 달라졌을까.


늘 고요하던 시선은 어디에 가닿았던 건지, 찾는 것이 있었던 건지, 찾을 희망이 없었던 건 아닌지 앞으로도 나는 알 수 없다. 그 기회는 온화한 시선과 함께 화장되었다.


모든 걸음은 돌이킬 수 없다. 어쩌면 내가 잃지 않았을 그와의 시간들을 후회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지만, 그럼에도 나는 몇 번이고 그날들로 되돌아간다. 껍데기인 채로 바스러져가는 사람을 옆에 두고도 철저히 무시했던 나를 용서할 수 없어서.


내 남은 생에 나는 얼마나 더 같은 걸음을 되짚을까. 분명 천국에는 가지 못할 것이다.


염치없게도 나는 바란다. 경계, 나의 무덤에서 그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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