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퐁 The Animation
동계 올림픽이 한창인 지금, 어린 나이부터 부상과 재활을 거듭하면서도 결국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선수들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나는 저런 세계의 한가운데 서 본 적이 있었나.
나는 늘 내가 가진 욕망에 비해 마음의 온도는 낮다고 느꼈다. 그래서 스포츠 선수들의 치열함을 동경했다. 그들의 피땀으로 얼룩진 청춘을 스크린 너머에서 소비하면서.
이야기가 덧입혀진 스포츠는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사춘기 시절의 방은 <테니스의 왕자>(2001) 브로마이드로 채워져 있었고, <슬램덩크>(1993)의 뒤를 잇는 작품은 <하이큐!!>(2014)라고 여겼다.
그리고 이젠, <핑퐁 The Animation>(2014)이다.
재능을 일찍 자각한 이들이 종종 그렇듯, 페코(호시노)는 탁구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탁구부에 소속되어 있지만, 훈련은 빼먹기 일쑤다. 중국에서 온 유학생 차이나(콩웬거)에게 단 한 점도 따내지 못하고 첫 패배를 겪기 전까지, 페코는 자신만만했다.
반면, 페코의 소꿉친구 스마일(츠키모토)은 탁구에 인생을 거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애초에 누군가를 끌어내릴 수밖에 없는 냉정한 승부의 세상은 스마일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잠재력을 알아본 탁구부 고문의 지도로 스마일은 비로소 이기는 게임을 시작한다.
그건 네가 탁구에 재능이 없어서야.
천부적인 능력 대신 집요한 연습으로 이뤄낸 성공담은 언제나 감동을 준다. 그러나 <핑퐁 The Animation>은 열심히만 하면 언젠가 타고난 재능도 능가할 수 있다는 믿음에 균열을 낸다.
어릴 시절 함께 공을 쳤던 아쿠마(사쿠마)는 탁구계의 강자로 급부상한 스마일에게 도전했다가 처참히 패한다. 그동안의 노력이 무색해졌다.
패배의 이유를 찾지 못하는 그에게 스마일이 던진 한 마디는 단호했다. ‘재능이 없어서 졌다는 것.’
인생을 걸어도 넘지 못하는 벽이 있다는 사실은 아쿠마를 무너뜨렸다.
아쿠마는 거칠고 오만하지만, 차마 미워할 수 없다. 우리 대부분은 천재가 아니다. 현실에는 이를 악물고 노력해야 겨우 티끌만큼 나아가는 아쿠마 같은 사람이 더 많다. 그래서 그의 좌절은 낯설지 않다.
하지만 타성에 젖은 천재도 도태된다는 사실 역시 분명하다. 무섭게 성장하는 스마일과 달리 연패를 거듭한 페코는 끝내 라켓을 강에 던진다.
히어로 등장, 히어로 등장, 히어로 등장!
괴롭힘을 당하던 스마일을 구해주고, 탁구를 가르쳐 준 건 페코였다. 늘 자신감 넘치고 누구에게도 지지 않던 페코는 빛나는 히어로였다. 그래서 스마일은 그가 계속 우상으로 남아 있어 주길 바랐다.
자만해진 페코에게 일부러 탁구를 져주면서까지.
슬럼프를 겪은 뒤에야 페코는 깨닫는다. 스마일이 더 이상 웃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진심을 다해 탁구를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학교도 제쳐두고 원정 시합을 다니던 과거의 자신을, 그 열정을 기다리는 친구를 위해 그는 다시 라켓을 쥔다.
페코는 누군가의 우상이지만, 패배하고 절망하고 방황하는 현실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각성은 단숨에 그를 정상의 자리로 돌려놓지 않는다. 최강자와의 경기에서 고전하며, 타고난 감각과 피나는 훈련, 어느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렇게 작품은 익숙한 성공 공식을 미묘하게 비튼다.
<핑퐁 The Animation>은 단순히 승패를 넘어,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고 진짜 가야 할 길을 발견하는 소년들의 냉정한 성장을 담았다.
페코와 스마일, 아쿠마뿐 아니라 각자의 위치에서 한계를 마주하며 분투하는 인물들은 어떤 스포츠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보다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작품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세상은 재능 있는 사람들로 넘쳐나지만, 평범해도 괜찮다고, 각자의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위로한다.
밀도 높은 각본에도 불구하고 <핑퐁 The Animation>이 덜 알려진 이유는 독특한 작화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일반적인 스포츠 애니메이션에서 볼 수 있는 깔끔한 선화나 근육의 묘사 대신, 일그러진 형태의 인물들이 화면을 채운다. 거칠고 불안정해 보이는 선은 완벽한 히어로가 아닌, 흔들리는 청춘의 얼굴을 닮았다.
274cm의 탁구대 위에서 2.7g의 하얀 공을 주고받는 두 친구는 마치 격정적인 춤을 추는 것 같다.
스마일의 독백으로 반복되는 ‘피는 쇠맛이 난다’는 이 춤의 체온을 끌어올린다. 구원자를 기다리다 스스로 ‘로봇’이 된 스마일이 결전 끝에 비로소 혈관 속 피의 온도를 느낀다. 차가운 갑옷을 깨고 흘러나온 것은 살아있다는 감각이었다.
한편 페코의 재기는 승리에 대한 집착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타고난 기량도, 맹목적인 투지도 아닌 탁구에 대한 순수한 애정. 히어로의 진짜 힘은 그 진심에서 비롯되었다.
<핑퐁 The Animation>은 이길 준비가 되어 있는지가 아닌, 끝까지 사랑하고 즐길 준비가 되어 있는지 묻는다. 페코가 시간이 흘러서도 ‘탁구가 좋아서 미칠 것 같은’ 영웅으로 남는 이유다.
나는 아직 나의 욕망만큼 무언가를 미치게 사랑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언젠가 그런 마음과 만나게 되면, 그때는 나 역시 누군가의 히어로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