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저울에 인간을 담는 일에 대하여

데스 퍼레이드

by 작중화자


정신을 차려보니, 분위기 좋은 바에 와 있다.

이곳은 ‘퀸 데킴’.

바텐더 데킴은 친절하게 안내한다. 옆자리에 앉은 낯선 사람과 목숨을 건 게임을 해야 한다고.

이건 제안이 아니다. 승패가 가려질 때까지, 누구도 퀸 데킴을 벗어날 수 없다.


게임의 끝에서, 당신은 반드시 심판받는다.




지난해, 주간조선이 전국 성인 1,05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판사의 판결 신뢰도’에 대한 조사에서 과반 이상이 불신한다고 답했다. 한국갤럽의 조사에서도 법원 신뢰도는 절반에 미치지 않았다.

사회적 공감을 얻지 못하는 재판 결과들을 지켜보며, 판사도 AI로 대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AI판사의 판결에 허점이 없을 수 있을까? <데스 퍼레이드>(2015)를 보며 이런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데스 퍼레이드>는 사후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이미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허무’와 ‘환생’의 갈림길에서 ‘죽음을 무릅쓴’ 게임을 한다. 사람들은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자신의 인간성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그리고 그들의 기억과 사망 당시의 상황만 알고 있는 데킴이 게임에서의 모습을 토대로 그들을 재정(裁定)한다. ‘퀸 데킴’은 사후의 운명이 결정되는 시험대인 것이다.

신혼여행 중에 사망한 부부가 퀸 데킴에 왔다.

두 사람은 다트 머신 앞에 섰다. 다트 보드에는 칸마다 신체 부위가 그려져 있다. 핀이 날아가 꽂힐 때마다 상대편 플레이어가 실제 고통을 느끼도록 설계되어 있어, 이 사실을 알게 된 부부는 일부러 다트 보드의 밖을 겨눈다.


하지만 패배는 곧 죽음일 수 있다는 공포가 남자를 압박한다. 여기에 아내의 외도를 확신했던 분노까지 겹치며 그는 점점 이성을 잃어간다.

그러다 남자의 핀이 ‘배’에 명중하면서, 임신한 아내가 원망 섞인 울음을 토하자 그는 오히려 여자를 비난한다.

과연 누구의 죄가 더 중할까?

재정자인 데킴은, 결국 남편을 조롱하며 외도를 인정한 아내를 허무로 떨어트린다.


하지만 데킴은 몰랐다. 비겁하게 무너지는 남편을 보며, 아내가 느낀 심정을.

그건 노여움이 아니었다. 애정과 연민, 그리고 죄책감이었다. 단 한 번의 실수를 자책하던 아내가, 허무로 내몰릴 남편을 대신해 환생을 포기하며 거짓을 말한 것이다.

말과 행동에 담긴 진심을 알아채지 못한 데킴의 오판이었다.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재정이 진실을 놓치고 말았다.


데킴은 ‘신’이 아니다. 재정을 위해 존재하는 인형일 뿐이다. 그래서 인간의 단편적인 기억을 읽을 수 있을지언정 그들의 감정과 의도는 알지 못한다.


작품은 이렇듯 첫 에피소드에서부터 ‘재정’의 허점을 꼬집는다. 공감하지 못하는 형식적인 판결이 과연 정당한지 말이다.


괴로움을 동반하지 않는 재정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러한 심판의 공정성은, 에어 하키를 하게 된 형사와 학생을 재정하는 과정에서 분명하게 모순을 드러낸다.


이승에서 형사는 학생에게 살해당했다. 형사를 자신의 여동생을 성폭행한 스토커의 공범으로 오해한 학생이 그를 칼로 찌른 것이었다.

하지만 진상은 광기에 가까웠다. 형사는 아내를 죽인 범인을 찾아 사적 복수를 한 뒤, 다른 범죄자들을 ‘재정’하고 있었다. 그는 학생의 여동생이 성폭행을 당하던 현장에도 있었지만, ‘심판’의 명분을 위해 방관했던 것이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학생은 분노하며 형사의 장기와 연결되어 있는 하키 퍽을 부순다.


<데스 퍼레이드>의 게임에서 승패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재정자는 오로지 플레이어들의 본능(어두운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게임을 조작하고 극적인 상황을 만든다.

하지만, 부추겨진 증오와 공포만으로 한 사람의 일생을 판단하는 일에는 의구심이 든다. 평범하고 선량하게 살던 사람들도 극한에 치달으면 돌변할 수 있다. 그때의 행동만으로 선과 악을 판단한다면 ‘허무’에 빠지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살아본 적도 죽어본 적도 없는 재정자가 인간의 수많은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 채 내린 판정은 결국 모순일 뿐이다.




2015년에 제작된 작품이지만, <데스 퍼레이드>는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법은 종종 인간의 맥락을 외면한 채, 기계적으로 적용되어 왔다. 이미 많은 판결에서 공감은 누락되었고, 명목과 형식만 남았다.

그래서 ‘AI판사가 정답인가?’라는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다. 권위와 선입견이 없는 차가운 법이, 감정과 고통을 배제한 심판이 유일한 정의라고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데스 퍼레이드>에서 감정이 없는 데킴은 AI판사를 연상시킨다. 그는 법 앞에 평등하지만, 그의 판결에 정작 인간은 없다.

법이 가장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오늘날, AI는 구조적으로 동일한 오류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AI판사가 더 나은 심판을 하리라는 확신은 위험하다.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 존재함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작품의 오프닝은 유독 신나고 유쾌하다. 그래서 무겁고 암울한 내용을 상상하지 못했을 사람들은 상당한 괴리감을 느낀다. 감독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이런 연출 역시 인간을 단편적으로 판단하는 위험성을 은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작품이 절망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데스 퍼레이드>에는 재정의 결함을 지적하고 바로 잡으려는 의지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의지는 데킴이 사람을 이해하려는 진정성으로 이어진다.


진실은 늘 현상의 이면에 존재한다.

그리하여 심판은, 인간과 법의 틈에서 맥락을 찾는 일이어야 한다.

법은 결코 인간의 위에 있어서는 안 된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