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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이해하는가

그럼 너는 나를 이해하는가

by 아빠 민구

이해한다는 말로 위로를 하곤 하지만, 사실.

이해를 할 수 있는 지능은 굉장히 고도화된 영역이다. 내가 관찰한 거의 모든 경우에 상대를 이해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이해하여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신의 말에 논리성을 보강하고 배려 깊음을 표현하고자, 혹은 자연스러운 문맥을 만들기 위해서 그 말을 사용한다.


"이해한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같이 지낸 사람이 없을 정도로, 거의 40년이 다 어가는 시간 동안, 10년 넘게 함께한 아내의 경우를 생각해 보았다. 그녀의 거의 모든 것을 알고, 함께 먹고 자고 생각하고 놀고 노동을 하면서 그녀를 '이해한다'라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내가 편한 대로 생각했을 뿐이다.


나는 적당한 타협점을 설정해 놓고 그 지점의 언저리에서 이해한다는 말로 울타리를 쳐놓았을 뿐이다. 그리하여 그 어떤 상대방의 자아 깊은 곳과 자존심이 나의 그것들과 충돌하지 않는 일정구간의 완충지대를 만들어놓은 것이다.


즉, 이해한다는 것은 '너를, 너의 생각과 마음을 이해한다'라기보다는 '네가 이 정도 하는 건 내가 용납할 수 있다'라는 수준으로 사용하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순수하게 그리고 온전하게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도의 사회성과 지능으로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세심하게 상상하면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인지에 대해 놀라웠다. 정말로 이해한다면 못 할 용서가 없고 낼 화가 없고 흘리지 않을 눈물이 없을 것이다.

이러해서 너를 이해하지만, 어쩌구저쩌구- 식의 말은 사실 이해를 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사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나의 사랑하는 아내와 첫째부터 넷째 아이와 내 주변의 친한 친구와 그 누구까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는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했다기보다는 그냥 사니까 그냥 사는 수준으로 나 자신에 대해서 그다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만일 나 자신에 대해 정확하고 깊이 있게 이해했다면 더 좋은 방향에 대한 더 선명한 솔루션이 있었을 것이고, 다른 누군가의 위로도 필요 없이 스스로 충분히 만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해의 정도를 헤아릴 수도 없는 존재가 있으니 그게 하나님이다. 나의 나된것과 머릿털과 마음속 깊은 곳까지 꿰뚫으시고 온전히 이해하시는 분이다. 내가 힘들 때 같이 슬퍼하시고 나와 함께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는 분이다. 나를 이해하는 유일한 분이다. 비록 일방적이지만, 그래도 무조건적으로 온전히 이해해 주는, 이해할 수 없는 그분이 계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귀하고 행복한 것이다.


나는 너를 이해했는가? 아니. 나는 아니다.


하지만 다행히 나를 이해해 주는 분이 있으니 다른 누가 나를 이해해주지 않더라도 위로가 되고 고개 숙이지 않는다. 이해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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