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이루어지는 곳 [REVIEW] 4.5/5점
Somewhere over the rainbow
Skies are blue
And the dreams that you dare to dream
Really do come true
무지개 너머 어딘가에
하늘은 푸르고
네가 감히 꿈꾸었던 꿈들이
정말로 이루어지는 곳
병구는 유제화학 사장 강만식을 납치한다. 고문이 시작되려는 순간, 병구가 바닥에 놓인 플레이버튼을 누르자 고문실 가득 아련한 <Over The Rainbow> 노래가 울려 퍼진다. 관객들은 이런 무지 개 같이 황당한 상황 속에서 강사장이 정말 외계인일까? 아니면 아닐까? 의문을 품게 된다. 사실 영화 곳곳에는 강만식이 외계인이라는 단서들이 숨어 있다. 지하 주차장에서 술에 취해 차 안에서 외계어처럼 들리는 소리를 내는 장면, 300 볼트가 넘는 전기 고문을 견디어 낸 모습, '유제화학이 유죄화학'은 아닐까 하는 추측들 등. 또는 중간중간 '혹시나?' 했던 장면과 대사들이 마지막에 가서야 영화적 사실로 확인된다. 결국 강사장은 진짜 외계인인가? 아니면 병구의 망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병구가 만든 외계인인가? 이유가 어떠하든 병구는 지구를 '지키기 위해' 강만식을 고문한다.
<지구를 지켜라>는 병구의 머릿속에서 지구를 위협하는 존재를 외계인으로 상정한다. 순이는 병구 곁에서 그의 말을 듣고 따른다. 그러나 관객은 병구의 망상적이고 교조적인 태도를 보며 심신 미약 순이가 이용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며 의심을 품게 된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드러나는 병구의 과거는 순탄치 못하고 오히려 비극적이다. 결국, 극단적인 상황에 몰린 병구의 불안증세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가지게 된다. 병구는 마네킹 제작 일을 통해 자기 정체를 위장하고 생계를 유지한다. 마네킹은 속이 텅 빈, 껍질만 남은 인간의 형상이다.
보통 사람들은 과거와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껍데기를 내세우며 살아간다. 병구 역시 외계인을 연구한다는 이유로, 아픈 과거를 덮고 외계인을 쫓는다. 강만식은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기 위해 악덕 자본가라는 가면을 쓴다. 반면 순이는 병구의 말에 망설이면서도 결국 그를 믿고 따르는, 겉과 속이 일치하는 순수한 인물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각자의 나름의 방식으로 위장하며 살아가지만, 순이만은 바보처럼 맑고 순진한 모습 그대로를 보여준다. 형사가 묻는다. "요즘은 공장에서 마네킹을 다 찍어내는 게 아닌가 봐요?". 병구는 "예 이게 은근 사람의 손이 필요한 일이에요"라고 말한다. 강만식은 폭력 유전자 조작으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실험을 한다. 그러나 병구는 인간에게 가해진 상처는 인간이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구를 지켜라'는 결국 껍데기만 남은 인간들이 꾸는 꿈들에 관한 이야기다.
병구는 외계인과 싸우기 위해 입는 특제 유니폼을 착용하고, 이소룡을 연상시키는 화려한 액션으로 일진 출신동창생이자 동네 깡패를 단번에 제압한다. 그러나 곧 장면이 전환되고 이소룡 티셔츠를 입은 그 깡패에게 병구는 처참하게 맞고 쓰러진다. 병구는 이소룡처럼 불의에 맞서 당당히 싸우고 싶어 하지만, 현실은 늘 그에게 폭력적이다. 파노라마처럼 이어지는 플래쉬백 장면들은 병구가 학교에서, 교도소에서, 회사에서 끊임없이 폭력에 노출되는 사회적 약자의 모습이다.
그의 아버지는 광부였고, 엄마는 유제화학 공장 직원이었다. 폭력은 병구에게 유전처럼 옮겨지고, 사회로부터 아버지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가정 안에서 폭력적으로 변해간 아버지의 모습은 병구에게 깊은 상처로 남는다. 병구는 병든 어머니를 유제화학의 독성 물질로 구하고, 순이를 외계인의 위협에서 보호하며, 강아지 '지구'를 돌보고, 벌들을 지키기 위해 애쓴다. 이 모든 재앙과 고통의 원인을 그는 외계인의 소행이라고 믿는다.
개기월식 D-7. 지구를 지키느냐 마느냐를 판가름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월식이 가까워질수록 지구의 그림자는 점점 더 커지고 길어진다. 지구가 병들었다는 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점점 폭력으로 점철되기 때문이다. 사회 정의를 외치며 사건을 해결해야 할 형사들은 오히려 서로 반목하고, 과도하게 폭력을 휘두르며 부패해 있다. 병구는 폭력에 찌든 삶을 살아왔고, 강아지 '지구'를 보살피지만 '지구'는 인육을 먹는 걸로 보인다. 그림자가 드리운 이 폭력적인 세상에서 순이는 그림자가 없는 존재, 순수 그 자체이다. 병구는 순이가 외줄을 타는 모습을 보고 사랑과 동시에 경외감을 느낀다. 공중에서 좌우로 흔들리며 외줄을 타는 순이의 모습은 '달'을 닮았다.
영화 초반, 병구는 순이에게 외계인의 존재와 위협을 반복해서 말한다. 병구에게 순이는 소원을 비는 달 같은 존재인 것이다. 병구가 지구를 지키는 사명감이 순이를 보호하게 되는 길이라면, 순이가 병구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다. 강만식이 순이에게 '병구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라고 말하자, 순이는 눈물을 흘리며 고민에 휩싸인다. 순이는 병구에게 자신을 사랑하는지 묻자 병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병구는 외계인의 정체를 밝히면 지구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지구를 보호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순이는 지구의 그림자에 달이 완전히 가려지더라도, 병구의 사랑만 있다면 충분해 보인다.
사실 강만식은 지구를 지키기 위해 인간의 폭력 유전자를 조작하려 한다. 그는 폭력이 인간 본성의 근원이라고 믿고 이를 제거함으로써 <지구를 지키려고> 하는 것이다. 반면 폭력에 찌든 삶을 살아온 병구는 폭력의 원흉을 외계인으로 규정한다. 영화 제목 <지구를 지켜라>는 아이러니하게도 병구와 강만식, 둘 다에게 해당하는 문장이다. 그러나 그들이 보는 '지구가 병든 이유'는 정반대이다. 병구에게는 외계인의 침략과 조종이 원인이고, 강만식에게는 인간의 폭력 유전자가 원인이다. '지구를 지켜라'는 단 한 사람의 망상이 아니라, 그들 각자의 방식으로 공유된 목적이다. 하지만 그들이 꿈꾸는 '무지개 너머 꿈들'은 서로 전혀 다르다. 무지개 너머 꿈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지구의 그림자가 너무 거대하다.
영화 속에는 병구의 우산, 순이의 우산, 강만식의 우산이 있다. 병구의 어린 시절, 어머니가 만들어준 작은 우산은 행복한 추억의 상징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으면서 그 우산의 끝이 아버지 머리에 꽂히고, 병구는 이후 트라우마와 광기에 사로잡힌다. 이후 병구에게 우산은 아버지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과 외계인을 쫓는 출발점이 된다. 강만식이 '병구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라고 말하자, 순이는 병구에게 확인하고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버스를 타고 떠난다. 병구를 바라보고 살았던 순이에게 병구가 없는 삶의 첫 시작에서 우산이 등장한다. 병구와 순이에게 우산은 잃어버린 현실의 좌절을 지켜주는 버팀목과 같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강만식 손에는 어린 병구가 가지고 놀던 작은 우산이 들려 있다. 개기월식의 그림자가 거대해지는 순간, 그는 우산을 가볍게 들고 지구를 파괴하는 결단을 내린다. 이는 인간의 고통을 가벼이 여기고 지구를 손쉽게 포기하는 강만식이 결국 진짜 '악당 외계인'(안드로메다 왕자) 임이 드러나는 장치이다.
순이는 우산을 쓰고 떠나지만, 결국 외줄에서 떨어지고 병구를 지키기 위해 달려간다. 그녀가 병구를 지키는 것이 곧 지구를 지키는 일과 같다. 개기월식의 마지막 밤 달이 사라지는 밤이다. 병구에게는 외계인의 지구 파괴를 막는 밤이고, 강만식에게는 인간 유전자 실험을 포기하는 밤이다. 연구실에서 순이는 병구를 구하려다 로봇팔에 목이 졸려 죽는다. 거대한 폭력의 그림자가 달을 완전히 덮고, 달이 사라지듯 순이도 사라진다.
병구는 외계인으로부터 지구를 지키고, 강만식은 인간의 폭력성 때문에 지구를 포기한다. 그러나 순이는 병구를 지키고, 병구를 지킴으로써 외계인에게 지구를 지키는 것을 보여준다. <지구를 지켜라>의 진정한 영웅은 여성 순이다. 달처럼 순수하고 맑은 그녀는 병구를 끝까지 사랑하며 지키려 애쓰고, 결국 목숨까지 바친다. 병구가 죽고 강만식이 주차장에서 우주선에 실려 올라가는 순간, 바닥에는 'Innovation(혁신 : 가죽을 벗겨내다, 즉 인간의 껍데기를 벗겨낸 외계인인 정체)'이라고 글자가 쓰여 있다. 강만식이 안드로메다 왕자 본인으로 드러나고, 지구는 폭발한다.
지구가 산산조각 난 후 우주 한가운데, TV 한대가 표류한다. 브라운관에 전원이 들어오고, 화면에는 병구의 행복했던 어린 시절 가족 모습이 흐른다. 외계인이 지구를 멸망시켰지만, 검은 우주 속에 새로운 달이 뜨듯 TV 화면이 밝아진다. 병구를 지켜주고 싶었던 순이의 달 같은 마음과 병구가 꿈꾸던 이야기가 TV 화면 속에 보인다. 그렇게 순이의 꿈과 병구의 꿈을 관객들은 바라본다. 무지개 너머 우주에서 순이와 병구의 꿈을 보는 건 뭉클하고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