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의 공항 개발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 아니라 '관계'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국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는 속도와 효율성이 최우선이었다. 빠른 결정을 통해 실행력을 높이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이었다. 하지만 베트남에서는 의사결정이 느리더라도 관계 형성과 신뢰 구축이 훨씬 중요했다.
공무원과의 협업: 빠른 결정은 기대하지 말 것
베트남의 공항 건설 프로젝트는 대부분 국영기업과 정부 부처가 깊이 관여한다. 우리가 협업하는 베트남공항공사(ACV, Airports Corporation of Vietnam) 역시 국영기업이지만, 한국 기업과는 사뭇 다른 기업 문화를 가지고 있다.
우선, 결정 속도가 느리다. 한국에서는 회의를 거쳐 논리적으로 정리된 안건을 승인받고, 실행까지 가는 시간이 짧다. 하지만 베트남에서는 여러 계층의 승인과 조율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의 결정이 나기까지 몇 주, 길게는 몇 달이 걸릴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공항의 특정 구역에 상업시설을 추가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데도 각 부처와 협의하고, 내부 보고서를 작성하고, 최종 승인까지 기다리는 과정이 필수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의사결정 속도를 바꾸려 하지 말고, 적응하는 것이었다. 사전 협의를 통해 미리 문제를 예상하고, 공식적인 회의뿐만 아니라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도 논의를 이어가는 방식이 필요했다. 한국식의 "한 번의 공식 회의에서 결론을 내는 방식"보다는, 지속적으로 의견을 나누고 관계를 쌓아가는 접근이 더 효과적이었다.
베트남식 협상 스타일: 체면과 신뢰가 핵심
베트남에서는 상대방의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가 강하다. 특히 공무원이나 투자자와 협상할 때는 직설적인 비판보다는 우회적인 제안 방식이 더 효과적이다. 예를 들어, 특정한 운영 방식이 비효율적이라고 지적하기보다는 "한국에서는 이런 방식이 효과적이었습니다"라고 돌려 말하는 것이 더 긍정적인 반응을 끌어낼 수 있다.
또한, 한국과 베트남 간의 오랜 관계를 강조하는 것도 중요하다.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 기업의 경험과 성공 사례를 존중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인천공항이나 김포공항의 사례를 설명하면서, 베트남 공항에 적용할 수 있는 점들을 자연스럽게 제안하는 방식이 협상에서 유리했다.
ACV와의 일화: 1990년대 한국 회사 문화 그대로
ACV와 일하면서 느낀 점은, 그들의 기업 문화가 마치 1990년대 한국의 일반적인 회사 문화와 닮아있다는 것이었다.
정말 열심히 일한다.
베트남의 공무원들은 흔히 ‘느리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 만나보면 엄청나게 부지런하다.
특히 ACV 직원들은 주 6일 근무가 기본이며, 밤늦게까지 업무를 진행하는 경우도 많다.
공무원들이 겸직이 가능하다.
한국에서는 공무원 신분으로 민간 기업의 일을 맡는 것이 제한적이지만, 베트남에서는 공무원들이 여러 가지 직책을 동시에 수행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업무가 끝난 이후에도 그들은 바쁘다. 아니 호찌민시 전체가 항상 바쁘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술은 필수
ACV와 협업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공식적인 식사 자리에서의 술 문화였다. 한국에서도 회식 문화가 강하지만, 베트남에서는 특히 술을 마시는 방식 자체가 '의식'처럼 진행된다.
보통 작은 잔을 하나씩 주고, 한 사람씩 돌아가며 잔을 비운 뒤 악수를 하면서 프로젝트의 성공을 기원한다. 처음에는 이 문화가 생소했지만, 점점 익숙해지면서 이 과정이 신뢰를 구축하는 중요한 의식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한 차례씩 술을 마신 후, 전체적으로 건배사를 외치며 잔을 비우는 순서가 있다. 한국에서는 "건배!"라고 외치지만, 베트남에서는 프로젝트와 연관된 구호를 정해 외친다. 예를 들어, "요!"라는 짧은 구호를 외치며 함께 마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베트남에서의 관계 형성: 속도보다 신뢰
결국, 베트남에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빠른 결정'이 아니라 '깊은 신뢰'였다. 우리는 효율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베트남에서는 상대방이 나를 얼마나 신뢰하는지,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 얼마나 헌신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몇 차례의 협상 테이블보다, 함께한 식사 자리와 건배, 그리고 진심 어린 대화가 더 강한 신뢰를 만든다는 것을 배웠다.
ACV와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우리는 종종 회의 후 식사 자리에 초대받았다. 처음에는 단순한 회식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자리에서 논의된 이야기들이 결국 프로젝트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순간들이었다.
베트남에서의 컨설팅 경험은, 공항 개발만큼이나 사람과의 관계를 개발하는 과정이었다. 속도보다는 신뢰를 쌓는 것이 중요하고, 공식적인 자리뿐만 아니라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도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프로젝트 성공의 열쇠였다.
다음번 ACV와의 미팅이 끝나면, 또 한 번 건배할 것이다.
"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