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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의 패배: 엠마뉴엘 토드Emmanuel Todd

소련 몰락을 예언했던 남자, 미국 몰락을 다시 말하다

by JM Lee

20년 전 미국의 몰락을 예언했던 에마뉘엘 토드, 이번엔 '서구의 패배(몰락)'를 말하다



소련 몰락을 예언했던 남자, 미국 몰락을 다시 말하다


1976년, 프랑스의 젊은 인류학자였던 에마뉘엘 토드는 불과 스물다섯 살의 나이에 『최후의 추락(La Chute Finale) 』이라는 책을 통해 당시 세계 양극 체제의 한 축이었던 소련의 몰락을 예언했습니다. 이 예언은 단순한 추측이 아닌, 인구통계학과 교육수준 변화, 가족 구조의 진화를 바탕으로 한 과학적 분석에 기반한 것이었으며, 결과적으로 1991년 소련의 붕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그 정합성이 입증되었습니다.


그의 예언은 정치학자나 전략분석가들의 전통적 시각과는 달리,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국제질서를 바라보는 전환점을 제시했습니다. 이후 그는 세계 질서의 근간이 되는 국가 시스템의 내재적 동인을 탐색하며, 단순한 예언가가 아닌 ‘문명의 해석자’로 불리게 됩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오늘, 토드는 다시금 세계를 향해 경고의 메시지를 보냅니다. 단지 미국의 쇠퇴가 아니라, 미국이 상징하는 서구 문명의 체계 자체가 구조적으로 무너지고 있다고 분석합니다. 이는 단순한 대외정책의 실패나 경제 지표의 하락이 아니라, 인류학적 기반 위에서 서서히 진행되고 있는 문명적 전환으로 해석됩니다.


토드는 『제국의 몰락(Après L'empire), 2002년』에서부터 이미 미국의 내부적 문제들을 예리하게 분석해왔으며, 최근 출간된 『서구의 패배 The Defeat of the West (La Défaite de l'Occident), Paris: Gallimard, 2024에서는 이러한 분석을 더욱 확장하여, 오늘날 우리가 처한 문명의 방향성과 그 전환점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그에게 있어 제국의 몰락은 단지 권력의 이동이 아닌, 세계관과 삶의 방식을 재편하는 과정입니다.


군사력만 남은 미국, 껍데기만 남은 제국


토드는 미국이 여전히 군사적으로는 세계 최강국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 내면은 심각하게 붕괴되고 있다고 봅니다. 그는 군사력의 과시는 오히려 내부적 허약성을 감추기 위한 외피이며, 제국이 자신감을 상실할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방어 메커니즘이라고 말합니다.


미국은 세계 70개국 이상에 700개가 넘는 군사기지를 두고 있으며, 항시 전 세계에 군사력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는 명백히 압도적인 군사 인프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힘이 실제로 전략적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실패, 이라크 전쟁의 후유증은 군사력이 반드시 결과를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토드는 이러한 현상을 '소련 말기 증후군'과 유사하다고 봅니다. 과도한 군비 지출과 비효율적인 외교 전략, 내부 정치의 마비는 이미 미국이 황혼기에 들어섰다는 신호로 작용합니다. 그는 "군사력은 한 나라의 건강을 드러내는 지표가 아니라, 병든 제국의 고통을 감추기 위한 진통제일 수 있다"고 진단합니다.


또한 그는 미국이 더 이상 자급자족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에 직면해 있다고 강조합니다. 자국 내 제조업 기반은 붕괴되고, 경제는 점점 더 금융화되며 실제 산업적 기반이 없는 껍데기만 남은 제국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 내부의 구조적 붕괴: 교육, 건강, 중산층 붕괴


미국이 단순히 외부에서의 패권만 잃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근본적 붕괴가 진행 중이라는 것이 토드의 핵심 주장입니다. 그는 『제국의 몰락』에서 미국 사회의 기반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들—교육, 건강, 계층 이동성—의 붕괴를 수치와 역사적 유사성을 통해 명확히 드러냅니다.


그는 미국의 문해력이 과거보다 현저히 낮아졌다는 점을 특히 강조합니다. 정보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젊은 세대는 읽기 능력과 비판적 사고력이 저하되고 있으며, 이는 장기적으로 국가 운영의 질적 저하를 야기합니다.


건강 지표 역시 붕괴되고 있습니다. 백인 저소득 계층의 기대수명이 하락하고 있으며, 약물 중독과 자살률의 증가는 '절망의 죽음'이라는 용어를 낳았습니다. 이는 단순한 의료 시스템의 문제가 아닌, 삶의 전망 자체가 사라진 사회의 반영이라는 것이 토드의 해석입니다.


무엇보다 중산층의 붕괴는 미국 사회의 균형을 깨뜨렸습니다. 예전에는 교육을 통해 계층을 이동하고, 일정한 노력으로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미국은 계층 이동성이 세계 주요국 중 가장 낮은 수준이며, 이는 '아메리칸 드림'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토드는 이러한 붕괴가 과거 소련에서 나타났던 사회적 증후군과 유사하다고 진단하며, 이는 거대한 체계가 끝을 향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라고 말합니다.



'달러 특권(기축 통화)'과 소비국가의 딜레마


토드는 미국 경제가 '생산국가'에서 '소비국가'로 전환된 과정을 인류학적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그는 단순히 경제 지표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이 생산을 포기하고 소비로만 존재하려는 문명적 변화를 겪었다고 분석합니다.


미국은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세계 산업의 중심지였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부터 점차 제조업을 외국에 이전하고, 자국 내에서는 금융, 정보, 소비 중심의 산업 구조로 재편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일시적으로는 경제 성장을 이루었지만, 장기적으로는 경제의 내실을 약화시켰습니다.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는 이러한 구조의 핵심 지탱 요소입니다. 미국은 막대한 무역적자를 기록하면서도 달러를 발행해 이를 메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결국 전 세계가 미국의 적자를 보전해주는 구조이며, 이는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합니다.


토드는 이 구조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경고합니다. 중국, 러시아, 인도 등 신흥국들이 달러 중심 질서를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미국의 경제적 특권은 위협받고 있습니다. 기축통화의 지위가 흔들릴 경우, 미국은 급격한 내부 혼란과 경제적 충격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다자주의의 붕괴와 일방주의의 위험


21세기 초반부터 미국은 다자주의에서 일방주의로 빠르게 전환했습니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를 무시하거나 탈퇴하고, 국제 협약에서 독단적으로 이탈하며,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정책들이 이어졌습니다.


토드는 이러한 일방주의가 세계 질서의 안정성을 위협한다고 봅니다. 과거에는 미국이 국제사회의 규칙을 만들고, 동맹국들과 협력을 통해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그러한 역할을 방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권력은 지도력이 아니라 폭력"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동맹국들이 점점 미국을 신뢰하지 않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유럽, 일본, 한국 등 전통적인 동맹국들조차 미국의 정책을 그대로 따르지 않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이는 신뢰 기반 패권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토드는 미국의 외교 전략이 점점 고립주의적이고, 배타적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미국을 점점 더 외로운 제국으로 만들며, 이는 오히려 중국, 러시아, 인도 등 다른 세력의 부상을 가속화시키는 효과를 낳습니다.



서구의 패배, 러시아의 부상


토드는 『서구의 패배』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단지 러시아의 침공으로만 보는 시각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그는 이 전쟁이 서구, 특히 미국과 나토의 오만한 개입과 전략적 착오에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미국은 자신들의 패권 유지를 위해 우크라이나를 지정학적 도구로 사용했고, 나토의 동진은 러시아에 대한 안보 위협으로 작용하면서 전쟁의 불씨를 키웠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전쟁을 계기로 서구의 도덕적 정당성과 정치적 영향력이 동시에 약화되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과거에는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명분 아래 세계를 설득했던 서구가, 이제는 무기 공급과 제재라는 방식으로 국제 질서를 설득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신뢰의 상실로 이어지며, 더 이상 서구의 가치관이 세계 보편적 기준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한편, 그는 러시아의 부상을 단지 군사력이나 자원 문제로 한정하지 않습니다. 러시아는 낮아졌던 출산율이 회복세를 보이고 있으며, 보건 지표도 개선되고 있다고 분석합니다. 더불어 자국 내 자원과 과학 기술력을 바탕으로 자립형 경제 구조로 나아가려는 시도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전략적 움직임은 유라시아 내에서의 영향력 회복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이는 중국, 인도와 함께 다극체제의 새로운 축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특히 유럽과 러시아가 화해할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하며, 이는 미국 중심 질서의 근간을 흔드는 결정적 변수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서구는 더 이상 단일한 가치 체계나 시스템으로 세계를 설명할 수 없으며, 다양한 문명과 가치가 공존하는 다극적 질서로의 전환이 필연적이라는 것이 토드의 분석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환은 단지 지정학적 이동이 아니라 문명적 재편이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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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2025년 4월 2일, 트럼프 대통령은 ‘해방의 날’이라는 강경 발언과 함께 주요 무역 상대국에 대해 고율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무역 정책의 변화가 아니라, 세계화 시대에 형성된 국제무역질서의 전면적 재편을 예고하는 발언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발표 직후 미국 증시는 급락했고, 전 세계 금융 시장도 동시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는 미국이 더 이상 자유무역과 국제협력을 수호하는 ‘세계 경찰’로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자국 중심주의, 보호무역, 고립주의적 정책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었고, 이는 미국 스스로 세계 질서의 리더 자리에서 한 걸음씩 물러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토드는 단순히 미국의 몰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몰락이 불러올 세계적 재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 재편 속에서 각국이 어떻게 자율성과 독립성을 회복하느냐가 미래를 결정할 열쇠가 된다고 말합니다.


한국처럼 지정학적 리스크와 경제적 의존도가 높은 국가일수록, 단극체제의 붕괴 이후 나타날 새로운 다극 질서에 대한 전략적 대비가 필요합니다. 단순히 미국과의 동맹이나 중국과의 경제 협력이라는 양자택일을 넘어서, 자국의 실리를 최우선으로 하는 다자 전략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세계가 재편되고 있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변화는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진행됩니다. 생존은 이 흐름을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읽고, 대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결론: 조용하지만 꾸준히, 역사는 변화한다


에마뉘엘 토드는 반복해서 말합니다. “정치는 사람의 감정으로 움직이지만, 세계의 구조는 데이터를 통해 움직인다.” 이것이 그가 인류학과 인구학이라는 차가운 도구를 통해 국제 질서를 분석하는 이유입니다. 그는 시대의 감정을 읽기 전에 구조를 먼저 읽고, 그 구조 위에 예측을 올려놓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조용하게 흐르지만, 그 물줄기는 방향을 바꾸는 순간 폭발적 파장을 일으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전의 유럽, 1980년대 말 소련, 그리고 지금의 미국. 공통점은 모두 ‘변화가 시작되었을 때’를 감지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변화에 둔감했고, 자신들이 쌓아올린 질서가 영원할 것이라 착각했습니다.


『제국의 몰락』과 『서구의 패배』는 단지 하나의 문명 혹은 국가의 종말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그 뒤를 이어올 새 문명의 구조를 설계하는 사유의 토대를 제공합니다. 그것은 예언이 아니라 통찰이며, 경고가 아니라 준비를 위한 길잡이입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도 이러한 시선이 절실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미국 중심의 질서에 익숙해 있으며, 그에 따른 외교와 경제 전략을 수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토드는 묻습니다. “당신이 의존하고 있는 그 제국은, 정말로 여전히 살아 있는가?”


역사는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을 먼저 보는 자만이 살아남습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눈을 크게 뜨고 구조를 읽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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