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근과 칼퇴 사이, 그리고 정전
강솔은 오늘도 야근을 준비하고 있었다. 회의실에서 막 돌아온 그녀는 책상에 앉자마자 노트북을 펼쳤다. 오후 내내 밀린 자료 정리와 보고서 작성에 정신이 없을 정도로 집중하는 중이었다. 커서가 화면에서 깜빡이는 그 순간, 낯익은 그림자가 책상 위로 드리웠다.
"오늘도 칼퇴근 못 하겠네? 언제 나랑 놀아 줄 거야?"
능글맞은 표정으로 물으며 한수호가 책상 위에 턱을 괸다. 그의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했지만, 강솔은 그를 본 체도 하지 않으려 했다.
"저는 회사를 놀러 다니는 건 아니니까.. 놀아드리진 못해요."
강솔의 말에 한수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치, 너무하네. 강 비서는 나랑 노는 게 별로야?"
강솔이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서류를 정리하자, 한수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 심심해. 빨리 퇴근하고 싶다."
‘어떻게 하면 회사에서 심심할 수 있는 거지.’ 강솔은 속으로 생각하며 한수호를 흘겨보았다. 그는 시계만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아, 오늘도 여직원들이랑 잠깐 놀아야겠다. 너무 나만 놀고 있으니 일할 때 신경 쓰이죠, 강 비서님?"
짓궂게 내뱉는 목소리. 강솔은 고개를 들지 않고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오너 손자는 여유로워 좋겠다’라는 생각도 잠시, 강솔이 짧게 대답했다.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놀다 오셔요."
‘그래, 일에 집중 좀 하게 내 앞에서 없어져 줬으면.’ 강솔은 자신의 생각에 흠칫 놀랐다.
한수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해했다. "역시 우리 강 비서는 일 잘한다니까. 그럼 너만 믿을게."
수호가 여직원들이 있는 자리로 향하자 곧 환호성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여직원들의 이름, 관심사, 그녀들이 최근 SNS에 올린 것들을 다 알고 있었다. 그런 종류의 이야기와 인터넷 밈을 한가롭게 떠들어댔다. 한 시간가량 놀다 돌아온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아, 재밌었다."
일에 집중하느라 그가 돌아온 줄도 몰랐던 강솔. 한수호는 그녀의 모니터를 보고 혀를 찼다.
"와, 일이 또 늘었네."
강솔이 서류를 내밀며 말했다. "결재 좀 부탁드려요."
그는 서류를 훑어보지도 않고 사인을 휘갈겼다.
"자, 결재 완료. 짠."
그가 책상 위에 엎드리며 강솔을 바라봤다. "강 비서님, 일 더 하게?"
"본부장님, 일이란 시험 '땡' 종 치듯, 6시 '땡' 하고 끝낼 수 없답니다. 정. 리. 요."
강솔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자료를 정리했다.
오후 5시 55분. 사무실은 퇴근을 준비하는 듯 조용했지만, 여전히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주인공은 강솔이었다. 수호는 그녀의 자리로 시선을 옮겼다. 컴퓨터 화면에는 보고서가 펼쳐져 있었고, 강솔은 집중한 눈으로 마지막 문단을 정리하고 있었다.
"17시 55분이면 짐 쌀 시간이지, 일할 시간이야?"
수호는 중얼거리듯 말하며 천천히 손을 뻗어 사내 전력 제어창을 열었다. 손가락이 몇 번 클릭을 누르자, 시스템이 가볍게 진동했다. 그는 뒷짐을 지고 조용히 사무실을 한 바퀴 돌았다. 강솔은 그가 다가오는 걸 느끼지 못한 채,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 보고서, 그렇게 중요해?"
강솔은 고개를 들지도 않고 대답했다. "내일 오전 미팅 전에 보내야 해요. 상무님이 직접 요청하신 거예요."
수호는 팔짱을 끼며 선 채,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회사 클라우드에 다 저장돼 있어. 공유 오피스. 몰라? 다 꺼도 돼."
강솔은 잠깐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순간, "푸우웅—" 사무실 전체의 불이 꺼졌다.
"... 정전...?"
한순간의 침묵이 흐르고, 곧이어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저장 안 됐어요!" "인터넷 끊겼다!" "제 작업 다 날아갔는데요!?"
강솔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수호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노트북의 전원은 꺼졌고, 그녀의 표정은 싸늘했다.
"... 정말 본부장님이 하신 거예요?"
수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응. 근데 괜찮아. 어차피 다 클라우드에 저장됐—"
"인터넷이 꺼졌잖아요. 클라우드는 인터넷이 있어야 저장되죠."
그의 말이 끊겼다. 강솔은 더 이상 말할 기운도 없는 듯 돌아섰다. 사무실의 응급등이 켜진 가운데, 직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수호는 생각에 잠겨 혼자 서 있었다.
"... 이건 아니네. 실수했나."
수호는 눈을 감았다. 마치 정지된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직원들의 아우성과 강솔의 실망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되돌려야 한다.' 그 간절한 마음이 강렬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앞에는 익숙한 풍경이 다시 펼쳐졌다.
오후 5시 55분. 사내 시스템의 전력 제어창이 여전히 그의 손끝에 열려 있었다.
수호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망설임 없이 창을 닫았다. 대신 그는 천천히 강솔의 자리로 걸어갔다.
"그 보고서, 많이 남았어?"
강솔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전과 똑같은 표정이지만, 이번엔 수호가 달랐다.
"천천히 해. 오늘은 좀 늦게 퇴근해도 괜찮잖아."
‘천천히 하라니, 또 뭔가 꿍꿍이가 있을 텐데?’ 그녀는 잠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웬일이세요. 칼퇴 안 한다, 나랑 안 놀아준다, 그러시더니... 마침 오늘은 일찍 갈 거예요."
수호는 말없이 돌아서며 중얼거렸다.
"이번엔, 꺼지지 않았네."
강솔은 수호가 작게 말하는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정전으로 인한 회사의 혼란 속, 정신없는 와중에 수호가 여유롭게 눈을 감고 서 있는 모습을 보고 강솔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리고 벽시계의 초침이 재빠르게 돌아갔다. 눈을 깜박인 찰나, 강솔은 방금 전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분명히 6시가 지났었는데, 벽시계는 5시 5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가 시간을 되돌렸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이번엔 꺼지지 않았다뇨? 설마, 뭔가 하신 거죠??"
수호는 싱긋 웃으며 멀티탭 전원을 끄는 시늉을 했다. "전사적 전원 차단. 퇴근 안 하면, 자동으로 블랙아웃. 모두 안녕! 들어가세요..! 하하하."
강솔은 어이없다는 듯 수호를 바라보았다. "그럼 제가 꿈을 꾼 게 아니군요. 아까 정전 사태가." 강솔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수호는 놀라워하는 표정을 짓다가, 다시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아, 강비서는 눈치챈 거야? 무슨 일이 일어난 지? 의외로 똑똑한걸? 맞아, 시간을 좀 되돌렸지."
"설명해 달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지금 바빠서요..." 강솔은 한숨을 쉬며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작업하던 자료는 그대로 있었고, 사무실도, 회사도, 모두 조용했다. 어쨌든 오늘 일을 끝낼 수는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강솔은 작업하던 모든 자료를 재빠르게 저장하고, 메일로 송부한 뒤, 두 번 재확인을 마쳤다. 그녀는 가방을 챙기다 말끝을 흐리며 말했다.
"일을 줄여주든가, 인원을 늘리든가 해야죠. 무조건 칼퇴라니요."
수호는 잠깐 멈춰 서서 그녀를 바라봤다. "인원 늘리는 게 쉬운 줄 알아? 요즘 인건비가 얼만데."
"... 이렇게 막무가내는 곤란해요!"
"막무가내? 내가? 난 오히려 배려한 거였는데?"
"정전이요? 그게 배려예요?"
"그래. 결과적으로 전원 꺼지니까 강제로라도 퇴근하잖아."
"그건 '사고'예요. 계획이 아니고요. 그리고 문제가 커질 것 같으니, 다시 '원복'하신 거 아닌가요? "
수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근데 어쨌든 결과적으로 퇴근은 했잖아? 내 말이 틀렸어?"
"퇴근은 했지만, 기분은 퇴근 전보다 더 나빠졌어요."
"헐, 강솔 오늘 좀 당차다?"
"그거, 절대 칭찬 아니죠?"
"어, 티 났어?"
강솔은 푸념 섞인 한숨을 쉬었다. "저 정말 진지하게 말한 거예요. 정전 같은 방식 말고, 진짜 효율적인 팀 운영 방안을 고민해주셨으면 해요."
수호는 고개를 약간 기울이더니, 뜻밖에도 알겠다는 듯 끄덕였다. "좋아. 진지하게 말했으니까 나도 진지하게 들어줄게. 대신 넌 가끔 오늘처럼 솔직하게 말해야 돼."
강솔은 말없이 까딱여 보이고는, 그의 옆을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 선 두 사람은 함께 건물을 빠져나왔다.
"본부장님도 원래 이쪽으로 가세요??"
"응. 같은 방향이잖아. 몰랐어?" 강솔의 물음에 수호는 빙그레 웃었다.
"그랬나요...? 처음 듣는 얘긴데요."
수호는 가볍게 웃으며 그녀 옆에 섰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새 입꼬리를 올렸다. 수호도 그녀의 미소를 보며 작게 웃으며 말했다.
"뭐야, 그 표정. 설마 나랑 퇴근해서 좋은 거야?"
"그냥... 날씨가 좋아서요. 노을이 예쁘네요. "
"그래. 야근하면 이런 거 잘 못 본다고. 나랑 같이 보니 더 좋지 않아?"
수호는 그녀의 걸음을 따라 걸으며, 무심한 듯 말했지만 다음에 나올 그녀의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다.
"강제 퇴근도 나쁘진 않네요. 그렇지만 오늘만이에요."
수호는 그녀와 같이 걷고 있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나저나 시간을 돌리는 능력에 대해 더 물어보려고 했는데, 다음에 하지 뭐.'
노을빛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그녀는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을 지우려 애썼다.
그날 퇴근길의 공기는 유난히도 상쾌했다. 시원한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