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근중독 강비서
며칠 전, 수호의 새 비서로 강솔이 배정됐다.
“안녕하세요 본부장님, 강솔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수호는 웃음기가 가득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 솔아. 반가워.” 책상 끝에 살짝 걸터앉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짙은 갈색 단발머리, 동그란 안경, 깔끔하고 단정한 원피스..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귀여워. 합격.”
“합격했으니까 여기 왔죠.” 무심하게 한마디 툭 내뱉고는, 강솔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수호는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다시 싱긋 웃으며 그녀의 자리에 다가갔다. 수호는 여자들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다고 자부했다. 큰 키에 다부진 체격, 날렵한 몸, 잘생긴 외모의 그는 회사 내에서 여직원들에게 인기도 많았다.
또한 비서 자리는 그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였다. 그룹의 후계자-그다지 후계자 자리에 관심은 없지만-로서 핵심 부서를 이끄는 만큼, 비서 역시 그의 지위와 역량을 보여주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첫인사 후, 그가 아직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움직이다니? 뭔가 재밌는 친구구나,라고 생각하며 말을 꺼냈다.
“뭐야 강솔, 좀 더 나랑 얘기 좀 해.” 수호는 여유로운 자세로 그녀의 자리 앞에 서서 짙은 미소를 보냈다.
“아, 인수인계자료 검토 빨리 해야 해서요. 본부장님과 얘기할 시간은 앞으로도 많겠죠.”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말하는 강솔을 보며 수호는 오기가 생겼다.
“그러지 말고, 응? 나 봐." 수호는 몸을 그녀에게 숙이며 그윽한 눈빛을 보냈다.
”아, 10시 반 회의 있습니다. 자료 드릴게요. " 벌떡 일어나 회의자료를 그에게 건네는 솔의 단호한 눈빛을 보며 수호는 살짝 물러났다.
‘내가 지시받는 느낌인데?’
첫날부터 강솔은 기계처럼 일하며, 6시가 지나도, 7시가 지나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수호는 자연스럽게 야근하는 그녀를 힐끔 바라보며, 슬그머니 다가가 말을 건넸다.
“흠. 저기, 솔아.”
“내일 일정 확인해 드릴까요?” 재빠르게 솔의 모니터에 캘린더가 떴다.
“아, 아니. 일정은 됐고.. 첫날부터 야근해?”
“네. 일이 많습니다.”
“첫날인데 쉬엄쉬엄 하지.”
“첫날이라 더욱 일이 많네요.”
수호는 야근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시간에 친구를 만나고, 놀고, 술을 마시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야근하는 일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말이 야근이지, 저도 9시에는 퇴근하려고 했어요.”
“9시? 저녁은 어떡하고. 그러지 말고 나랑 저녁 먹을래?” 강솔의 자리 파티션 위로 자연스럽게 팔을 올리며, 수호는 그녀와 함께 저녁을 먹을 생각에 씨익 웃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사과, 방울토마토, 포도가 옹기종기 담긴 플라스틱 통이었다.
“전 이거면 됩니다.”
이야기를 할 때마다, 주도권을 잡을 수 없어지는 느낌이 들며 수호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알았어, 더 이상 방해 안 할게.”
‘내 미소가 안 통하는 건가. 아니면 정말 바쁜 건가.’
“방해라뇨. 저는 본부장님과 같이 일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강솔은 살짝 웃었다. “본부장님, 들어가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수호는 그녀의 미소를 보고 멈칫했다. 눈을 감고 시간을 돌렸다. 5초 전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미소를 보냈다.
“내일 뵙겠습니다.”
수호는 두 번 정도 더 되감기 하듯 시간을 돌려 그녀의 미소를 보고,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떠났다.
“하, 씨. 귀여워.”
“그러니까 시간을 돌릴 수 있다고요? 그거 참… 대단.. 하시네요..”
수호가 회사를 정전시키고 다시 시간을 돌린 다음 날 오후, 강솔은 수호에게 슬쩍 말을 건넸다.
“이왕 말한 김에 한 가지 더. 나, 잠깐 시간을 멈출 수도 있어.”
수호는 웃음기가 가득한 눈으로 덧붙였다.
강솔은 눈을 크게 뜨고 잠시 입을 크게 벌렸다. 충격으로 말문이 막힌 듯했다.
“어, 이상하다. 나 시간 안 멈췄어. 왜 안 움직여?” 수호가 강솔의 눈앞에 손을 흔들었다.
“... 로또 번호 알려줄 생각 없으세요??” 강솔이 돌연 진지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수호는 크게 웃으며 손을 이마에 갖다 댔다.
“아, 뭐야! 강솔, 푸하하! 그 한없이 욕심 가득한 표정 좀 봐. 하하..”
“전 본부장님 같은 재벌이 아니니까요.. 제 꿈은 돈 많은 백수라고요.” 강솔은 어깨를 움츠렸다.
“안돼. 난 유능한 비서를 잃고 싶지 않으니까. “
수호는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한 표정으로 솔을 바라본다.
“왜 제 귀에는 ‘만만한 비서‘로 들리는 걸까요?” 강솔은 짐짓 눈을 피하며, 살짝 내뱉는다.
“안됩니다 강솔 씨. 근데, 퇴근 안 해?” 고개를 들어 벽시계를 보니 벌써 6시 32분이었다.
“전사적 정전 2차 어때? 건물 전체 전원차단해서 자연스럽게 칼퇴 유도.”
“본부장님! 그게 무슨 소리예요??!!”
강솔은 놀라움과 화가 뒤섞인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
하지만 목소리는 미묘하게 떨렸다.
수호는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믿기 싫으면, 그냥 농담으로 들어. 믿고 싶으면… 너만 알고 있어.”
그 순간, 강솔은 알았다.
이 남자가 단순히 장난만 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리고 이 회사에서, 자신만이 그의 비밀을 공유하게 되었다는 걸.
강솔은 한숨을 내쉬었다. 수호의 비밀(?)을 알게 된 덕분에 시간이 이렇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30분만 앞으로 시간을 돌려주시면 조금 더 정리하고 퇴근할 수 있을 텐데요.” 강솔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안돼. 무한정 시간을 돌릴 수는 없어. 지금도 살짝 머리가 아픈 걸.”
수호는 미간을 찌푸렸다가, 이내 부드러운 눈빛으로 강솔과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강솔은 흠칫 놀라며 어쩔 줄 몰라했다. “아프다고요??? 괜찮으세요?” 강솔은 무심코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짚으려다, 당황하며 얼른 손을 내렸다.
모든 걸 다 가진 한율그룹 회장님 손자, 시간을 멈추고 돌리는 능력까지 갖춘 완벽한 인물이라 생각했는데. 강솔은 방금 전의 얄팍한 생각을 후회하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수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을 읽은 수호는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 걱정해 주는 거야? 그 정도는 아니야.”
강솔은 그의 부드러운 미소에 왠지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또 저 미소다. 속아 넘어가면 안 돼, 저기에 말려들어가면 안 돼.’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수호는 짙은 밤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헤친 채 팔짱을 꼈다. 그의 옅은 갈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강솔을 바라보았다. 그는 살짝 미소 지으며 강솔에게 다가와 상체를 숙이고 속삭였다.
“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 내가 그렇게 멋있어?” 강솔은 뜨끔했다.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매번 이런 식으로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말에 넘어가지 말고, 퇴근이나 하자.’ 강솔은 속으로 되뇌었다.
“퇴근 안 하세요? 저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강솔은 겨우 떠올린 말을 내뱉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훨씬 전부터 갈 준비 다 했는데.” 수호는 다시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고, 건물을 나선 후에도 계속 수호는 휘파람을 불며 강솔을 뒤따랐다.
그가 신경 쓰인 강솔은 이어폰을 양쪽 귀에 꽂았다. 뒤통수에 계속 느껴지는 그의 시선마저 차단하고 싶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도대체 어디까지 따라올 셈이지?’ 강솔은 음악 볼륨을 더 올렸다. 뒤돌아보고 말을 거는 것조차 귀찮다고 생각하며
‘그만 따라오세요’라는 글자를 허공에 띄울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애초에 나를 따라오는 게 맞나? 그냥 같은 방향일 수도 있잖아. 나 혼자 착각하는 거라면?’ 그녀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살짝 뒤돌아보니, 수호는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몸을 돌리려던 순간, 강솔은 눈앞에 있던 누군가와 살짝 부딪힐 뻔했다.
“강솔, 나 찾아?” 수호는 가볍게 강솔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언제 또 이쪽으로 온 거야? 순간 이동 능력이라도 있나?’ 강솔은 그의 스킨십에 짜증이 치밀어 한숨을 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퇴근 후엔 상사와 마주치지 않고 싶어요.” 강솔은 얼굴을 한껏 찡그린 채 몸을 비틀어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부적절한 신체 접촉도 포함입니다.” 그녀는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단호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에이, 우리 사이에 이 정도 가지고 뭘.” 수호는 능글맞게 웃으며 받아쳤다.
“혹시 ‘직장 내 성희롱 성추행 방지교육’ 이수하셨나요? 내일 출근하면 교육이력부터 찾아보겠습니다.”
강솔은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무표정하게 수호를 지나쳐 빠르게 걸어갔다.
수호는 잠시 미소를 거두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이내 입가에 미소를 띠며 멀어져 가는 강솔을 바라보았다.
“하, 귀엽네. 아주 재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