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의 일기
X월 3일
생각보다 쉽지 않다. 어렵다. 하지만 일은 다 똑같다. 어려운 것은 사람이지.
그분은 정말 독특한 분이었다. 여자를 그렇게 좋아한다더니,
그 사람은 모든 걸(?) 다 가졌고, 뭐든 다 할 수 있으니 항상 그렇게 여유로운 것일까.
내가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쏘아붙이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치는 걸 보면 이미 능수능란한 분이고,
꽤나 많은 여자를 상대해 본 것 같다. 그래, 그 외모에 그런 자리면, 알아서 달라붙겠지?
그런데 누구 하나 진득하게 만난다는 건 못 들어봤는데.
알 게 뭐야.. 죽이 잘 맞는 사람 어딘가 있겠지.
그분의 장난스러운 들이댐은 여자에게라면 누구든 상관없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X월 4일
도.. 도대체.. 일은 언제 하는 거야..?
자리에 제대로 앉아 있는 걸 본 적이 없다.
어디 있나 찾아다니지도 못하겠다. 조금만 자리 비워도 메신저 알림 창이 모니터 우측을 탑처럼 쌓아놓고 있다.
80%는 ‘본부장님 자리에 계시나요’, 15%는 내가 요청한 자료에 대한 문의, 5%는 내 동기들과 비서실 언니오빠들.
혹시나 해서 그날 올라온 결재들에 대해 질문을 던져 보니 하나도 빠짐없이 다 알고 있다.
천잰가? 세상은 불공평하다. 나는 한참을 봐야 아는 건데,
뭐 그러니까 그런 자리 앉아 있겠지??
그 사람은 월급루팡이 꿈인 걸까?
X월 6일
오늘도 자리에 없었다. 찾다가 내가 실종될 판이다.
그리고 일하다 보면 야근할 수 있는 거 아냐?? 제발 정규시간 지났으면 그냥 먼저 좀 가세요..
조용히 혼자 일하고 정리하게..
정신없는 근무 시간대보다 야근할 때면 메신저도, 메일도 조용하니까 생각도 정리가 잘 되는데..
그분은 왜 그렇게 예민하게 야근을 싫어하는 걸까?
야근하다 죽은 직장인이 환생했나?
X월 10일
믿을 수 없다. 다 가진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상한.. 아니 이상한 게 아니지,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다. 퇴근 시간 되기 직전 갑자기 그 인간이 회사 전체를 정전시켜 버렸다.
미쳤지. 미쳤어. 이렇게 전원 차단하면 다들 집에 갈 것 같아?
오히려 수습하느라 밤새겠지.
작업하던 문서도 날아가고, (그래서 중간중간 저장은 필수!!) 긴급전원은 들어왔어도 캄캄하고,
그런 헬 오브 헬, 혼돈의 카오스라는 것을 눈앞에서 실제로 보았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 모든 상황을 재미있다는 듯 지켜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전원을 내리기 전으로 시간을 돌렸다는 것이다. 예상을 못했나? 이렇게 큰일이 생길 줄?
재미있는 상황 구경이 하고 싶었던 건지, 알 수 없다.
다행히 모든 자료가 살아 있고, 혼돈이 잠재워졌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이상한 건 시간이 돌아갔는데 왜 나만 그걸 다 기억하고 있냐고.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것 같다.
애초에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되는데. 사실 지금도 믿을 수 없다.
어떻게 된 거냐고 따질 힘도 없었다.
이미 너무 깊게 엮여 버렸다. 흑..
근데 능력이고 뭐고 쓸데없는 짓 말고 자리에나 좀 붙어 있었으면..
X월 11일
지난 일기부터 쭉 이어지는데, 이건 마치 한수호 관찰일기 같다. 초등학교 때 이후로 관찰일기를 쓰는 것은 오래간만이다.
어쩌겠어. 하루 종일 붙어 있는데.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잖아?
궁금한 김에 그 시간 능력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시간을 돌릴 때면 눈을 감는다고 한다. 왜 눈을 감냐고 물었더니, 눈 색깔이 바뀐다고 했다.
엑스맨인가…? 닥터스트레인지인가..
그리고 돌릴 수 있는 시간은 무한정은 아니라고 하고, 그러니까 10초, 5분 전, 1시간 전과 같이 짧은 시간이고
어제, 일주일 전, 한 달 전 같이 오랜 시간 이전으로는 돌릴 수 있냐고 했더니
대답은? ‘안 해봤다.’ … 이게 뭐냐, 실험 정신도 없나.
하루 횟수는 어떻게 되냐니 그것도 그날그날 컨디션에 따라 다르다고 한다.
그리고는 능력을 쓸 때 머리가 좀 아프다며, 지금 너무 많이 돌려서 머리가 아프니 쓰다듬어 달라고 했다.
확 머리를 한 대 쳐올리고 싶었지만, 차마 못했다. 아, 신체적 타격이 있긴 하구나.
그렇지만, 대화를 오래 하면 할수록 말려들어가는 느낌이다.
그래서 일부러 차갑고 딱딱하게 말했다.
부드럽게 아양 떠는 건 다른 언니들한테 가서 들으시면 되겠지.
난 원래 예쁘게 말 잘 못하니까.
X월 12일
그 인간이 어디로 돌아다니는지 이제 비서실 언니들이 메신저, 카톡방으로 알려줬다.
—카톡방—
(주영언니) 솔아, 네가 간절히 찾는 너희 본부장님 여기 있다.
(나)앗 언니, 고마워요. 근데.. 간절히는 아니고요;;
(민하언니) 본부장님은 모르는 게 없으시네, 우리 인스타도 다 보시나 봐.
(나) 헐. 난 인스타 안 하길 잘했네 어쨌든 고마워요 언니들
(주영언니) 담에 점심 같이 모이자.
(나)ㅇㅇ그래요~~
(성훈오빠) 지금은 본부장님 회장실 오셨다.
(나)아. 그건 좀.. 나에게 말도 없이.. ㅠㅠ
——
어쨌든 어딨 는지는 알게 됐다.
실시간 인간 찾기 CCTV 해 주셔서 감사.! 감사합니다 언니들, 오빠들, 사랑해요.
그분에게 순간 이동 능력이 없어서 다행이다.
아니, 있는데 안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고 안 믿어야 할지 모르겠는 사람이니까.
X월 13일
오늘은 야근 확정. 낮에 그 사람이 잠수만 안 탔어도 서류들이 이렇게 안 밀렸을 거다.
다들 퇴근하고 나 혼자 조용히 일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뒤에서 “야근? 그거 나 안 시켰는데?” 하며 나타났다.
진짜 심장 멎는 줄. 귀신보다 무섭다, 한수호.
대꾸도 하기 싫어서 모니터만 보는데, 내 책상 옆에 턱 앉아서 라면 뚜껑 접고 있었다.
아니, 언제 편의점 다녀왔냐고. 정말 순간이동 능력까지 있는 건가.
우리 비서실 캐비닛 안에도 컵라면 있을 텐데?
하지만 라면 냄새를 못 참았다. 결국 그 냄새에 끌려가듯 다가가고 말았다.
김 모락모락 올라오는 국물에 정신 팔린 사이, 그 넘이 젓가락 들고 말했다.
“우리 비서, 야근할 때도 귀엽네.”
진심.. 먹는 중이었으면 면발이 목에 걸릴 뻔했을 거다. 이런 멘트를 다른 여자들에게도 날리겠지? 그 여자들은 안 오글거리나?
라면은 맛있었음. 근데 문제는 그 말을 듣고 내가 웃었다는 거다.
이게 웃길 일인가? 왜 사내 연애하는 사람들처럼 보여…
아니지. 절대 아니지. 나는 그냥 사회적 미소를 지어드린 것뿐이야.
오늘 그 귀엽다는 말 여자들에겐 몇 번이나 했는지,
내가 몇 번째로 들었을지 그 생각을 하니 금방 웃음기가 싹 가셨다.
다음엔 김치도 주문해야지. 라면은 역시 김치랑.. 먹었어야 하는데.
X월 14일
회의실. 프로젝트 중간발표 중이었다. 발표자는 잔뜩 긴장해서 슬라이드 넘기다 엉뚱한 그래프를 띄우고 말았다.
이팀장 얼굴 하얘지고, 차가운 분위기가 흘렀다.
급히 준비하고 취합하느라 나도 자료 확인을 다 못한 책임이 있긴 했다. 발표자는 쩔쩔매고 나도 당황스러워하는 와중에,
그 순간, 한수호 그 인간이 손을 번쩍 들더니 —
“잠깐만요. 강비서. 3분 전으로.”
…그리고 눈을 감았다가 떴다.
순간적으로 주변이 ‘휙’ 바뀌더니, 다시 처음 발표 시작 화면으로 바뀌었다.
나만 소름이 돋았다.
이건 방금 본 장면이잖아.
데자뷔도 아니고, 진짜로 시간을 발표 전으로, 3분 전으로 돌렸다는 걸 깨달았다.
발표 시작 전 그 인간이 나에게 눈짓한다. 얼른 이팀장에게 가 노트북 화면을 가리키며
아까 문제 있었던 그래프 내용을 발표 전 수정할 시간을 줬다.
대충 둘러댔다. 자료확인하면서 바뀐 내용이 반영 안 되었다고. 금방 발견했다고.
다행히 곧바로 바꿀 수 있었다.
그 이후는 아까와 똑같은 회의가 그대로 진행되었다.
아무렇지 않게 노트북 켜는 사람들의 소리, 같은 농담에 같은 웃음.
다른 사람들은 눈치도 못 채고, 그저 똑같은 흐름을 따라가고 있었다.
회의는 평범하게 흘러가고, 아무도 이상한 걸 모른다.
… 나만 빼고.
회의 끝나자 그 인간이 내 쪽을 흘깃 보더니, ‘나 잘했지’라며 속삭였다.
이 인간은 회의도 게임 리셋하듯이 한다.
진심, 미쳤다.
이건, 그냥 이팀장이랑, 발표자가 그 인간한테 밥 사야 하는 거 아닌가. 아, 아니다. 그 사람들은 모르지. 누군가 재미 삼아, 시간을 돌려댔다는 사실을.
잘 넘어갔으니 문제없는 건가.
설마 날 도와준 건가?
X월 20일
비서실 언니들과 오랜만에 점심식사를 했다. 연애상담 얘기에 이어 ‘우리 회사에서 누가 가장 잘생겼나’라는 주제로 이어졌다. 언니들은 그래도 중년 임원들 모시는 것보다 미남 본부장 모시는 게 낫지 않냐고 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나랑 그 인간을 연결 짓기 시작했다.
모르겠다. 난 연애세포가 죽었나 봐..
난 이현준 기획팀장님이 더 잘생겼다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말하자마자 언니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마, 마음대로들 이야기하네.
나도 취향이란 게 있고 이상형이란 게 있는데..
자세히 보면 잘생긴 것 같기도 하고.
쓸데없이 가벼워서, 난 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