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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의 의자

의자이야기

by 가히

아크릴화 수업을 마치면서 선생님이 말했다.

“이번 주엔 숙제를 하나 내줄까 해요.”

“아! 숙제요?”


내 맞은편에 앉은 두 사람이 동시에 눈을 마주치며 반응했다. 예나 지금이나 숙제는 반갑지 않은 불청객임이 틀림없었다. 하기 싫은 공부에 숙제까지 해야 했던 학창 시절, 입이 댓 발 나온 채 투덜대던 친구들의 표정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수업 정리를 하며 화구를 챙기는 내 뒤로 선생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무 어렵게 생각 마시고 편하게 그리면 됩니다.”


문화센터 기초 아크릴화 수업은 그림 공부에 익숙한 엄마들부터 학창 시절 이후 처음 붓을 잡는 왕초보인 나까지, 모두 9명의 여성으로 이루어졌다. 20대로 보이는 강사는 첫 시간의 긴장한 모습에서 이제는 우리와 편안하게 호흡을 맞추고 있다.


그가 내준 첫 번째 숙제는 ‘의자’.

집 안에서 각자가 아끼는 의자 하나를 골라 스케치해 오는 것이었다.


“아무 의자나 그려도 되나요?”

“의자만 그리는 건가요?”

“아오, 나는 뭘 그리지?”

“색칠도 해야 하나?”

“스케치만 하래잖아~”


왁자지껄한 모습이 꼭 말 많은 여고생들 같았다.

학창 시절, 수업이 끝날 무렵 숙제를 내주시는 선생님과 그 숙제에 토를 다는 친구들로 떠들썩하던 교실 속에서 나는 늘 생각했다.


‘왜 숙제를 싫어할까. 배운 걸 스스로 확인하는 기회인데.’

공부가 당연했고 숙제도 자연스러웠던 나는, 그 시절을 묵묵히 받아들이던 범생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평생 교사로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집에 돌아와 이 의자 저 의자를 살피기 시작했다. 단순한 모양의 의자를 고르면 스케치하기는 편하겠지만, 눈에 끌리는 의자를 그리고 싶어 둘러보다 결국 식탁의자에 내 시선이 꽂혔다.

결혼 후, 시어머니가 처음으로 장만해 주신 식탁세트. 결혼과 동시에 시댁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던 우리는 1년 후 분가를 했고, 그때 사주신 식탁세트는 지금도 우리 집 주방의 주인공으로 자리 잡고 있다.


등받이가 유난히 길고, 고급스러운 갈색 무늬가 들어간, 우리 집에서 가장 오래된 의자. 35년쯤 된 물건이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변색이나 뒤틀림 하나 없이 꼿꼿하게 우리 가족과 함께해 온 의자다.


‘참 사연 많은 가구들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자 지난 세월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더운 여름, 식탁을 사주겠다며 나를 데리고 논현동 가구골목을 돌아다니던 시어머니. 이것저것 가격을 묻고 흥정하며 다니는 일이 짜증 나고 힘들었던 나는 참 어렸다. 그런 며느리에게 최고의 가구를 사주고 싶었던 마음은 부모의 진심이었을까. 어느새 나는 그 시어머니의 나이가 되었다.


혹독하고 권위적인 성정으로 누구도 맞서기 어려웠던 시어머니. 그런 분과 낯선 논현동 골목을 헤매던 그날, 나도 불편했지만 그녀 또한 쉽지 않았으리라. 당뇨가 있던 시어머니는 평소 물을 자주 마시던 분인데, 그날따라 물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이상하다 싶었지만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화장실을 자주 찾게 될까 봐, 서울 지리를 모르는 며느리가 고생할까 싶어 그러셨다는 걸.

결혼 초반,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던 시집살이의 그 많던 서러운 기억들이 이제는 세월 앞에서 추억이 되고, 아쉬움과 후회로 아련히 떠오른다.


며칠 후 미술 수업 날.

각자의 의자 스케치를 완성하자 누군가 내 그림을 보며 말했다.


“와! 여왕의 의자 같아요.”


'어머니, 들으셨죠? 그때 사주신 그 의자들, 우리 집에서 여왕처럼 잘 모시고 있어요.

그리고 저희도 잘 지내고 있어요!'


서툴렀던 표현에도 결국 서로를 향했던 진심을 시간이 흐르며 이해하게 되는 세월이 바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자 마음이 깊어지는 거라 믿고 싶은 오늘이다.


(실물에 한참 못 미치는 의자그림이 부끄럽기만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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