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미러
저는 테드로부터 다량의 드립 캡슐과 부착 장치를 받았습니다. 드림 클럽에 접속하는 것은 간단했어요. 드립 캡슐은 15ML의 용액이 담긴 새끼손가락 보다 작은 알약 캡슐이었죠. 인간이 REM 수면 상태에 바로 빠져 들도록 하는 일종의 수면 유도제였어요. 액상을 주입하기 전 무선 연결망이 탑재된 동전 크기의 부착 장치를 왼쪽 관자놀이에 붙히고 드림 캡슐을 개봉해 액상을 귀에 주입하는 방식이었죠.
액상이 주입되면 나노드림이라 불리는 나노 봇들이 뇌 신경계에 온라인 네트워크 서버를 구축했어요. 그리고 접속자 개인의 고유 일련번호를 인식했죠. 드림 네트워크 활동과 수면을 동시에 마친 아내가 잠에서 깨면 신경계에 남아있는 나노 봇들은 자동으로 소멸되었죠. 한 사람에게 할당된 캡슐들은 모두 같은 일련번호였기에 한번만 등록하면 그 이후의 접속 과정은 자동으로 동기화 되었습니다.
효과는 상당히 빨랐습니다. 아내는 점점 생기를 찾기 시작했어요. 불면증은 없어지고 식욕도 돌아왔습니다. 무엇보다 아내는 웃음을 되찾았어요. 직장생활에서의 고충도 어느정도 회복한 듯 보였어요. 모든 게 다행스러웠지만 저에게는 하나의 걱정거리가 생겼죠.]
오진은 뜸을 들이며 무대 중앙에 비추어진 자신의 홀로그램을 쳐다보았다. 무언가 부끄럽다는 듯 작게 한숨을 쉬었고 다시 그의 음성이 만 명을 수용한 초대형 스튜디오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부끄럽지만 아내는 저와의 잠자리를 계속해서 거부했어요. 저는 혹여나 제 자신에게 문제가 있나 싶었지만 그러기엔 저는 아직 건강했습니다. 늘 사랑하는 아내의 몸을 쓰다듬으며 품고 싶은 욕망이 있었지만 아내는 그러지 않은 듯 했어요. 또한 그녀는 수면을 통해 드림클럽에 접속하는 시간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저는 어떠한 시도도 할 수 없었어요. 그렇게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자연스럽게 각방을 쓰게됐죠. 워커 홀릭인 아내에게 있어 드림클럽은 다양한 커리어 기회를 제공하는 수단인듯 보였어요. 만족도 역시 높아 보였죠. 저는 그런 아내에게 솔직히 말을 건넸죠.
"단순히 섹스 때문이 아니야. 난 우리 아이를 갖고 싶어."
아내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제가 잠자리를 요구할때마다 저에게 화를 내더군요. 그래서 그런지 저도 더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자존심도 상했어요.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아내를 존중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혹시 드림 캡슐의 부작용인 가도 싶었죠. 하지만 아무리 테디베어의 드림클럽 계약서를 꼼꼼히 살펴보아도 '성욕 감퇴'와 같은 부작용은 보이지 않았죠. 저는 이러한 문제들에 관하여 직접 테디를 만나 털어놓고 싶었지만 만남은 커녕 그와 연락조차 닿을 수 없었습니다. 테디의 '테디베어'는 이미 세계적인 유니콘 기업의 규모를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내외 유명 학자들과 의사들 모두 ‘드림 클럽’을 인정하고 주목하기 시작했죠.
매스컴과 각종 뉴스에는 연일 드림 클럽에 관한 보도가 흘러나왔고 테디는 어느새 국내를 뛰어넘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죠. 그가 그토록 애타게 찾던 베타 테스트에 참여할 만 명의 실험단도 삽시간에 가득 채워졌습니다. 저는 결국 그의 회사 앞에 찾아가 몇 번이고 접촉을 시도했지만 소용없었어요. 그는 이미 유명한 거대 기업인이 되어 있었죠.
그 사이 저희 부부 사이는 당장이라도 이혼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사이가 되어 있었어요. 우리는 서로의 문제에 대해 다투려 하지도 않았어요. 확실히 알 수 있던건, 아내는 더이상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죠. 저는 차라리 드림 캡슐을 복용하기 전의 아내가 그립기도 했어요. 당장이라도 이 세상을 등질것 같은 그녀였지만 그때 아내에게 의지할 곳은 저 밖에 없었거든요.]
조오진은 자신의 이야기에 과하게 몰입했는지 눈가가 촉촉해져 있었다. 객석에 앉은 관객들은 오진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사회자 역시 오진의 이야기를 보며 유감이라는 듯 제스처를 취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 한 통이 걸려왔어요. 새벽 두 시쯤이었죠. 저는 직감적으로 테디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는 막 출장에 다녀와 저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했죠. 저는 테디에게 두서없이 제 이야기를 쏟아냈어요. 원망과 분노였죠. 이게 다 당신 때문이라며, 이 캡슐의 부작용을 모든 언론에다 퍼뜨릴 것이라며 저주와 협박도 했죠. 테디는 그저 듣고만 있었어요. 말을 끊거나 전화를 끊지도 않았어요. 저는 급기야 감정이 복받쳐 울기 시작했죠. 그제서야 테디는 나지막히 입을 열었어요.
"조오진 씨 댁으로 드림 캡슐이 하나 갈 겁니다."
"....... 뭐라고요?"
"드림 캡슐이 필요한 것은 오진 씨의 아내분 뿐만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어요. 조오진씨는 제가 사람들을 찾아나섰던 시절, 제 이야기를 들어준 유일한 사람이었어요. 그에 대한 대가로 실험단 중 한 자리를 남겨두었죠. 물론 오진 씨가 좋아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 선택은 당신의 몫이죠."
"뭐......? 당신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누가 지금 그딴 거 필요하대? 지금 그 개 같은 캡슐이 문제라고 이 괴짜 새끼야!"
"제가 드릴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은 본인들의 선택입니다. 부작용 역시 선택의 결과겠죠. 아내분의 이야기는 유감입니다만, 제가 해드릴수 있는 방안이 없습니다. 사랑이나 감정을 한낱 기술 따위로 완벽히 치환할 수는 없을테니까요."
차분한 그의 어조에는 뼈가 있었어요. 그리고 다음날, 저녁 회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택배 하나가 문 앞에 놓여 있더군요. 네, 드림 캡슐이었죠. 알딸딸하게 술기운이 올라왔던 그날 밤, 침대에 앉아 한참을 고민했어요. 아내는 이미 다른 방에서 드림 클럽에 접속해 있었죠. 어떻게 보면 테디의 말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죠. 아내를 완전히 이해하고, 그녀와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 게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맥주 두어 캔을 더 먹었고 드림 캡슐을 이용해 숙면에 들었죠.
눈을 뜨니 저는 비스듬하게 눕혀진 1인용 투명 캡슐에 들어가 있었어요. 공상과학에서 볼법한 1인 우주선과 같은 곳이었죠. 분명히 술에 잔뜩 취한체로 접속했지만 취기나 숙취는 전혀 없었어요. 오히려 말끔한 컨디션이었죠. 그 당시에 느끼고 있던 우울한 감정이나 불안감 따위도 없었어요. 그저 모든 것이 평온했죠. 저는 먼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만져보았어요. 제가 들어있던 캡슐도 만져보았죠. 모든 촉감이 정말이지 현실 같았어요. 마치 꿈에서 깬듯 말이죠. 그리고 제 눈 앞에 놓인 캡슐 창문에는 '사용자 설정'이라는 문구가 떠있었어요. 저는 오른쪽 상단의 허공에 떠있는 '예' 버튼을 눌렀죠. 캡슐의 고유 일련번호와 비밀번호를 설정했고 캡슐 안 스캐너가 제 신체를 구석구석 스캔했어요. 헤어스타일이나 옷차림새도 설정했죠. 제가 자주입는 스타일 위주로 추천을 해주더군요. 저는 오늘 입었던 면바지와 티를 눌렀어요. 바로 제 몸에 입혀지더군요. 거의 오분도 안돼서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죠. 마지막 문장이 제 눈 앞에 드리웠어요. 모두 기억하실거에요. 그 문장 말이에요.
'꿈은 더 이상 꿈이 아닙니다. 조오진 님, 환영합니다.'
저는 사용자 설정을 마치고 드림 네트워크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했죠. 드림 네트워크는 말 그대로 또 다른 문명 도시였습니다. 테디는 새로운 또 하나의 거대한 문명 도시를 지어 놓았죠. 통유리로 된 엘리베이터가 위로 이동하면서 한밤중 서울의 모든 야경이 제 눈 앞에 그대로 펼쳐져 있었습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이 곳은 테디베어의 실제 서울 삼성동 사옥이더군요. 똑같이 구현해냈더라고요. 엘리베이터는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었어요. 이미 현실 세계 안의 건물 높이보다 훨씬 더 높은 위치였습니다. 서울의 야경이 마치 귀여운 레고처럼 희미해지고 구름에 가려지고 있었어요.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건물을 탈출해 계속해서 추진력을 받으며 구름 사이를 힘차게 통과하고 있었습니다. 비행기가 성층권에 도달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육지가 희미해지고 있었죠.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이건 일종의 효과였죠. 원래 제가 확트이고 높은 곳을 좋아해서 그런지 초반의 긴장이 느슨해지고 점점 마음에 여유가 생기더군요.
흡사 하늘에 떠있는 거대한 UFO 혹은 하늘에 떠있는 정원같은 풍경이었어요. 드림 클럽 스카이라운지에 도착하자 엘리베이터의 문이 서서히 열렸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죠. 뉴스에서 들었던 대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어요. 성별은 물론이고 노인, 어린이, 성인, 다양한 인종 등 수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죠. 하늘에 떠있는 배경은 온데간데 없고 거대한 벙커의 라운지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게임같더군요.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꽤나 여유롭고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능숙하게 체크인을 하고 제 갈길을 향했어요. 물론 저랑 비슷한 사람도 있었죠. 제 앞의 여자는 한참이나 망설이더군요. 어디로 가야하나 심각한 고민을 하는 것처럼 보였죠.
이어서 제 차례가 다가왔습니다. 프런트 데스크 직원이 저에게 체크인을 하겠냐고 물었습니다. 직원의 모습은 살짝 섬뜩했죠. 앞머리, 얼굴, 귀, 그리고 목 정도를 뺀 나머지 뒤통수나 몸통이 전부 홀로그램으로 처리되어있더군요. 군데 군데 신체 일부의 이음새들도 그러했습니다. 저는 잠깐 감상하다가 아내의 이름을 댔고 그녀를 어디에서 만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프런트 직원이 말하길 양쪽의 서버 접속자들끼리 합의된 약속이 아니라면 개인정보 조회는 불가능하다고 하더군요. 직원이 다른 도움이 필요 없냐고 묻자 저는 사실 오늘이 첫 방문이고 무엇을 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직원은 왼쪽팔을 데스크 앞 바코드에 갖다대라며 부탁하더군요. 일련번호가 스캔되며 직원은 제가 초기에 설정해 놓은 취향이나 현실의 심리상태나 개인적인 정서에 맞는 모임이나 활동을 추천해주었습니다. 주로 스카이 라운지의 식당이나 바, 패러글라이딩, 등산 등과 같은 활동들이었죠. 제 앞에 있던 여자가 왜 그토록 망설였는지 알것 같았습니다. 평소 현실 세계에서 흔히 할 수 없는 옵션들이 많았거든요. 저는 그냥 아무거나 상관없으니 추천을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프런트 직원은 알겠다며 동시에 부자연스럽고 자칫 섬뜩해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키보드를 두드렸습니다. 프런트 직원은 32번 게이트에서 열리는 초고층의 스카이라운지 파티를 매칭해주었고 저에게 몇가지 팁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를테면 원하는 스타일의 옷을 갈아 입을수 있는 상점의 위치와 게이트 포털 접속 방법 등과 같은 것들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직원의 설명을 귓담아 듣지 않았어요. 들뜬 마음으로 파티에나 놀러갈 기분은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그렇다고 마땅히 할 일도 없었죠. 그렇게 프런트를 지나 드림클럽 스카이라운지의 거대한 로비에 도착했어요. 정말 거대했습니다. 32번 게이트에 앞에 다가갔는데 아까 직원의 말을 경청하지 않아서 그런지 입장하는 방법을 몰라 상당히 애를 먹고 있었어요. 그때 한 여자가 제 옆으로 걸어왔어요. 아까 제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던 그 여자더군요. 단번에 알 수 있었죠. 주위에 극히 평범한 일상복을 입은 사람들은 그녀와 저뿐이었거든요. 다른 접속자들은 모두 파티를 의식한듯 한껏 멋을 부리고 나왔더라고요. 여자는 능숙하게 왼쪽 팔꿈치를 갖다대더군요. 그러자 게이트의 스캐너가 반응했습니다. 저는 왼쪽팔을 들어올려 팔꿈치쪽을 쳐다 보았습니다. 제 왼쪽 팔꿈치에는 제 일련번호가 적혀있더군요. 저는 여자를 따라 스캔을 한뒤 게이트 안으로 입장해 엘레베이터를 탔습니다. 엘레베이터는 한없이 올라갔습니다. 107층중 대략 60층대에 도달 했을 때, 여자가 저를 빤히 쳐다보더니 말을 건네더군요.
"프론트에서 추천받았나봐요."
"네? 아, 네."
"저는 NPC아니에요."
"네?"
"일반 접속자에요. 드림 클럽에서 개발자가 프로그래밍한 가상 설계 인물이나 형태를 일부러 바꾼 서버 관리자 뭐 그런거 그 둘다 아니라고요."
"아, 네. 여기는 자주 오시나 보네요."
"아니요. 그런데 접속은 매일하고 있어요."
"원래는 어디 가세요?"
"그건 말씀드릴수 없어요."
"남편분이 계신 곳인가."
저는 퉁명스럽게 그녀에게 농담을 건넸어요. 순간 실례를 범했거나 혹은 그녀에게 무리수를 두었나 싶어 민망해했죠. 하지만 그 여자는 무척이나 재미있다는 듯 한참을 소리내어 웃더군요. 저도 그 여자가 웃는걸 보고 따라 웃었어요. 엘레베이터가 107층에 올라갈때까지 말이에요. 정말 오랜만에 그렇게 실없이 웃어봤어요. 그리고 곧이어 엘레베이터의 문이 열렸습니다. 제가 참가한 클럽은 스카이 라운지에 있는 사교모임이었습니다. 일상 생활에서의 제 기준으로 볼때 허영심 가득찬 그런 멍청한 종류의 모임이었죠. 하지만 뭐, 이건 꿈이었죠. 게다가 베타 테스트 기간에는 모든 활동이 무료였습니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었고 호기심이 충만했기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루시드 드림과 같은 곳에서 깨어 현실로 돌아간 뒤 아내를 보며 속을 앓는 것보다는 훨씬 생산적이겠다는 생각을 했죠. 사람들은 이미 저마다 친해져 있거나 짝을 이루고 있더군요. 하지만 그 공간에서 저의 관심사는 오로지 107층의 뷰였어요. 저는 바텐더에게 다가가 데낄라 샷잔 다섯 개를 한 컵에 담아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컵을 들고 야외 테라스 발코니로 향했죠. 난관에 손을 얹고 데낄라를 물마시듯 연달아 넘기며 그곳의 전경을 바라보았어요. 거대한 도심속 빌딩들이 서로 이어져 있었어요. 도심을 벗어나 시선을 더 멀리하면 울창한 숲과 공원도 보였어요. 숲길을 따라가다 보면 거대한 절벽과 아름다운 해변가가 보였고 바다 사이사이에는 섬들이 자리잡고 있었죠. 지구 어느 곳에서도 볼수 없는 그런 곳이었어요. 저는 바다의 고요한 수평선 너머를 한참동안 바라보면서 감상에 젖어있었어요. 슬슬 술기운이 올라왔죠.
"이제 구면인거죠."
아까 그 여자 였습니다. 여자는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어요. 저는 그녀에게 문득 한가지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실례가 안된다면 실없는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좋아요."
"여기서 배운게 뭐에요?"
"네?"
"아니, 그냥 저보다 그쪽이 여기 더 오래 있었으니까, 그래서 물어봤어요. 그러니까 이 드림 클럽이라는 공간에서 뭐 하나라도 느낀게 있다면 뭘까 그런 질문이었어요. 제가 너무 심오하고 쓸데 없는 질문을 했네요. 저는 그냥......"
"내가 바라는게 내가 바라는게 아니라는거요."
"무슨 말이에요 그게?"
"꿈이 굉장히 역설적이고 잔인해요 가끔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저는 그 말이 썩 마음에 들었습니다. 시적이고 멋진 말이었어요. 그래서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었죠. 그녀는 그냥 미소만 지었어요. 어떻게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냐고 또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는 순간 우리는 아마 서로의 현실세계를 들여다 보고 더 가까워 질테니까요. 저는 솔직히 그녀의 사연이 궁금했지만 제 사적인 이야기는 하기 싫었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 공간에 있는 부류들과는 구분을 짓고 싶었거든요. 다른 접속자들처럼 부부관계에 불만을 갖고 불륜이나 시도하는 사람처럼 행동하기는 싫었습니다. 바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남녀들을 보니 모두 그렇게 보이더군요. 그도 그럴것이 드립 캡슐 베타 서버 참여단들 중 현실 세계에서의 부부가 동반 참여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 되어 있었으니까요. 달리 말해 술을 마시고 있는 남녀들중 현실세계에서의 부부는 결코 단 한커플도 없다는 말이었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룰에서 예외적인 사례가 유일무이하게 저와 제 아내였습니다.
어쨋든 저는 그녀와 한참을 더 이야기하다 헤어졌습니다. 우리는 그제서야 통성명을 했죠. 서로 이름조차 모를 정도로 떠들었던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이름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거든요. 문득 그렇게 흥미롭고 매력적인 소통을 한지가 언제인가 싶더군요. 우리는 서로 합의하에 가명을 쓰기로 했습니다. 저는 블루, 그녀는 레드였죠. 이유는 딱히 없었습니다. 바 테이블의 파란 조명은 저를 비추었고 빨간 조명은 그녀를 비추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렇게 드림 클럽을 사용한 첫날을 마무리 했어요. 잠에서 깨어보니 숙취도 없고 정말로 개운했습니다. 드림 클럽의 숙면 효과는 놀라웠어요.
그날부터 더 궁금해지더군요. 제 아내는 과연 드림클럽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했습니다. 저는 그날부터 아내를 의심했습니다. 부정적으로 그녀를 바라보기 시작한 거죠. 아내는 꿈에서 결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었죠. 제가 그날 밤 드림 클럽에서 보았던 인간들처럼 바람을 피우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상하게 아내에게 물어볼 용기도, 그리고 알아낼 용기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저는 아내에게 드림클럽 접속 권한이 생긴 것을 숨기고 있었죠.
저 역시 그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드림 클럽에 접속했어요. 이제 더 이상 저에게 있어 밤은 수면의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아내가 왜 그렇게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드림 클럽에 접속하는지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더군요. 저는 매일 같이 레드와 함께 했어요. 접속만 하면 게이트를 통해 어디든지 갈 수 있었죠. 어느 날은 등산을 했고 계곡에 발도 담구었습니다. 또 어떤 날은 페러 글라이딩을 하고 산 정상에서 맥주도 마셨죠. 그곳은 정말이지 없는 곳이 없더군요. 모든 오감이 살아 있었고 현실적이었어요. 아름답고 환상적인 곳이었습니다. 제 마음도 점점 레드와 가까워지고 있었죠. 그녀와의 대화는 행복했습니다. 제가 원하던 부부사이는 바로 그런거였어요. 이 개같은 꿈속에서 다른 여자를 통해 느끼고 있었죠. 사실 인정합니다. 맞아요. 저는 정신적으로나마 아주 농밀한 외도를 저지르고 있었어요. 동시에, 제 마음은 더 공허해지고 불안해져 갔죠.
하루는 레드와 섬에 놀러갔어요. 해변가에서 오붓하게 와인을 마시며 빔 프로젝트를 쏘아 영화를 보고 있었죠. 분위기가 무르익고 우리는 처음으로 키스를 했어요. 이어서 저는 그녀와 몸을 섞었습니다. 그녀 역시 거부하지 않았죠. 저는 그만 자제력을 잃었습니다. 그녀와 격렬한 섹스를 하는 도중, 저는 힘껏 레드를 밀쳐냈어요. 그리고 거리를 두고 한참동안이나 그녀를 쳐다봤죠. 그녀 역시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무런 작별 인사도 없이 섬에서 나왔고 드림 클럽내의 포탈로 향해 급하게 접속을 종료시켰습니다. 현실에서 눈을 뜬 저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헐레벌떡 아내의 방으로 찾아갔죠.
아내는 방에서 조용히 잠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드림 클럽에 접속 중이었죠. 저는 아내 옆으로 다가가 그녀가 자는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습니다. 그 죄책감이란 참으로 치욕스러울 정도더군요. 어쩌다가 우리가 이렇게 된걸까, 수없이 절망하며 저는 아내 옆에서 한참을 흐느껴 울었어요. 하지만 그 절망도 잠시였죠. 문득 궁금했졌습니다. 제가 겪었던 일들이 아내에게도 일어나고 있을수 있는 일이잖아요? 의심이 들었죠. 저는 아내 몰래 조심스럽게 화장대 서랍을 열었어요. 숨을 꾹 참고 까치발을 들며 아내의 드림 캡슐 몇 개를 몰래 갖고 거실로 나왔죠. 정말 심장이 터질것만 같았어요.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말이죠.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