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홍대 주민으로서의 마지막 날들
#나홀로,고흥
고흥에 혼자 오는 건 처음이다.
(지난해부터 어촌, 로컬사업 준비한다고 자주 오갔고, 전에도 여행 등으로 종종 오긴 했지만...)
세종시에서 있었던 어촌신활력증진사업 1년 차 운영계획 해수부 심의를 마치고(나는 무려 '소장' 역할(고흥군 취도금사항 어촌앵커조직)을 맡게 되어, 여러 진중(?)해 보이시는 심의위원님들 앞에서 발표를 했다),
한껏 곤두선 마음을 가라앉히며 긴장이 확 풀어진 마음으로 남쪽으로 향했다. 지리산 언저리에 당도하면 펼쳐지는 수려한 산등성이에 감탄하면서 더 내달려 최남단에 붙어있는 땅에 들어서니, 해는 떨어질 무렵이다.
초저녁 벌써 상당수 문을 닫는 불 꺼진 가게를 보며 여기는 서울과 다른 세상임을 직감하고, 텅 비어있고 휑하고 정돈되지 않은 새로 얻은 전셋집에, 인기척 없는 어두운 집에 홀로 문열고 들어서는 순간, 한없는 낯선 감정이 범람하듯 몰려왔다. 나는 여기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그렇구나. 작년부터 숱하게 오갔고 할머니, 할아버지… 나의 ‘조상님’들 흔적이 짙게 뭍은 땅이라도 내게 이곳은 아직 외지이고 나는 이방인이다.
막 도배를 마쳐 너저분한 거처를 혼자 정리할 엄두가 나질 않아, 에라 모르겠다 밖으로 나왔다. 혼자 낑낑대며 이사 전 가져온 짐을 옮기느라 덥고 기진맥진. 고흥읍내에서 그래도 늦게까지 불을 밝히는 ‘역전할머니맥주’ 집을 찾아 들어갔다.
고흥에서 맞이하는 첫 혼맥 순간.
말은 통하는데, 맥주맛은 별다를 바 없는데, 국어는 그대로 여기저기 쓰여 있는데 주위엔 분명 한국인들인데, 뭔가 상당히 다르다. 오전에 서울집에서 나와 세종시를 거쳐 남으로 남으로 달려 순천을 찍고 벌교까지 저만치에 두고 더 남으로 내려가 해 떨어져서야 당도한 곳. 이곳은 분명 멀리 떠나온 땅이다. 익숙했던 일상과의 거리감이 주는, 내가 속하지 않은 일상의 공기와 마주하며 느끼는 직감적인 반응이랄까. 저 머나먼 여행지에서 받았던 이그조틱(exotic)한 감정이 여기 남도에서는 재현된다.
이제 다음 달 어느 시점이면 나는 여행자도 아니고 종종 오가며 일처리를 하는 사이를 넘어서는, 이삿짐 잔뜩 싸들고 내려와 주요 근거지 삼아 사는 주민의 한 사람이 된다. 고흥에 살며 어촌에서 일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새로운 일상이, 나의 생에 어떤 시점을 수놓을 로컬살이가 시작될 것이다.
#아직은,홍대주민
(다시 서울로 와서...)
모처럼 휴일. 1번 출구 뒤 홍대거리에서 어슬렁거리다가, 해머스 잠봉 샌드위치집에 왔다.
이런 일상과 이제 멀어지겠구나,
그런 마음으로 집으로 향하지 않고 길가로 난 작은 테이블에 홀로 자리를 잡았다. 얇게 저민 숙성햄 잠봉으로 만든 샌드위치는 입에서 살살 녹듯 맛있었고, 음료 같은 맥주 라들러도 곁들였다.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곳. 환한 웃음 뒤로 내비치는, 뭔가 해보겠다는 젊은 여사장님의 열의를 체감하며, 자주 거닐던 동네 골목 한 모퉁이를 여행자처럼 낯설게 바라봤다.
정말 이런 일상의 풍경과 멀어지겠구나.
거리에는 저마다의 치장을 한 청년, 캐리어 끌고 다니는 여행자로 가득하다. 이제 내가 가야 할 곳은 정반대의 풍모를 한 주민들이 주로 기거하는 곳. 한 시대를 살아도 세월의 속도는 같지 않다. 나는 서울과 고흥을 오가며 사람과 공간, 그 외 다양한 곳에서 나타나는 ‘시차’를 강하게 느끼곤 했지만, 그것은 단순히 우열을 논하긴 어려운 차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없는, 발견하기 어려운, 그러나 연결될 수 있는 로컬의 매력과 잠재력을 부여잡아야 한다! 무엇보다 새로운 일상에 적응하며 주민으로서의 소소한 행복을 잘 발견해 나가야 할 것이다.
여하튼 아직은 홍대주민. 작별의 순간을 앞두니 괜스레 다시 설레는 동네살이랄까^^
#마지막,동네산책
당분간 혹은 더 길게, 이 동네를 떠나 있을 생각을 하니 오늘은 서글픈 감정이 몰려왔다.
느지막한 일요일 오후, 가볍게 스치듯 내린 봄비에 서교동은 촉촉하고 차분하다. 살던 동네가 주는 중력은 분명 질기게 작동한다. 나를 붙잡는 건 홍대 메인스트릿의 호기로운 번화함보다는, 오늘처럼 추리링 입고 이유 없이 나와 걷고 배회하던 골목, 작은 정원(러블리한 서교마을마당), 단골가게, 일상을 채워주던 공간일 터.
주민이자 나그네인 나는 오늘 이 동네가 지닌, 나와 맞닿았던 질감을 새겨 넣으며, 여기와는 완전히 결이 다른 남쪽의 한없이 광활하면서 너무도 자그마한 동네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시기. 꽤 자주 설레지만 오늘은 두렵다. 무엇이 사라지고 무엇은 남을까. 또 무엇은 새로이 발화하고 연결될 수 있을까.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