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하루#김종관#2016
§최악의 하루 Worst Woman, 2016
늦여름 서촌의 어느 날, 배우 지망생 은희는 연기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길을 찾는 일본인 소설가 료헤이를 만난다. 말은 잘 안 통하지만 이상하게 대화가 이어지는 료헤이와 헤어진 후 은희는 드라마에 출연 중인 남자친구 현오를 만나러 촬영지인 남산으로 향한다. 같은 시간, 한 때 은희와 잠깐 만났던 적이 있는 남자 운철(이희준)은 은희가 남산에서 올린 트위터 멘션을 보고 은희를 찾아 남산으로 온다.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여자는 무망하게 서 있다. 도시엔 벌써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사그라드는 햇빛이 꼭 죽어가는 사랑을 보는 것 같다. 정말이지 최악의 하루였다. 머물 데 없이 흔들리는 시선이 그녀를 더 위태롭게 만드는 것 같다. 곧이어 도시 위에 내려앉은 어둠처럼 그녀의 목소리가 화면을 가득 덮는다.
“긴 긴 하루였어요. 하나님이 제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한 날이에요.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럴 수 있겠어요. 저는 당신이 원하시는 걸 줄 수 있어요. 하지만 그건 진짜가 아닐 거예요. 진짜가 무엇일까요. 사실 다 솔직했는걸요.”
이건 거짓말을 하는 여자가 하루 동안 거짓말을 하는 남자들을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다. 늦여름 서촌의 어느 날, 배우 지망생인 ‘은희’는 하루 동안 일본에서 온 소설가 ‘료헤이’, 현 남자친구 ‘현오’, 전 남자친구 ‘운철’을 모두 만난다. 얽히고설켜 꼬일 대로 꼬인 관계 속에서 그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던 건 결국 사랑에 관한 이야기인 걸까? 혹은 삶에 관한 이야기? 그것도 아니라면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였던 걸까.
섬세하게 흔들리던 화면을 기억한다. 남자는 열심히 카메라의 작동법을 가르쳐 주지만 여자에겐 그 내용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카메라를 만지는 남자의 손보다는 그의 얼굴을 향해서 그녀의 시선은 자주 움직인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짧은 시간 동안 여자는 온 마음으로 떨고 있었다. 영화 <폴라로이드 작동법>의 이야기다.
김종관 감독은 전작인 <폴라로이드 작동법>에서 보여 주었던 디테일한 마음의 기척을 <최악의 하루>에서도 고스란히 담아낸다. 생동감 넘치는 감정의 순간순간을 카메라는 섬세하게 담는다. 서로의 순간을 요약해 주듯 포개어지고 이어지는 인물 간의 에피소드는 사랑과 삶의 모든 순간을 응시하고 끌어안으려는 감독의 시선처럼 따스하고 신선하다.
한예리는 이제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얼굴로 스크린을 넘어 우리에게 온다. 새하얀 도화지에 물감을 칠하듯 그녀는 영화에 특유의 분위기를 채워 넣는다. 료헤이를 만났을 때 그녀는 산뜻한 매력으로 시종 들떠있다. 현오를 만났을 땐 발랄하지만 종종 독설도 쏘아붙이며 탄산처럼 톡톡 터지는 매력을 선보인다. 운철과 함께 있을 땐 가련해 보인다. 심지어 각각의 인물을 만날 때마다 머리끈을 이용해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말투도 달라진다(료헤이와는 영어를, 현오에겐 반말을, 운철에겐 존댓말을 사용한다). 한편 권율과 이희준은 우리 주변의 흔한 지질한 남자의 모습으로 분하여 영화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이와세 료는 대책 없고 무모한 영화에 든든한 중심과 포근한 외투를 마련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프시케 이야기가 있다. 프시케는 아프로디테 여신의 질투를 사는 바람에 아무도 청혼하지 않는 저주에 걸린다. 하지만 한순간의 실수로 프시케에게 사랑에 빠지게 된 에로스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조건으로 그녀와 결혼한다. 그러던 어느 날, 호기심을 참지 못한 프시케는 남편의 정체를 알게 되고 그 바람에 두 사람의 사랑은 무너진다. 진실에 대한 집착이 한 사랑을 망가뜨린 것이다.
마찬가지로 <최악의 하루>에도 거짓말은 난무한다. 은희는 만나는 남자들에게 맞춰 자신을 연기한다. 현오는 너를 위한다지만 사실은 자기밖에 모른다. 운철은 이혼이 아닌 불륜이었다는 사실로 그녀에게 상처를 남긴다. 료헤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는 편집자의 거짓말로 약속시간보다 일찍 장소에 도착하였다. 출판기념회에 온 두 사람은 그의 팬을 가장한 나들이객이다. 하물며 그의 직업조차 거짓말을 통해 이야기를 만드는 소설가다.
하지만 그 모든 하루가 거짓말이었다고 해서 거짓말이 가져오는 설렘도 거짓이 되는 걸까. 영화 속에서 은희는 이렇게 말했다. “긴 긴 하루였어요. 하나님이 제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한 날이에요.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럴 수 있겠어요. 저는 당신이 원하시는 걸 줄 수 있어요. 하지만 그건 진짜가 아닐 거예요. 진짜가 무엇일까요. 사실 다 솔직했는걸요.”
저 앞에 내가 좋아하는 그/녀가 있다. 가능하면 그/녀에게 모든 걸 맞춰주고 싶다. 내 취향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나는 ‘나’를 숨기고 그/녀가 원하는 ‘나’를 만들어낸다. 설령 연애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어쨌거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혹은 타인을 위해 가면을 쓰고 거짓말을 하니까. 거짓말의 원인으로는 거짓된 마음만 있지 않다. 어떤 거짓말은 솔직함의 간절함이 빚어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연애란 결국 거짓말 놀이다. 거짓말은 판타지를 만들어내고 연인들은 그 판타지를 소비한다. 연애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의미가 아니다. 의미보다 맥락이 더 중요하다. 때문에 서로에게 건넸던 말의 의미와 진실을 파헤치는 순간 사랑은 병들기 시작한다(그래서 운철은 영화 내내 진실보다 진심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랑은 굶주려 죽지 않는다. 그것은 대부분 소화불량으로 죽는다.
해가 저물고 영화는 훌쩍 비상한다. 서로의 맴돌던 감정과 겹을 이루던 긴장은 몽롱해지고 꿈결처럼 남는다. 여자는 엉켜버린 관계에 망연자실하고, 남자는 불현듯 마주한 자기모순에게 말을 잃는다. 쓸쓸한 밤은 길었던 낮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12시가 지나면 타이머와 함께 모든 건 0으로 리셋된다. 이젠 내일이다. 어제는 중요하지 않다. 어제의 밤은 내일의 낮을 만들지 못하지까. 약속은 끝났어요. 그 한 마디로 은희는 그렇게 자기만의 12시를 만들었고, 주문처럼 해피엔딩을 다짐한다.
아마도 밤길을 걷는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질 것이다. 연애는 의미보다 맥락이 더 중요하니까. 서로가 내뱉은 말의 의미가 무엇을 향하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두 사람의 말이 섞여 들어가는 그 풍경이 더 중요하다. 거짓말로 시작한 연애는 그 거짓말이 들키면 끝이 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끝낸 그 거짓말로 다시 사랑을 시작한다. 그 거짓말이 다시 이별이 불러올지는 몰라도, 어쩌겠나.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게 바로 연애의 비밀인걸.